〈 80화 〉 80화. 이세계 탈주닌자 (5) [完]
* * *
명문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실리번 기숙학교의 운동장, 두 여자가 그곳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파란 눈과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와 금발 소녀였다.
“소풍 나온 기분이다. 너무 좋아요.”
“다행이네.”
“아! 오르페 언니, 이거 한 번 드셔봐요!”
금발 소녀, 디아나가 보따리를 풀고 안에 든 쿠키를 들어 올렸다. 토끼 그림이 그려진 작은 쿠키였다.
“이쁘다. 이것도 새로 온 선생님께 배운 거야?”
파란 눈의 여자, 오르페가 쿠키를 받은 후 살짝 들어 올렸다.
“네! 아는 게 진짜 많으세요. 캔디 만드는 것도 배우는데, 정말 재밌어요. 빵이랑 쿠키, 캔디 전부 다 예쁘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오르페가 신난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쿠키를 입안에 넣었다.
짧은 시간동안 맛을 음미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맛있어. 이제 제빵사 해도 되겠다.”
“진짜요? 몇 점인가요?”
눈을 빛내는 어린 소녀의 모습에 오르페도 픽 웃었다.
“100점.”
신과도 같았던 마탑주가 죽고, 붉은고래 마탑은 무너졌다.
이르갈 왕국의 꼭두각시 왕족들은 전부 붙잡혔고, 붉은고래 마탑과 손을 잡은 세력들은 강력한 처벌을 받게 됐다.
감시자를 내쫓을 수 있는 가로등은 세뇌 음파 기능이 제거된 채 그대로 남게 됐다.
아이들이 그림자 없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시대가 오게 된 것이다.
“우와, 거짓말 아니죠?”
“알잖아. 난 거짓말 잘 못 해.”
사람은 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사람이라면 크고 확실한 목표를 잡아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기에, 지상최강을 꿈꿨다.
그렇지만 막연한 꿈이었다. 지상최강이 무엇인지는 남자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우연히 접한 아마추어 만화를 보고 지상최강이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깨달았다.
그 만화에서 나온 지상최강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힘없고 선량한 자들을 보호하는 선한 인물이었다.
닌자마을을 등진 자.
주군이 아니라 백성을 섬기는 자.
무의 화신이자 두려움의 상징.
남자는 지상최강의 존재를 탈주닌자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슬슬 어두워지네. 들어갈까?”
“네!”
오르페가 디아나의 손을 잡고 학교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탈주닌자라고 불린 남자가 긴 잠에 빠진 지 2년이 지난 날이었다.
***
산 깊은 곳에 있는 한 저택.
“아가씨, 오셨군요.”
중년의 하녀가 그곳에 들어서고 있는 오르페를 맞이했다.
“여기까지 마중 안 오셔도 돼요.”
“아유, 어떻게 그래요. 이거라도 해야 제가 면목이 서죠.”
사람 좋게 웃는 하녀에게 오르페가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집으로 들어갔다.
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장소에 만들어진 눈에 잘 띄지 않는 고요한 저택.
오르페가 그녀를 여왕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직접 선택한 집이었다.
왕좌를 거절한 이유는 별거 없었다.
다른 사람 위에 서서 중대사를 결정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더 괜찮은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수고하셨어요. 이제 쉬세요.”
“목욕물 데워놨으니, 시간 나실 때 탕에 들어가세요.”
“고마워요.”
짧게 하녀에게 감사를 표한 오르페가 복도로 들어섰다.
복도 중앙에는 커다란 늑대 머리가 하나 걸려 있었다.
평범한 늑대가 아닌, 몬스터를 죽여 만든 박제형 장식품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계인과 몬스터의 혼혈이자 왕족 암살자 벨더가드 사무초의 머리였다.
그동안 로빈의 기행과 미친 짓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르페도 적에게는 한없이 잔인한 사람이었다.
짐승처럼 박제되어 장식품 취급을 당하는 벨더가드의 말로는 다섯 살이나 어린 여동생을 비롯한 가족들을 죽이고 뻔뻔하게 웃었던 그에게 오르페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다.
“나 왔어.”
가벼운 복장으로 갈아입은 오르페가 검은색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의 오른쪽에는 여러 책이 꽂혀 있는 책장이 있었고, 왼쪽에는 로빈이 사용하던 장비들이 잘 손질된 채 걸려 있었다.
“로빈.”
그 중앙에 위치한 침대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남자가 누운 침대에는 각종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으며, 구석에 잔뜩 쌓인 영양분이 가득한 마법 수액은 그의 정맥으로 주사되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로빈.
세상에는 탈주닌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영웅이자, 오르페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어땠어?”
조심스럽게 다가간 오르페가 로빈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날마다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괜찮네.”
