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81화. [외전] 탈주닌자가 없는 세계 (단편, IF)
* * *
광역 파괴 마법이라도 맞은 것처럼 옆구리가 움푹 파여 있는 절벽의 꼭대기.
세 개의 그림자가 고그마그족의 망원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붉은고래 마탑을 보고 있었다.
은신망토로 위장한 그들은 568, 디아나, 고그마그족의 수호자였다.
‘용기사 님,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세요.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568이 릴리아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릴리아와 흰돌고래는 최후의 순간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맞서 싸웠다.
이 장소를 알려준 것도, 세 사람이 여기까지 도착하기 위한 시간을 벌어준 것도 전부 그들이었다.
“...”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야 했는가.
568이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허리춤에 있는 검집을 만졌다.
568. 이르갈 왕국의 살아 있는 마지막 왕족이자, 진짜 이름을 버린 여자였다.
이르갈 왕국을 그림자 속에서 지배하려는 붉은고래 마탑의 음모에 의해 그녀의 가족들은 벨더가드 사무초에게 살해당했다.
홀로 살아남은 그녀는 어머니와 친분이 있던 마법사의 도움으로 머리카락색을 바꾼 후 조용한 시골에서 그녀와 같이 지냈다.
사갈의 꼬리라는 왕국 최악의 암살자 조직에 두 번째 어머니와 같은 마법사를 잃고 납치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납치한 아이들을 폐광산으로 끌고 와 숙련된 암살자로 길러 내는 그들에게 은신술과 암살 기술,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을 배웠다.
끔찍한 수련과 가혹한 구타에 그녀의 앞번호였던 567은 견디지 못하고 죽은 지 오래.
암살 교관 중에서 가장 강한 385는 살아남기만 하면 조직원으로 받아줄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녀의 실처럼 가는 눈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암살자로 완성되어 사갈의 꼬리 조직원이 된다면 죽을 때까지 사람을 죽이며 살아야 한다는 걸.
철저한 그들이니 배신이나 은퇴, 도주는 용납하지 않을 터.
가족의 복수도 못한 채로 평생 사갈의 꼬리에 묶이지 않으려면 그들을 무찔러야 했다.
하지만 혼자서 달인급인 암살자 여럿을 이기는 건 불가능.
같이 훈련을 받았던 후보생들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사갈의 꼬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고, 뛰어난 잠재능력을 보이는 사람들 위주로 포섭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555,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561과 562, 후보생 서열 2위인 547를 중심으로 해 그룹을 만들었고, 후보생 서열 1위였던 568이 리더를 맡았다.
반란을 위해 실력을 갈고닦았고, 의심받지 않기 위해 통과 의식인 ‘제물’을 죽이는 짓도 했다.
‘시간이 좀 걸릴 테지만, 우리는 성공할 거야.’
정식으로 조직원이 됐고, 3년 동안 암살자로 활동하면서 사갈의 꼬리 핵심 간부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조직의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지금까지 함께 해온 동기들과 함께 그들을 기습했다.
세 번째로 강했던 근육질의 대머리 거한인 간부 132는 561과 562가 죽였다.
두 번째로 강했던 사갈의 꼬리 수장은 555와 547이 죽였다.
다음 수장 후보이자 가장 강했던 가는 눈의 여자 385는 568이 생사를 넘나드는 일기토 끝에 죽였다.
구심점을 잃은 사갈의 꼬리는 뿔뿔이 흩어졌고, 568과 동기들은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568은 많이 강해져 있었다.
기습이 아니더라도 잘 훈련된 기사 하나는 죽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 수준으로는 목표로 한 벨더가드와 붉은고래 마탑의 마탑주를 죽일 수 없었다.
더 강해져야 했다. 그것도 자신의 진짜 신분이 노출되지 않을만한 방향으로.
568은 동기들과 흩어졌고, 지혜로운 영주가 다스리는 마르톨란으로 갔다.
그곳에서 모험가 길드에 들어갔다.
