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82화 (82/119)

〈 82화 〉 ['탈주닌자 질풍전' 시작] 82화. 웰컴 투 용주골 (1)

* * *

주정뱅이마저 잠든 네오­네오­솔리트론의 어둑한 밤. 망토를 뒤집어쓴 두 남자가 길가에서 마차를 정리하던 한 노인 앞에 멈춰 섰다.

네오­네오­솔리트론.

3년 전 일어난 큰 전투 때문에 중심지가 큰 타격을 입어 ‘다시 또’ 재개발되고 있는 이 대도시의 이름이었다.

“두 명이다. 출발할 준비를 하도록.”

덩치 큰 남자가 갑옷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노인에게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그의 망토가 살짝 흘러내리면서 가려져 있던 갑옷의 어깨 부분에 새겨진 문양이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털과 크고 긴 두 귀를 가진 포유동물의 그림.

밤토끼 기사단의 상징이었다.

“큼.”

곁눈질로 문양을 본 노인이 헛기침을 했다.

밤토끼 기사단.

만화를 불법 공유해서 보는 기사들이 모인 집단은 아니고, 구심점인 변검경 제이드를 잃으면서 뿔뿔이 흩어진 질서유지군 소속 기사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이다.

“오늘은 일 더 안 받습니다.”

노인은 애써 그들을 무시하며 안장을 탈탈 털었다. 큰 덩치의 남자, 한스의 옆에 있던 자가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밤토끼 기사단원 중에서도 다혈질로 소문난 브루스였다.

“빈민이…말대꾸?!”

“값을 세 배로 치겠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브루스가 더 입을 열기 전에 한스가 나섰다.

“뭐, 그렇다면야.”

다시 안장을 말의 등 위로 올린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기사는 천천히 마차에 탑승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빈민촌으로 간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마차가 출발했다.

***

“도착했습니다.”

“수고했다.”

돈주머니를 넘긴 한스가 브루스와 함께 빈민가의 거리를 걸었다.

인적 없는 길모퉁이로 들어간 그들은 창문 하나 없는 건물 앞에 멈춰섰다.

빈민가에 널린 낡고 오래된 나무판자 주택이 아니라, 벽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집.

네오­네오­솔리트론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범죄조직의 아지트였으니, 당연히 평범한 건물이 아니었다.

밤토끼 기사단의 한스와 브루스는 이곳에 가장 자주 들리는 사람 중 하나였다.

치안 유지와 정의 집행을 위해서는 당연히 아니었고, 범죄조직이 보유 중인 ‘상품’을 위해서였다.

“좋군요.”

브루스가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고 씩 웃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질서유지군은 붙잡은 범죄자들을 직접 처형해 왔다.

무장하지 않은 상태의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끝까지 거부감을 느끼는 자들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정반대였다.

뒤틀린 정의감을 가지고 있던 변검경 제이드처럼 질서유지군 또한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단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살인이란 축구나 마찬가지였다. 식후에 처형식을 열기도 했고, 자기 전에 열기도 했다.

반반한 년놈들이 있으면 적당히 갖고 논 후 죽이기도 했다.

사람을 죽인 놈부터 빵 하나를 훔쳐서 잡힌 놈까지, 다양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해 왔다.

제이드가 죽기 전까지는, 그리고 붉은고래 마탑이 몰락하기 전까지는 쭉 그래 왔다.

잔인한 처형식은 물론 소규모 전쟁조차 용납하지 않게 된 현재의 이르갈 왕국은 한스와 브루스에게 있어서 아주 따분한 곳이었다.

그래. 시시해서 죽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다.

인신매매 조직과 몰래 관계를 맺은 밤토끼 기사단은 지금까지 이 아지트에서 빚더미에 앉아 끌려온 사람들을 죽여왔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안 쓸 사람들이었으니, 자신들의 살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쓰자 생각한 것이다.

고래의 숨결 때문에 전쟁을 주도할 수뇌부마저 사라진 평화로운 시대. 하지만 어떤 악당들은 그런 시대에 고개를 들기도 한다.

“잠깐.”

아지트의 문을 두드리려던 브루스를 한스가 멈춰 세웠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네?”