손을 내린 오르페가 침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난 오늘 디아나랑 만났어. 잘 지내고 있더라. 날이 갈수록 예뻐지는 게 보여. 사랑 많이 받는 거 같아.”
“...”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새로 부임한 선생님 솜씨가 아주 좋은 거 같아. 빵만 아니라 캔디나 쿠키 같은 것도 잘 만드신대. 디아나가 엄청 좋아해. 다른 학생들도 좋게 생각하더라. 인망도 꽤 있으신 것 같고.”
“...”
“...오랜만에 트리보 얘기를 해도 될까? 네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 같아서 안 했는데, 그래도 친구잖아. 감시자랑 정신세계에서 싸우고 있던 너를 지키는 데 많은 도움을 줬어. 친하게 지내지 않아도 되지만, 조금은 부드럽게 대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아.”
“...”
“전에 살짝 말한 거인데, 기억나? 트리보는 감시자들의 저주를 풀기 위해 멀리 떠났잖아. 그 후로 잘 연락도 안 됐고.”
“...”
“그때 트리보가 같이 가자고 했는데, 거절했어. 맞아. 네 덕분이야.”
“...”
“몇 달 전에 연락이 왔어. 응. 이걸로.”
오르페가라미나의 목걸이 겸 고그마그족의 통신기를 들어 올렸다.
“코름갈드 왕국에서 다른 고그마그족을 찾았다고 했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트리보처럼 기억이 불안정한 상태였다고 했어.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그런 거라고 하더라.”
“...”
“같은 고그마그족끼리 모여서 붉은고래 마탑주가 연구하고 있던 저주 해주법을 해석하고 있데. 해석이 완료되면 오큘이나 하이너, 바비루사도 몬스터가 아니라 이계인이라고 불러야 할걸.”
“...”
“보니타, 지나, 새튼 같은 모험가들이 직장을 잃게 될 수도 있어. 새튼은 이번에 예술가들의 도시 렝헬에서 지부장이 됐는데, 이 소식을 전해주면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
“보니타 씨도 좋게 생각 안 하시겠어. 그도 그럴 게 몬스터 때문에 가족을 잃으셨잖아. 몬스터가 이계인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시겠지.”
“...”
로빈을 살펴보던 오르페가 갑자기 풋 하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절반은 이계인이네. 그거 알아? 난 진짜로 모르고 있었어. 이르갈 왕국의 초대 국왕이 고대용사와 결혼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냥 왕가의 정통성을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 설마 그게 사실이었을 줄이야.”
“...”
“그래. 나도 알아. 관심 없다고 하겠지. 넌 네가 아직도 왕족인지 모르잖아. 궁금해하지 않길래 나도 그냥 가만히 있었어. 거리감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거든.”
“...”
“로빈.”
“...”
“로빈, 내 목소리 들려?”
오르페가 로빈의 손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
“듣고 있는 거지? 그렇지?”
“...”
“...알잖아. 나는 포기 안 해. 난 내가 하고자 마음먹은 건 전부 해 왔어. 사갈의 꼬리에서도 빠져나왔고, 너한테 싸우는 법도 배웠고, 원수인 벨더가드도 직접 죽였어.”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그러니까 너도 포기하지 마. 지금까지 잘만 일어났잖아.”
눈물을 훔친 오르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소설책을 읽어줄게.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최근에 재밌게 읽은 거야.”
방을 정리한 그녀는 불을 끈 후 방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가 끊긴 느낌.
오르페가 천천히 몸을 돌려 로빈이 누워 있는 침대를 확인했다.
“오르페.”
그가 상반신을 일으킨 상태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난 소설책이 싫어.”
“아…!”
너무 놀라면 말이 안 나온다는 게 진짜였나.
한 번 열린 오르페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로빈은 그런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봤다.
“넌 역시 말이 너무 많아.”
“로빈!”
돌아온 오르페가 로빈은 세게 끌어안았다.
수척해져서 그런지 저항조차 못 한 채로 다시 드러눕게 된 로빈.
“누벨피어.”
“...응?”
그런 그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왔다.
“마지막 남은 위대한 다섯 성령이야. 천마 모니카 소버린을 흡수하고 놈이 있는 장소를 알아냈어.”
“아, 어.”
로빈이 오르페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너 좀 달라진 거 같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2년.”
“뭐? 모니카 이 씨발년이 진짜…!”
갑자기 화를 쏟아낸 로빈이 헛기침을 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누벨피어, 그 녀석이 감시자의 협곡에 숨어 힘을 모으고 있더군. 2년이나 지났으니 놈도 더 강해졌겠지. 몸 좀 푼 다음에 잡으러 갈 거야.”
“그, 그래?”
“같이 갈래?”
오르페의 동그랗게 변한 눈과 로빈의 무심한 눈이 마주쳤다.
2년이나 지났음에도 로빈은 그대로였다.
“물론이지.”
오르페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