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88화. 웰컴 투 용주골 (7)
* * *
“야, 자냐?”
깡!
바위인 척 위장하고 있는 트리보의 머리통을 가볍게 때렸다.
대답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상태랑 똑같다.
“어떻게 된 거야? 너 그거 가지고 있지 않아? 그, 목걸이.”
오르페는 트리보랑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 내가 사용하던 통신기였지만 제이드를 죽이고 위천마 히틀러를 잡으러 간 후로는 오르페가 쭉 사용했었지.
“집에 있어.”
“연락이라도 한 번 해보지 그랬어?”
“...누벨피어를 잡고 나서야. 트리보가 과업은 끝났으니, 더는 연락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어. 치료제도 만들고, 동족도 구했으니, 모든 걸 다 이뤘다고.”
오르페의 손이 트리보의 기계 몸통을 쓸어내렸다.
“생각날 때마다 안부 인사를 보내도 받지 않던데…이렇게 될지는 몰랐어.”
이렇게 된다니. 깊고 음침한 공간에 들어가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건가.
“그렇군.”
평소라면 이 새끼가 어디서 쳐 자든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깡통고철로봇을 무시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한 명의 동료로서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 놈도 마지막 결전에서 1인분 이상을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여기는 내 닌자마을이다.
내 멋진 용주골에서 낡고 냄새나며 보기 흉한 깡통이 있으면 안 된다.
“트리보, 일어나.”
드드득! 끼긱!
트리보를 뽑았다.
“잠은 너희 집에서 쳐 자야지. 왜 내 용주골에서 자는 거니.”
붕붕붕붕!
놈을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일어나! 어서!!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내가 직접 폐기해 버리거나, 쓰레기통 근처에 버려야 한다.
예전 동료를 그렇게 다루는 건 좀 그러니, 다소 과격한 방법을 써서라도 깨울 수밖에 없다.
“로, 로빈! 잠깐!”
오르페가 호들갑을 떨면서 날 말렸다.
“방법이 있을 거야. 디아나처럼 트리보를 깨워 보자.”
“어떻게? 바닥에 누르는 버튼도 없는데.”
“...외장형 임시 동력원. 트리보는 그렇게 말했어.”
“그게 무슨 뜻이야.”
“외장형이 있다면 내장형도 있을 거야. 기껏해야 1년 반 정도밖에 안 지났으니 동력원이 떨어질 일은 없고…”
갑자기 공돌이로 변한 오르페가 트리보의 몸을 살폈다.
“나 없는 동안 로봇조종학과라도 들어간 거야?”
가끔씩은 얘가 지구에서 왔는지 내가 지구에서 왔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책을 많이 읽으면 다 이렇게 변하는 건가? 역시 책과 사용설명서는 멀리할수록 좋다.
“어딘가에 동력원을 켜는 버튼이 있을 거야. 한…이쯤?”
띠리링
그녀가 버튼 하나를 누르자마자 이상한 효과음과 함께 트리보의 눈에 불빛이 들어왔다.
[여기는…아…오르페?]
이제야 입을 여는 트리보.
“나도 있단다.”
[로빈. 오랜만이다.]
“인사는 됐고. 왜 내 닌자마을에 있던 거지?”
[닌자마을?]
“어쨌든.”
[…난 고그마그족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다 했다. 같이 싸웠던 이계 종족들을 구할 수 있는 치료제를 만들었고, 지하 깊숙한 곳에 잠자고 있던 동족을 깨웠다.]
“그렇군.”
[그들 모두가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은 이곳에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더군. 고그마그족의 기술력이 분쟁을 낳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닌닌.”
틀린 말은 아니다.
깡통로봇들의 기술을 손에 넣은 어떤 미치광이 과학자가 ‘고래의 숨결 MK2’를 만들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물론 그딴 게 만들어지기 전에 내가 죽여버릴 거지만.
[그래서 내 동족들은 이 행성을 벗어날 우주선을 만들기로 했다. 넓은 우주라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은 거다.]
“새튼같은 놈들이라도 살아가는 게 세상이야. 불필요한 존재는 없어.”
부처는 자비로워서 야사요가 아니라면 잉여인간도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백수면 어떻고, 유인원이면 어떠한가. 세상에 민폐만 끼치지 않으면 되는 거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 99퍼센트 이상은 다 유인원이다.
1퍼센트 살짝 안 되는 나 같은 슈퍼 초천재가 세상을 잘 돌아가게 하니, 문제는 없다.
[우리 고그마족은 인간이 아니라, 모성에 있는 신성한 인공지능이 창조한 기계종족이다. 우리에게 필요란 존재하는 이유나 다름없다.]
“그럼 너도 니네 동족 따라가서 우주선 만드는 거나 도와주지 그랬냐.”
[내 인공 뇌는 너무나 많이 손상됐다. 그들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될 수 없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이 행성을 위해서도 맞는 판단이다.]
“트리보…”
오르페가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이해는 간다.
내가 위천마 히틀러와 싸우고 있을 동안 오르페는 트리보와 함께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었을 거다.
내가 없는 사이를 노리고 공격을 가한 붉은고래 마탑의 공세를 저항군과 함께 막아내면서 지금처럼 강해진 거겠지.
등을 맡기고 싸울 수 있는 전우였을 수도 있고, 스마트폰의 음성 인식 비서 같은 존재였을 수도 있다.
로봇(스카이넷 제외)은 뽀삐와 몽이처럼 인간의 따까리, 아니, 친구가 아닌가.
[디아나는 잘 지내나?]
“너무 잘 지내서 탈이야. 하도 놀고먹고 피둥피둥 뒹굴어서 살만 뒤룩뒤룩 쪘어.”
