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83화. 웰컴 투 용주골 (2)
* * *
한스가 죽기 6개월 전
“변검경 제이드 홀! 네 죄를 네가 알렷다!”
검은 쫄쫄이를 입은 남자가 과장된 효과음과 함께 공중제비를 돌면서 나타났다.
그가 등장함과 동시에 번쩍하고 켜지는 푸른 조명.
“뭔.”
아무것도 모르는 관객들은 헤실헤실 쳐 웃고 있었지만, 정작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무척이나 낡고 개성 없는 대사를 우렁차게 내뱉는 게 내 손발이 불판 위의 오징어처럼 오그라들 정도.
“...탈주닌자. 난 내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야말로… ‘정의’.”
쫄쫄남을 정면에서 노려보던 꼬맹이가 허세 넘치는 자세로 검을 빼 들었다.
“그 오만 또한 내 ‘신념’ 앞에 쓰러질 것이다.”
“가능할까? 내 몸은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
꼬맹이가 검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실에 묶인 무기들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정말 좆같군.”
나는 춤추듯이 싸우는 무대 위의 두 병신을 보면서 혀를 찼다.
“연극이잖아. 일부러 과장해서 하는 거야.”
옆에 앉은 오르페가 뭐라 뭐라 변명을 시작했지만, 그런다고 내 분노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랜만에 휴식도 취하고, 디아나도 볼 겸, 새튼이 제작과 투자에 참여했다는 연극을 보러 나왔다.
새튼이 공짜 티켓을 줘서 보러 온 건 절대 아니다.
어쨌든, 연극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좋았다. 오랜만에 오르페랑 데이트도 할 겸 디아나가 ‘인간’으로 잘 성장하고 있는지도 볼 기회였으니까.
문제는 이 쌈마이한 연극이었다.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정의롭게 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삼류 작가가 쓴 게 분명한 쓸데없이 열혈 넘치고 오글거리는 내 대사가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최종보스를 맡아야 할 제이드까지 ‘또 다른 정의’라는 타이틀을 내세워 미화했다는 게 문제다.
제이드는 죽인 사람들의 머리를 수집해놓는 취미가 있는 사이코패스 변태 악당이다. 끝내 요괴와 손을 잡고 비탄의 쇼군으로 진화한, 완전히 돌아버린 정신병자 사무라이였다는 말이다.
“아무리 연극이라도 그렇지.”
그딴 놈이 내 앞에서 당당하게 ‘정의’ 이 지랄 떨고 있으니 배알이 꼴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배우잖아. 변검경이 아니라. 너무 몰입하지 마.”
오르페와 디아나가 불안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래도 제이드 역할이잖아.”
“로빈, 목소리가 너무 커.”
“...”
공공장소에서 소리 지르는 건 민폐니 일단은 참기로 했다. 정말 싫지만, 다시 연극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무대로 옮겼다.
어느새 케첩을 질질 흘리며 쓰러진 꼬맹이의 모습이 보인다.
망상 속에서 살았다.
갑자기 시작된 꼬맹이의 나레이션.
부럽다.
네 녀석이 부러워.
나도 되고 싶었는데.
나도 용사가 되고 싶었는데.
너였구나.
내가 되고 싶었던 용사는 바로 너였어.
너만 보면 내 질서가 박살이 나.
이거 어떤 웹툰에서 본 대사 같은데.
그리고.
지금도 박살이 나고 있다.
“하...”
그냥 귀와 눈을 막고 싶다.
“타, 탈주닌자! 그를 쓰러뜨린 것이오!?”
갑자기 무대에서 등장한 중년 남자가 내 역할을 맡은 쫄쫄남에게 말을 걸었다.
“내 절친한 친구, 새튼.”
고개를 끄덕이는 쫄쫄남.
“어휴.”
한숨만 나올 뿐이다.
새튼은 이 전투에서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는데. 그래. 이건 전형적인 역사 왜곡과 날조다. 새튼이 투자와 제작을 맡았다고 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과격파였지만, 많은 존경을 받고 있던 변검경은 사악한 붉은고래 마탑주를 억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소. 그가 죽었으니 사람들은 희망을 잃게 될 거고, 마탑주는 미쳐 날뛸 거요.”
“난 마탑주가 이기게 두지 않을 거다.”
“무슨 뜻이오?”
“사람들에게 알려라. 탈주닌자가 타락한 변검경을 죽였다고.”