3년 전에 용족들의 습격을 받은 마르톨란 지부는 아직도 그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고, 강한 모험가의 탄생을 원했다.
그곳에서 여러 퀘스트를 처리해 은 등급의 모험가가 됐다.
“언니.”
생각에 잠겨 있던 568의 어깨를 누군가 건드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텅 빈 동태눈을 한 어린 여자아이의 이름은 디아나.
“그냥.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3년 전에 일어난 습격 사건의 원인이었던 디아나는 용족이었다.
그것도 1000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다는 전설적인 존재인 황금룡.
디아나가 용족인 자신들처럼 식인을 일삼는 난폭한 존재로 자라지 않기를 바란 그녀의 언니, 라미나는 몰래 모험가 길드에 퀘스트를 넣어 여동생을 용족들의 터전인 단풍잎 마을 바깥으로 빼내려 했다.
퀘스트를 받은 모험가 보니타, 새튼, 지나, 롬빈, 올펜은 날이 밝기 전에 디아나와 함께 모험가 길드로 향했고, 마르톨란 지부에서 다른 모험가들과 함께 해가 뜨자마자 추격해온 용족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검은 피부의 용족은 너무나도 강해서, 궤스트를 받은 모험가들과 지부의 모든 사람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보니타의 긴급 전보를 받고 바람처럼 나타난 모험가 길드장 윌리엄 16세와 금 등급 모험가들이 용족을 전부 죽이지 않았다면 피해는 더 커졌을 것이다.
이후 디아나는 정체를 숨기고(정확히는 정체를 아는 사람이 모두 죽었다) 길드의 하급 모험가로 약초를 캐며 지냈다.
어린 나이에 험한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는 디아나의 모습을 본 568이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으면, 평생 그렇게 살 터였다.
‘언니, 사실은요...’
568은 친언니처럼 디아나를 보살폈고, 그녀는 마음의 문을 열고 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다.
같이 살게 된 그녀들은 2인 파티를 짜 모험가 일을 했고, 기괴한 물건 해석 퀘스트를 받아 무너져 가는 영지인 골돈으로 향했다.
마적단의 습격으로 영주인 조안나를 잃은 골돈은 칠검경 중 하나인 유검경이 영주대리를 맡은 곳이었다.
유검경 아가사 검블턴.
그녀는 괴이한 능력을 가졌다는 마적단의 두목 델바나스를 무찌르고 몇 년 동안 마적단의 손아귀에 있었던 골돈을 되찾았다.
수탈을 당하던 영지민들을 진정시킨 유검경은 델바나스가 차지한 영주의 저택을 살펴보다 움직이지 않는 금속 인간과 녹색의 점액들, 거대한 금속 덩어리를 발견했다.
568이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는 귀족들을 믿지 않는 유검경이 지식이 풍부한 모험가를 고용해 이 기묘한 물건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금속 인간을 이것저것 만져보던 568은 이상한 버튼을 눌러 그를 깨웠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다 말한 금속 인간은 기묘한 물건들과 고대 시대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그 정보를 아가사와 568에게 털어놓았다.
고대용사의 후손인 게 밝혀진 568은 더는 숨길 수 없다 직감해 아가사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다.
‘누군가는 붉은고래 마탑을 막아야 해요.’
‘그대의 말이 맞다.’
정의로운 아가사는 요청을 수락한 후 신분을 만들어 주기 위해 그녀를 홍염룡 기사단의 일원으로 만들었고, 기사 작위를 내렸다.
디아나를 568의 종자로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델바나스가 남긴 자료를 전부 폐기하고 적당한 귀족에게 골돈의 영주 자리를 넘긴 아가사는 568, 디아나, 금속 인간과 함께 상록수 마을 쪽으로 내려갔고, 엄청난 규모의 몬스터 군대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던 비릭스 여왕을 죽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우정을 쌓은 아가사와 568은 절친한 친구 겸 스승과 제자가 됐다.