한스는 브루스의 반문을 무시하고 기감을 곤두세웠다.

밤토끼 기사단에서도 상위권의 강자에 속하는 한스는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말 그대로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해. 인위적이라 느낄 정도다.”

한스는 눈을 찌푸렸다.

“오늘 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약속 하나는 칼 같은 놈들인데…상품도 준비됐다 했고요.”

브루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상관의 눈치를 봤다.

수십 번이 넘게 이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졌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

한스는 생각에 잠겼다.

불만을 품은 범죄자 놈들이 바람을 맞혔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밤토끼 기사단과 이 범죄조직은 수평적인 협력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인 상하관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으름장을 놓고 일방적으로 착취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네오­네오 솔리트론에서 벌이는 작은 일들을 눈감아 주는 대신, 기사단원들의 살인욕구를 채워줄 ‘상품’을 받기로 거래했으니까.

‘이상한데.’

바람을 맞힌 게 아니라면 무엇일까.

범죄조직과 경비대가 짜고 자신들을 함정으로 몰아넣은 것인가? 그것도 사실 말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설마…’

여러가지 가능성을 고려하던 한스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동료를 도륙 내고 다녔다는 남자.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크게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다.

지방 영지를 구하고, 칠검경 중 하나와 싸워 이겼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보단 음유시인들의 소재거리나 도시 전설처럼 여겼다.

그가 변검경 제이드를 죽일 때에도 큰 화제는 되지 않았다.

붉은고래 마탑이 정보 통제를 하기도 했고, 모든 왕국의 수도에 발사된 고래의 숨결이 화제성을 전부 가져갔으니까.

그가 붉은고래 마탑주를 죽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그 전투를 본 사람이 적었고, 이르갈 왕국의 섭정이 된 릴리아 차스테인이 언급을 자제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정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 견습기사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루녹스 학생. 올라와 주세요.

10년 만에 나온 견습기사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이 했던 말이 도화선이었다.

온갖 단체의 주목을 받은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기사라고 말한 인물은 다름 아닌…

­ 탈주닌자, 입니다.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 어디 소속의 기사님이지?

­ 아아, 모르는 겁니까...이곳저곳 전부 되다 만 인간들뿐입니다.

­ …위인이니?

­ 한때...정의를 쫓았던 사람...입니다.

­ 아...그러니...

­ 이해하기 어렵겠죠...요즘 같은 시대에 '정의'라니…

­ …

의미 모를 소리만 늘어놓고 자리를 벗어난 만점짜리 학생은 홍염룡 기사단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그때부터 탈주닌자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골돈에서 마적단 무리를 해치운 것부터, 변검경 제이드를 죽이고, 칠검경 세 명을 동시에 쓰러트린 후, 붉은고래 마탑주를 죽인 것까지 알려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고래의 숨결이 일으킨 대파괴로 인해 백성들이 믿고 의지하던 군주들은 모습을 감춘 지 오래, 희망의 상징을 찾는 자들은 많았다.

무고한 백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악한들을 무찌른다는 초인.

개돼지 같은 백성들이 열광하기 딱 좋은 컨셉이 아닌가.

소문은 퍼지고 퍼져 미담이 됐고, 그 미담은 어린아이들한테까지 전해졌다.

남녀노소 좋아하는 국민 카드 게임인 간트에 탈주닌자가 등장한 것도 당연한 순서였다.

­ 변검경 제이드를 제물로 바쳐 탈주닌자를 특수 소환, 소환된 탈주닌자로 붉은고래 마탑주를 공격하겠다.

­ 와! 탈주닌자!

­ 와탈주닌자네가왜거기서나와!!!

많은 사람이 그를 사랑하게 됐고,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탈주닌자는 붉은고래 마탑에서 일어난 전투 이후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탈주닌자는 어딨지?

­ 오늘도 패트릭 영감한테 돈을 따먹혔어! 탈주닌자는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런 간트 중독자 놈은 안 잡아가고!

탈주닌자는 붉은고래 마탑주와 동귀어진을 했다, 흰돌고래 저항군에게 숙청을 당했다, 과업을 이루고 하늘로 승천했다 등의 찌라시가 떠돌았다.