“마, 말도 안 되는! 당신은 그림자 속에서 백성을 수호한다고 맹세하지 않았소? 모두에게 알려지게 되면 두건 뒤에 가려진 진짜 정체가 밝혀지는 건 순식간일 거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상징이 필요해.”
“...질서유지군, 붉은고래 마탑뿐만 아니라, 이르갈 왕국의 병사들까지 상대해야 할 거요.”
“많은 사람이 날 비난하고, 쫓겠지. 하지만 난 감당할 수 있다. 난 탈주닌자니까.”
그 말을 끝으로 쫄쫄남은 공중제비를 돌면서 사라졌다.
“...”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본 구조인데.
“탈주닌자! 탈주닌자!”
새튼 역을 맡은 중년 남자의 뒤에서 한 여자가 튀어나왔다.
흰돌고래 문양이 새겨진 천갑옷을 입은, 이 연극의 히로인이다.
“새튼 씨! 탈주닌자가 왜 도망가는 거죠?”
뭔가, 뭔가 익숙한 이 느낌.
“...탈주닌자는 모두가 필요로 하는 영웅이지만, 지금은”
아니…!
이거 배트닌자 표절이잖아! 배트닌자가 하비단또를 죽이고 도망치는 장면과 너무 똑같다.
“씨발 진짜!”
더 참을 수 없어서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새튼. 역시 처음 본 순간에 죽였어야 했다.
***
“화는 좀 풀렸어?”
오르페가 음료수를 내밀면서 내 표정을 살폈다.
꿀꺽꿀꺽.
별로 안 풀려서 그냥 음료수나 들이켰다.
“연극을 보는 건 처음이라 좀 걱정했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나중에 또 보러 와요!”
재밌게 봤는지 흥분해서 날뛰는 디아나.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원래 저 나이 때는 뭘 봐도 재밌다.
“제이드 그 새끼만 아니었으면…”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린다.
“전 괜찮았어요. 미샤 선생님께서 그러셨거든요. ‘비뚤어진 사람일수록 정의나 올바름에 집착한다’고.”
디아나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정말로!”
“뭔 소리야.”
아직 어린애라 그런지 뜬금없는 말을 할 때가 많다. 이래서 어린애가 싫은데. 괜히 내가 지구에서 노키즈존 카페의 VIP 고객이었던 게 아니다.
“어쨌든, 재미도 없었고, 대사도 너무 유치했어.”
악당 미화에, 역사 왜곡에, 대사 날조에, 표절까지. 저 연극이 저지른 위법 행위가 한둘이 아니다.
새튼 생각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날 수밖에. 요괴박이였던 뿌리가 어디 가지 않는다.
“그런 걸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생뚱맞은 말을 하는 오르페. 얘도 디아나에 물들어 버린 것인가?
“아니, 내가 왜.”
“싸울 때마다 꼭 비슷한 말 한마디씩은 하잖아.”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내가 한 말은 멋있는 말이고, 연극 작가가 쓴 대사는 병신같은데, 비교할 걸 해야지 진짜.
“멋지게 보이려고 가끔 말투도 바꾸고, 연습장에도 명대사 모음집 같은 거 적어놓...”
“그만.”
명대사와 중2병을 구분하지 못하는 유인원과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힛.”
힛?
“장난이야 장난. 나도 당연히 알지.”
“...”
요즘 따라 얘가 이런 장난을 치는 일이 많다. 재미가 들린 건지, 이제 연인 관계라 생각해서 스스럼없이 이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 괘씸하다.
그렇지만 좀 화난다고 해서 여자친구를 묶어놓고 때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디아나!”
곰같이 생긴 크고 뚱뚱한 여자가 두 손을 흔들면서 우리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디아나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한 미샤 선생이다.
재빵사면 그냥 조용히 빵이나 만들 것이지, 왜 애들에게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아, 선생님 오셨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봐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방방 뛰면서 미샤에게 달려가는 디아나. 베이비 드래곤 요괴와 베이비시터 웅녀는 그렇게 떠나갔다.
“우리도 슬슬 가자.”
오르페가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았다.
“...”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다.
“장난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응?”
쪽.
내 볼과 그녀의 작은 입술이 부딪혔다.
1년 전만 해도 부끄러워서 그런지 어색하게 행동하던 오르페였지만, 이제는 적응됐는지 자연스럽다.
