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89화. 웰컴 투 용주골 (8)
* * *
[오큘이군. 지구의 오리너구리와 유사점이 많은 생명체...]
트리보가 오큘을 보더니 이상한 말을 지껄인다.
“뭔 헛소리야. 지구에 이런 게 어딨어.”
바위 틈에서 겨울잠을 자다가 정신이 나갔나?
닌자마을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돌던 나조차 이런 생물을 본 기억이 없는데, 외계에서 온 깡통로봇 따위가 지구의 생명체를 논하다니.
[고대용사, 김성훈이 직접 말해준 거다.]
“지구에 오리너구리라는 동물은 없어. 그 새끼가 이상한 그런 거야.”
원래 정신병이 있는 놈들은 헛것을 보거나 기괴한 망상을 많이 한다.
[...그렇다고 하자. 로빈, 저 아이는.]
트리보의 시선은 하이디에게 가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한테 영혼을 볼 수 있다는 설정이 있었지.
“나도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말고 대장간이나 만들어.”
대충 트리보를 치우고 닌자가 된 이들을 둘러봤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마스터.”
루녹스가 선생님께 질문하려고 하는 학생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
“허가한다.”
“닌닌이 무슨 뜻입니까?”
이제야 설명할 때가 왔군. 이제 녀석들도 후보생이 아닌 정식 닌자니까 들을 권리가 있다.
이건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 닌자가 된 사람은 탈주닌자가 되지 않는 한 절대 ‘탈주’를 할 수 없다.
사명에서 도망치는 닌자에게는 ‘죽음’뿐이다.
그말은 곧, 그냥 단순히 재미로 용주골에 들어왔거나, 찍먹만 하기 위해 온 거라면.
완벽한 닌자마을의 보안 유지와 세계 평화를 위해 내가 직접 죽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닌자마을에 들어 오는 건 자유지만, 나갈 때는 죽음뿐.
빵긋.
미치광이 코미디언을 보고 한 번 웃어줬다.
“...?”
쪼커…난 항상 너를 눈여겨보고 있단다. 언제나 그 사실을 기억하렴.
“모든 닌자의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이디, 넌 식사가 끝난 후 뭐라고 하지?”
“...잘 먹었습니다?”
“그래. 어떻게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말이지. 그냥 의무적으로 하거나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니까.”
“아니에용. 음식을 대접해준 사람에게 맛있게 먹었다는 표현을 하기 위해…”
“조용!”
쪼커 이 새끼가 어디서 건방지게 말대꾸를.
“우리가 사용할 ‘닌닌’은 그럴 때 쓰는 말이다. 상대의 물음에 간단하게 대답할 때나, 상대의 발언을 긍정할 때 사용한다. 그 외에도 쓰임새는 많지만, 전부 다 설명하기에는 길으니 알아서 찾아보도록.”
말하기 귀찮을 때도 하는 말이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건 폼이 안 나니 비밀로 했다.
“그리고 너희는 적에게 기습 공격을 가하거나 결정적인 일격을 먹일 때 ‘와자뵷!’이라고 외쳐야 한다.”
“닌닌.”
배움이 빠른 루녹스는 바로 사용했고, 막시무스는 종이를 꺼내 내 말을 적었다.
“...‘와자뵷!’이요? 알겠습니다.”
그보다 살짝 느린 후크는 말의 의미를 곱씹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지 않나용? 은밀해야 할 기습 공격인데 왜 크게 소리를 지르는 거죵? 결정적인 일격을 먹일 때도 그래용. 오히려 숨겨둔 패를 감추듯이 조용히…”
“그만. 하수의 트집은 더는 못 들어주겠군요.”
이번에 쪼커의 말을 막은 건 루녹스였다.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그런 겁니다. 침착하고 노련한 전사라도 상대의 돌발적인 행동에는 대처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비슷한 실력을 가진 적과의 싸움에서 이는 비장의 한 수가 될 수 있죠. 마스터의 가르침에 의문을 표하지 마세요.”
“맞는 말이다. 전장에서 오래 구른 놈들은 대개 상대방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솜씨가 아주 탁월하기 마련이야. 작은 근육의 움직임까지 보는 자들도 있어. 소리를 질러 그런 놈들의 시선을 한순간이라도 입 쪽으로 잡아끈다면, 승률이 좀 더 올라갈 수도 있겠지. 기발한 방법입니다, 탈주닌자님.”
빠르게 루녹스의 말을 받는 막시무스.
“그렇다.”
그냥 기합이라고 설명하려 했는데, 얘네들 말이 좀 더 있어 보여서 빠르게 수긍했다.
“힛.”
갑자기 입을 가리고 작은 웃음을 터뜨리는 오르페. 조증에 걸린 건 아닌지 살짝 의심된다.
“오늘의 가르침은 여기까지다. 아직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다.”
천막도 세워야 하고, 음식재료를 조달해 와야 하고, 화장실도 만들어야 하고, 뭐, 아무튼 할 게 존나게 많다.
전투훈련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여, 여기서 자는 건가용?! 진짜로? 건강에 좋지 않을”
“아가씨. 거슬리게 하지 말고 좀 조용히 있자, 응? 여기 아가씨만 있는 게 아니잖아.”
얼굴을 살인적으로 찡그린 후크가 호들갑을 떨어대는 쪼커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냥 ‘닌닌’이라고만 하라고. 알았어?”
금방이라도 배꼽에 칼을 꽂아 넣을 것 같은 표정이다.
“넹…”
후크와 다른 닌자들의 눈초리에 쫄아버린 쪼커는 합죽이가 됐다.
눈이 다섯 개 달린 사람들의 마을에서 하나뿐인 요괴는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다.