­ 오늘은 뱅크스 출신의 저명한 철학자, 체사푸흐 님을 모셨습니다.

­ 반갑습니다. 체사푸흐 입니다.

­ 모두 탈주닌자의 실체에 관해 궁금해하는데요. 한 말씀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 저항군이 만들어 낸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전과 선동으로 제작된 가짜 영웅이죠.

­ 탈주닌자가 실제로 했던 일들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 변검경을 죽이고, 붉은고래 마탑주를 죽인 것 말입니까? 물론 그들을 죽인 자는 있을 겁니다. 한 명일 수도 있고, 여러 명일수도 있죠. 전 다수라고 생각하지만요. 어쨌든, 사람들이 봤다는 탈주닌자의 공통점은 검은 도복과 두건만 있지 않습니까. 그런 옷차림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 그렇군요.

­ 탈주닌자의 행적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아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르톨란에 있던 탈주닌자가 뜬금없이 골돈에서 목격되고, 또 몇 개월 뒤에 갑자기 아이오지 광산에서 목격됐다? 그러더니 변검경을 죽이고 조용히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붉은고래 마탑주를 죽였다? 행동에 일관성이 없잖아요. 개인이라고 볼 수 없어요.

­ 절검경은 탈주닌자의 이름까지 밝히면서 현상수배를 걸었는데요. 이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하도 전국 각지에서 날뛰어 대니까 특정 저항군 인사를 꼭 집어 수배를 건 거죠.

­ 그를 직접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이고, 그런 논리를 전개하면서 현실 세계에 적응을 못 하고, 자기의 관심거리에만 집착하면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들이 꾸며낸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싸워봤다는 사람조차 없지 않습니까? 각지에서 난리를 피운 사람인데 어떻게 검을 맞댄 사람조차 없겠어요?

­ 그들의 말에 의하면, 탈주닌자는 악당들을 살려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 그럴듯한 거짓말입니다. 몰살이 그렇게 쉬울 거 같습니까?

그러기를 2년, 슬슬 사람들의 뇌리에 드래곤이나 감시자, 고대용사 같은 상상 속의 존재로 각인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미개척지인 감시자의 협곡 근처에서 탈주닌자를 봤다는 모험가들이 속속들이 등장했고, 여론이 뒤집어졌다.

­ 진짜라니깐유! 지 눈으로 똑똑히 봤슈!

­ 황금 갑옷을 입은 여자도 같이 있었어요!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검성회의 칠검경 중 한명인 홍염룡 기사단장 아가사 검블턴이 한 고백이었다.

­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난 그와 겨뤄본 적이 있다. 한 끗 차이, 정말 한 끗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패배했지. 지금까지 비밀로 했던 이유는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붉은고래 마탑 전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동의한 내용이지.

­ 그럼 탈주닌자의 이름이 로빈이라는 것도 진짜입니까? 지금은 어디 살고 있죠?

­ 그건 비밀이다.

­ 네?

­ 네가 원하는 답은 해주지 않겠다.

하지만 그 탈주닌자가 이런 빈민가까지 들어와 자신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우스운 생각이 아닌가.

‘그럴 리가.’

“내가 열겠다.”

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브루스를 지나쳤다.

어떻게 됐든 간에 직접 본 후 보고를 하든 찾아보든 해야 했으니까.

끼이익­!

아지트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어딘가 묘한, 익숙한 비린내가 나는 것이…

한스가 미간을 좁혔다.

“랜턴.”

“여깄습니다.”

한스를 뒤를 따라 들어온 브루스가 랜턴을 키고 들어 올렸다.

“...!”

작은 불빛에 드러난 아지트의 모습은 한스의 생각 이상으로 참혹했다.

시체. 시체. 시체. 온통 피범벅이 된 시체뿐이었다.

“이런!”

인기척을 느낀 한스가 브루스의 랜턴을 빼앗고 천장을 향해 들어올렸다.

““닌닌.””

놀랍게도, 그곳에는 파란 도복을 입은 자들이 박쥐처럼 매달려 있었다.

“아…?”

멍청한 소리를 낸 한스의 미간에 수리검이 박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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