“내가 착해서 그냥 넘어간다.”
계속 화를 내기는 그러니, 이번은 봐주기로 했다.
손 잡기와 가벼운 뽀뽀. 현재 우리 커플이 데이트를 하면서 뺀 진도라고 할 수 있다. 너무 느리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솔한 대화로 사실을 알아낸 결과에 따르면, 오르페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12살때 야쿠자에게 습격을 당해 도망치다 친척 집에 도착해 3년을 보냈고, 사갈의 꼬리 놈들에게 납치를 당해 폐광산에서 1년을 보냈고, 나랑 같이 1년을 싸웠다고 한다.
그리고 날 2년 동안 기다렸고, 감시자의 협곡에 숨어 음모를 꾸미던 누벨피어를 잡고 1년이 지났으니…대충 계산해보면 미성년자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귀찮고 머리 아파서 따로 계산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12살은 미성년자니 맞을 것이다.
이세계에 떨어졌다고는 하나 난 야사요가 엮이지 않는 한 사회법규와 유교논리를 충실히 따르는 준법시민, 아직 꼬꼬마인 오르페를 건들 수는 없었다.
뭐, 대충 1년만 더 기다리면 성인이 되지 않을까?
“피곤해. 가자.”
오르페와 같이 마차를 탔다. 그녀는 우리의 집이 있는 산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아직도 내가 화가 난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잠깐.”
아무 생각 없이 산을 오르고 있을 때였다. 집 앞까지 좀 되는 거리였는데, 근처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늘 누가 오기로 했어?”
“아니? 아주머니는 오늘 안 오시기로 했어.”
청소부 아주머니. 우리 집에 유일하게 들락날락 거리는 사람이다. 내 친구라면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것보다 편지 한 통이라도 보낸 다음 올 텐데.
누구일까?
“집 앞에 누가 있어.”
예감이 좋지 않다.
“...알겠어.”
오르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뜬그림자를 사용하고 천천히 움직였다.
마침내 도착한 집.
“...”
우락부락하게 생긴 흑인 남자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검은 쫄쫄이와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었는데, 아까 연극에서 본 탈주닌자 복장과 똑같았다.
뭘 암시하는 거지?
그거야 그렇다 치고, 동료도 없었고, 무장도 빈약했다. 내가 질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제육천마왕 모니카 때문에 지금까지 얻은 감시자들의 능력을 전부 잃은 상태였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아직 난 슈퍼초인이었다.
모니카를 완벽히 흡수하고 얻은 영혼 분쇄능력(마지막 위대한 성령인 누벨피어도 이걸로 보내버렸다)도 있었고, 내 필살기인 ‘궤도 폭격의 술’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사용할 수 있다.
붉은고래 마탑 전투 때만큼 엄청난 힘은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칠검경급의 강자는 물론이고, 비탄의 쇼군 제이드가 부활해 다시 덤빈다고 해도 해볼 만은 했다.
“너, 뭐하는 새끼야.”
뜬그림자를 해제하고 흑인에게 다가갔다.
40대 중반은 될까, 야인족처럼 피부가 햇볕에 그을린 게 아니라, 내추럴 본 흑인이다.
그야말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피부색.
“음.”
“왜 남의 집에서 알짱거려?”
흑인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나와 그것을 번갈아 봤다.
“아…아!...”
나와 종이를 비교하던 근육 덩어리의 거한이 갑자기 활짝 웃었다.
“탈주닌자! 로빈님이 맞군요!”
“뭐? 네가 어떻게…”
“바, 반갑습니다! 제, 제 이름은 막시무스! 천둥말 용병단에서 20년 동안 있었습니다! 아, ‘금빛 갈기’ 제스와 친분이 깊은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제가 그 녀석 선배거든요!”
“말 씹지 마라. 제스는 또 누군데.”
과묵하게 생긴 중년 간지 흑인이 한순간에 래퍼가 되어 버렸다.
뭐지?
“그, 그리고! 저도 붉은고래 마탑 전투에서 있었습니다! 괴물 같은 붉은고래 마탑주와 일대일 대결을 벌이던 그 모습은…정말로!!!”
“시끄럽고, 왜 왔어?”
이러다간 끝이 나지 않을 거 같아서 흑인의 말을 끊었다.
숨을 크게 들이킨 흑인, 막시무스가 소리를 지르듯이 말했다.
“저도 탈주닌자가 되고 싶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