568이 가장 행복하게 삶을 보낸 시절이었다.
“...”
568이 다시 검집을 만졌다.
그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홍염룡 기사단과 마탑을 막을 계획을 짜던 중, 절검경 제임스와 왕족 암살자 벨더가드 사무초가 갱생대원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568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568의 모든 동기를 추적해 죽인 후 마지막으로 그녀를 찾아온 절검경과, 568의 가족을 무참히 죽인 벨더가드.
규격 외의 강자들인 두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그 피해는 너무나도 컸다.
‘...단장님, 죄송합니다.’
홍염룡 기사단원들은 수많은 갱생대원과 싸우다 동귀어진을 택했고.
‘네가 그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생각한다. 영혼을 거두는 검이다. 가져가라. 이제 나보다 너에게 더 필요한 물건이니.’
568, 디아나와 함께 절검경과 벨더가드를 쓰러뜨린 아가사는 과다 출혈로 숨을 거뒀다.
절검경이 발사한 마법 무기의 파괴력 때문이었다.
히히히힝…
아가사가 죽는 순간까지 곁에 있었던 정령마 붉은 섬광은 빛과 함께 사라졌고, 그녀의 애검 영혼 포식자는 568이 소지하게 됐다.
‘미안, 정말 미안해요. 내가 처음부터 변신할 수 있었다면…!’
[용족의 아이, 네 탓이 아니다.]
죽음의 공포와 무력한 본인에 의한 분노로 각성해 벨더가드의 목을 물어뜯은 디아나는 황금룡의 모습으로 울부짖었고, 불사신이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금속 인간은 그녀를 위로했다.
이후 일어난 일은 더 끔찍했다.
디아나, 기억을 찾은 금속 인간(고그마그족 수호자)과 함께 쓰러뜨린 패검경은 568의 배다른 언니였다.
그녀는 마탑에 의해 끔찍한 키메라로 개조된 뒤 세뇌당한 상태였다.
‘내 동생. 괴물들이 세상을 망치게 두지 마.’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차린 언니는 그렇게 말했고, 568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입고 있던 고대용사의 갑옷과 투구, 방패를 얻은 568은 마탑과 적대하는 조직 흰돌고래와 손을 잡은 뒤 그들의 비밀기지에서 그것들을 완벽하게 다루기 위해 수련에 매진했다.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면 마탑주를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녀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감시자들이 보인다. 저쪽이다.]
망원경으로 쭉 마탑 쪽을 지켜보던 고그마그족 수호자가 손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영혼 포식자의 검집을 만지작거리던 568이 망원경을 집어들었다.
기괴한 모습의 괴물들이 검은 잔상을 일으키며 붉은고래 마탑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전부 감시자였다.
후하하하하! 후하하하핫!
기괴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놈이에요.”
디아나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먹구름이 걷히면서 거대한 존재가 박쥐 같은 한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불길한 기운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거대한 검붉은 용이었다.
“...제이드 홀.”
종말의 앞잡이, 악몽의 날개, 타락자.
이제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그는 원래 검성회의 일원이자 가장 강하다 평가받는 칠검경이었다.
질서유지군을 이끄는 변검경이라 하면 왕국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마탑주 모니카 소버린!
거대한 몬스터가 된 제이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절벽까지 들려온다.
위대한 다섯 성령 중 하나와 융합한 그는 나머지 칠검경을 죽인 후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 세계를 구할 용사 제이리온 님께서 말하신다! 마탑주는 들어라!
야만적인 존재여! 귀 기울여라!
높여 받들라!
제이드와 같이 날아온 세 명의 칠검경이 마탑의 전투원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 모두 감시자에게 육체를 빼앗기고 조종당하는 상태였다.
왕국이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마탑주가 고래의 숨결을 발사해 감시자들을 공격했으나, 이미 그 수가 너무 많아진 뒤였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마탑주가 내버려둔 건 아니었다.