떡볶이를 먹고 돼지가 되어버린 어느 사이트의 마스코트처럼 변하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그 정도면 평균이야. 예전 디아나가 너무 마른 거였어.”
누가 디아나맘 아니랄까 봐 바로 딴죽을 거는 오르페. 그렇지만 요괴에게 인간 어린아이 평균은 의미 없다.
[다행이군. …다시 잠들고 싶다. 부탁한다.]
“...”
오르페가 조용히 눈을 아래로 떨군다. 친구를 보내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거겠지.
이럴때는 내가 나서줘야 한다. 탈주닌자도를 뽑았다.
“트리보. 너는 쓸모 있는 로봇이었어. 내가 없는 동안 오르페와 함께 세계를 지켜줘서 고마워. 네가 편히 잠들 수 있게 최선을 다 할게.”
[그그럴 필요는 없다. 그냥 이 버튼만 다시 눌러주면 된다.]
“잘 가렴. 지금까지 즐거웠단다.”
[그그건 내가 만들어준 검 아닌가.]
살짝 쫄리는지 버벅거리는 녀석. 갑자기 감정표현이 풍부해진 것 같다.
“맞아. 상품에는 만족하고 있어.”
문득 궁금해진다. 깡통로봇도 전기닌자의 꿈을 꾸는가?
뭐, 이제는 못 꾸게 될 테지.
“사요나라.”
탈주닌자도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바라는 건 원샷원킬.
“...”
잠깐, 더 좋은 생각이 났다.
[생각을 바꾼 건가? 좋다. 그냥 이 버튼만 눌러주면 된다. 굳이 그런 걸 나에게 내려칠 필요는]
“너, 무기는 더 만들 수 있는 거냐?”
[지금 네가 들고 있는 무기처럼 좋은 건 다시 만들기 힘들다.]
“그럼 닌자도 급은 되는 무기는 만들 수 있다는 거네?”
[시간과 예산, 재료가 충분하다면 가능하다.]
“변명은 죄악이란 거 몰라?”
이놈도 은근 핑곗거리가 많단 말이지.
“어쨌든, 가능하다는 거지?”
[그렇다. 근데 왜…]
“좋아. 결정했다.”
탈주닌자도를 다시 검집에 넣었다.
“로빈?”
오르페가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눈을 크게 떴다.
“트리보, 너에게 역할을 부여해 주겠다.”
[무슨.]
“넌 이제부터 우리 용주골의 대장장이다.”
트리보에게는 살아갈 이유를, 오르페한테는 음성 인식 비서를, 디아나에게는 괴물 친구를, 우리 용주골에는 대장장이를.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고 지나가던 멧돼지까지 구워먹는, 그야말로 일석n조(一?n?)다.
[그냥 다시 잠들게 해주면 안 되겠나? 아니, 잠들고 싶다. 부탁한다.]
“지랄 말고.”
이렇게 용주골에 대장장이가 합류했다.
***
“탈주닌자님! 대청소가 끝났습니다!”
후보생들이 하나둘씩 내 앞으로 모인다.
거미 요괴는 전멸했고, 하이디를 비롯한 청소부 후보생들이 일을 잘했는지 주변도 나름 깔끔했다.
트리보를 보고 당황한 녀석들에게 깡통로봇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준 후 점수 먹이기에 들어갔다.
“루녹스, 1등이군. 훌륭하다.”
시뻘건 고추장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도도녀에게 따봉을 보내줬다.
100마리쯤 되는 거미 요괴를 혼자서 20마리 이상 잡아 죽였다고 한다.
압도적인 킬 수치, 그녀의 전투력은 탈주닌자 등급표의 4점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들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는 까까시를 까까(snack)로 만들 정도로 강해지겠지.
“당연한 결과입니다, 마스터.”
루아녹스, 아니, 루녹스가 고개를 숙인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웬 마스터? 난 그렇게 부르라고 한 기억이 없는데?
사실 칭호가 중요한 건 아니다. 어차피 나야 용주골 닌자들을 육성한 뒤 빠질 인물이다.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다 알겠지만, 탈주닌자는 닌자마을에 속하지 않는다.
닌자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는 게 탈주닌자다.
흰돌고래와 같이 싸운 건 임시협력일 뿐이었다.
“막시무스, 네가 2등이다. 잘했다.”
“더 잘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혼자서 거미 10마리를 잡은 막시무스가 분한 듯 이를 갈았다.
나약함에 대한 분노는 좋은 영양분이니, 좋은 반응이다.
괜히 쓸데없는 힘(촉수, 타락, 어둠 등 기타 좆같은 것들)에 손을 뻗지 않으면 된다.
“빅빵댕이, 3등 축하한다.”
“빅..빵댕이요?”
마법봉을 들고 있는 이름 모를 여자가 3등을 차지했다.
자기소개를 들었기는 한데 너무나도 평범한 이름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축하한다.”
“네…”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별명을 지어준 거니, 절대 성희롱 발언이 아니다.
“후크, 잘했다.”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별거 없었다. 예상대로 후보생 전부 안정적으로 통과했다.
아, 이 새끼들도 통과했다는 게 좀 그런데.
“오큘리우스~ 우리가 해냈어용~!”
“웩.”
오큘리우스의 뒷발에 난 가시로 신경독을 주입해 잡았나다 뭐라나.
따지고 보면 오큘리우스가 잡은 거지만, 어쨌든 듀오가 해냈으니 합격시켜줬다.
“하이디, 잘 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뼈다귀 처리를 완벽하게 해낸 하이디와 기타 후보생들을 부르고 합격통보를 끝냈다.
“용주골 1기 닌자가 된 걸 축하한다.”
이제부터 닌자마을이 시작된다.
“이제 너희는 전부 용주골의 닌자다. 사명을 잊지 말고,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
“”닌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