[꼭 여기서 잘 필요는 없다.]
돌하르방처럼 조용히 서 있던 트리보가 입을 열었다.
“뭐? 바깥에서 잘 순 없어.”
용주골은 인적이 드문 곳에 있지만, 동굴 바깥에서 생활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동굴 안에서 전투 훈련과 의식주를 해결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어두컴컴한 곳에 계속 있는 것도 좀 그렇긴 하니, 가끔 햇빛을 보게 해주는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직 동굴 끝은 가보지 않은 모양이군. 따라와라.]
깡통로봇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와우.”
짧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트리보가 안내한 용주골의 끝은 암석으로 꽉 막힌 종착지가 아니었다.
성인남성 두 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그곳에 뚫려 있었다.
햇빛이 구멍 사이로 들어오는 게 아무래도 차원문은 아닌 거 같다.
“내 뒤를 따라와라.”
딱히 느껴지는 기척은 없어서 호다닥 달려나갔다.
10걸음쯤 걸었을까. 눈앞의 풍경이 확 변했다.
“닌닌.”
동굴 끝에 있던 건, 뉴질랜드 뺨치게 아름다운 자연환경이었다.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하나의 생태계.
“뭐야…엄청나게 넓잖아?”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어, 저거 토끼 아냐?”
“저기 호수도 있는 거 같은데?”
닌자들이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며 작게 떠든다.
[광부들이 뚫어놓은 구멍이다. 비상 탈출구로 쓰기 위해 그런 거 같더군.]
“닌닌.”
예전에 아이오지 광산에서 싸웠을 때, 동굴이 한 30% 정도 무너질 때였나.
탈출구 어쩌고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은 거 같기도 하다.
“광산 입구가 무너져 있었잖아. 아라크네도 이쪽으로 유입된 거 같은데.”
그럴듯한 추측이다.
이렇듯 탈주닌자의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기타 잡일과 함께 머리도 대신 써 줘야 한다.
언제나 바쁜 탈주닌자이기에 고기능성의 따까리, 가 아니라, 여자친구가 필요한 거다.
“이제부터 이곳이 용주골이고, 동굴은 훈련장이다.”
진짜 마을처럼 사용할 수도 있겠다 싶어 일단 허가를 해 줬다.
사갈의 꼬리 때처럼 햇빛도 잘 못 보고 애벌레만 먹어 대면 용주골 닌자들도 대머리 교관처럼 탈모에 걸리거나 까까시처럼 신체 일부분이 발육부진에 걸릴 수 있다.
난 돌연변이 기형 닌자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다.
“동굴에서는 전투 훈련을, 용주골에서는 여유시간을 보내는 걸로 하겠다.”
““닌닌!””
“웩.”
일단 내 천막부터 설치해 놓으라고 명령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요.”
“맡겨주십쇼. 이놈이랑 제가 이런 걸 좀 잘합니다.”
제법 손기술이 있는 닌자 몇 명이 보따리에서 이것저것을 꺼내더니 뚝딱뚝딱 만들어 냈다.
“좋군.”
특별전형으로 합격한 4명을 제외한 모든 닌자가 마나 사용자다. 그렇다고 그들 전부가 전투 인원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닌자들처럼 대장장이 기술을 가진 애들도 있었고, 무언가를 채집하거나 수집하는데 능한 자들도 있었다.
하이디 혼자서 동굴을 치운 건 아니다. 다양한 기술을 가진 자들이 바닥을 쓸고 닦고 바닥에 떨어진 돌덩이를 치우고 해서 대청소가 가능했던 거지.
닌자’전투 조직’이 아닌, 닌자’마을’인 만큼, 다양한 직종이 분포할수록 좋다.
부족한 직종은 나중에 바깥에서 ‘모집’해 오면 된다. 죄질이 좀 가벼운 양아치가 있다면 그놈을 납치해서 평생 일꾼으로 써먹는 것도 좋겠지.
가축과 함께 동굴에서 묶어놓고 기르면 딱 좋을 거 같다.
“3일 동안은 용주골 적응 겸 가꾸기에 들어간다.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실시!”
마지막 명령을 끝낸 후 오르페와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접이식 침대가 하나 보이길래 잽싸게 누웠다.
“알아서 잘하라고 하면…못할 거 같은데. 내가 몇 가지만 지시해도 될까?”
“그래도 되고.”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오르페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좌우 균형이 깨져서 그런지 침대가 살짝 삐걱거린다.
“두 명도 누울 수 있어.”
바닥에서 재우기는 좀 미안해서 몸을 좀 비켜주기로 했다. 집에서도 한 침대를 쓰던 사이니 껄끄러운 건 없었다.
물론 딱 붙어서 자지는 않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잠만 잤다.
가끔씩은 오르페가 춥다면서 달라붙을 때도 있었다. 난 몸이 뜨거운 체질이라 밝힌 뒤 알아서 잘 밀어냈었지.
태음인(太?人) 체질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추운 건 몰라도 더운 건 참기 힘들다.
그렇게 밀어낸 이후의 오르페는 추워서 입이 돌아갔는지 묘하게 침울해지거나 조용해졌던 것 같기도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줬는데 왜 입이 돌아간 걸까?
“닌닌.”
당연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건 전부 장난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탈주닌자인 내가 미성년자인 오르페를 건들 수는 없지 않은가.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그럴까?...”
조심스럽게 침대 옆에 누운 오르페. 움직임이 부뚜막에 올라가려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럽다.
“난 명상 좀 하고 있을게.”
눈을 감고 손을 하나로 모았다. 잡념이 사라지고, 몸이 나른해지는 게 벌써 부처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루녹스한테는 헬리콥터 검법을 전수해 줄까? 잘 사용할 거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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