안 좋은 시기에 붉은고래 마탑에서 내전이 일어나 막을 수 없었다고 봐야 한다.
마탑의 이인자인 조셉 망글로브가 일으킨 내전이었다.
인공 감시자를 만드는 것에 성공한 조셉은 자기편에 선 직원들과 어린아이 모습을 한 괴물들을 이끌고 마탑주를 기습했다.
마탑주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 결국 패배했고 죽었지만, 인공 감시자들이 마탑주에게 아무 타격을 입히지 못한 건 아니었다.
흰돌고래 소속이자 마탑의 직원인 이중 스파이의 말에 따르면, 그날 이후 마탑주는 영체 상태로도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제이드는 그때를 틈타 왕국을 공격하고, 지금 이 자리에 선 것이다.
마탑의 전투원들을 모조리 죽인 감시자칠검경과 수천이 넘는 감시자가 공격을 퍼붓는데도 마탑은 끄덕하지 않았다.
마탑에 설치된 마법 결계가 너무나도 견고한 탓이리라.
눈먼 자여!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질서를! 제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제이드가 검붉은 화염을 토해냈다.
화르르륵!
결계가 사라지고, 마탑이 타올랐다.
후하하하하핫! 이 압도적인 힘! 이 전능감! 이겁니다!!!
힘에 취해 미쳐버린 제이드의 몸에서 수백 가지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수백이 넘는 감시자와 융합한 그는 이미 하나의 존재라고 부를 수 없을 수준이었다.
[열등한 돼지가 감히…!]
부서져 내리는 붉은고래 마탑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르르르!
마탑 옆의 대지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하얀 갑옷을 입고 붉은 낫을 든 은발적안의 거인.
마탑주인 모니카 소버린이었다.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지이이이이이잉!
낫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괴적인 광선이 마탑 앞의 감시자들을 일격에 쓸어버렸다.
마탑주!
날개를 움직여 광선을 피한 제이드가 마탑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쿵!
흑염룡이 된 제이드가 마탑주의 낫을 물었고, 마탑주는 남은 손으로 그의 발톱을 막아냈다.
그야말로 신들의 싸움이었다.
“...”
568은 한 번 더 자신의 장비를 점검했다.
신체를 강화시켜 주는, 그래서 평범한 기사 수준이었던 언니를 칠검경 급의 강자로 만들어준 고대용사의 갑옷과 투구.
엄청난 내구력을 지닌 고대용사의 방패.
영혼을 흡수하는 능력이 있는 마법 검인 영혼 포식자.
이건 감시자들이 마탑주 같은 다른 초월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고그마그족을 시켜 만든 물건이라 했다.
마탑주에게 유효타를 가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리라.
전부 다 수천 번은 사용해 봤고, 완전히 꿰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망원경을 들어 신화적인 전투를 확인했다.
멀리서 들려오던 파괴음이 서서히 끝나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되는!
서걱!
제이드의 머리가 마탑주의 낫에 의해 잘려나갔다.
흑염룡의 몸이 재가 되어 사라진다.
신들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마탑주였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빛이 흐려진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낫에 기댔다.
[강제로 물질계에 강림한 결과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로 보인다.]
고그마그족 수호자의 말에 568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디아나를 봤다.
“끄으읏…!”
머리를 쥐어뜯던 디아나가 한 쌍의 날개를 가진 황금룡으로 변했다.
전투를 벌이던 두 괴물에 비하면 작은 크기였지만, 웬만한 성인 장정보다 7배는 컸다.
그녀의 등에 탄 568이 영혼 포식자를 들어 올렸다.
“가자.”
디아나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라, 지쳤는지 주변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마탑주를 향해 돌진했다.
“언니, 아가사. 행운을 빌어 줘.”
바람에 568의 파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기, 김성훈…?]
마탑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아앙쇼오오이이이이!
영혼 포식자가 요동치는 소리와 함께, 세계의 운명을 건 마지막 싸움이 시작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