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90화 (90/119)

〈 90화 〉 90화. Who watches the Watchmen? (1)

* * *

4개월이 지났다.

트리보와 여러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용주골은 마을 모습을 갖추게 됐다.

난 그동안 용주골 닌자들에게 닌자의 마음가짐을 알려 주고, 뜬그림자를 가르쳐 주고, 전투훈련을 시켜 줬다.

“새끼, 좀 치네.”

“너야말로.”

“존나 힘드네 진짜.”

용주골 닌자들은 그동안 꽤 친해졌다.

“사, 삭신이 쑤셔용…”

“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으으…”

마나 사용자가 아니었던 쪼커랑 후크, 하이디도 사랑을 듬뿍 담은 ‘맴매훈련’으로 마나 사용자로 만들었다.

사실 내 맴매훈련보다는 빅빵댕이의 과외 ­마법봉으로 이것저것 건드렸다­ 가 더 효과 있던 거 같긴 한데, 어쨌든 그렇다. 셋 다 뜬그림자를 배우고 있었지만 다른 닌자들보다는 성취가 느렸다.

똑똑한 오르페도 익히는데 시간이 걸린 뜬그림자라 그런지 완벽히 익힌 닌자는 없었지만, 루녹스는 그나마 7할 정도는 이해한 것 같았다.

“­헬리콥터 검법.”

쉭쉭쉭쉭!

루녹스가 개조된 연검을 무자비하게 휘두른다. 그녀가 입은 파란색 도복의 소매가 격렬하게 흔들림과 동시에 그 앞의 과녁이 박살났다.

아, 모든 닌자의 도복은 파란색으로 통일했다. 검은 도복은 탈주닌자인 나만의 것이다.

용주골 최강의 슈퍼닌자가 된다면 하얀색 도복을, 용주골을 통솔하는 마스터닌자가 된다면 빨간색 허리띠를 줄 수는 있다.

흑백적청은 닌자의 등급표다.

“후.”

앞머리의 땀을 닦아낸 루녹스가 과녁을 살폈다. 정확히 가운데 구멍만 송송 뚫린 과녁.

“...느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짓는 모습은 꽤 분해 보였다.

내가 보여줬던 검법과 자신의 검법을 비교하고, 아직은 부족하다는 걸 실감하는 것 같았다. 내 가르침을 나름의 방법으로 소화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효과를 볼 거로 생각한다.

“마스터, 제가 따라갈 수 있을까요? 당신이 있는 세상의 속도를...”

아아, 물론이지.

라고 해 주고 싶지만, 난 지금 말을 할 수 없다.

‘닌닌.’

뜬그림자 상태로 루녹스의 훈련을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변태라서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없는 동안에도 닌자들이 열심히 개인훈련을 진행하고 있는지, 혹시나 딴생각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일종의 불심검문, 아니, 깜짝 순찰인 셈이다.

내 뜬그림자는 오르페조차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완벽하니, 이보다 더 좋은 엿보기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루녹스 확인이 끝났으니, 이제 다른 놈들을 보러 갈 차례.

“으랴압!”

붕붕­!

막시무스는 호쾌한 기합소리와 함께 큰 도끼와 작은 도끼를 번갈아가며 휘두르고 있었다. 큰 도끼는 원래 트리보가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개백정 도른의 도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가 수십 년 넘게 사용하던 작은 도끼 중 하나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하나는 큰 도끼를 쓰라는 내 조언을 충실히 따른 것 같았다.

사정거리가 짧은 쌍수 도끼. 괜찮은 조합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방어력이 현저히 떨어져 보였다.

나처럼 기동력이 좋거나 오르페처럼 높은 방어력을 갑옷을 입고 있다면 모를까, 막시무스는 황소처럼 우직하게 공격을 받아내며 기회를 노리는 방법밖에 없겠지. 그러면 싸움에서 이겨도 만신창이가 된다.

그래서 내가 추천해준 게 연못의 산신령도 껌뻑 죽는 큰 도끼, 작은 도끼 조합이다.

이 조합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강적과의 일대일 대결을 펼칠 때도 큰 도끼로 치명타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으리라.

물론 지금까지 막시무스가 쌓아온 스타일을 버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쉽지 않은 결정을 한 거겠지.

­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큰 파도에도 버티기 위해서는, 진화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설득했다.

지구에서 유명한 일화도 하나 전해줬는데, 그, 모두가 아는 그, 잿빛개구리매인가 털발말똥가리인가 하는 닭대가리의 이야기다.

­ 막시무스, 알고 있나? 작은노랑머리콘도르는 10년마다 부리와 발톱을 교체한다. 살아남기 위해 낡아서 해진 사냥도구를 바위에 부딪혀 갈고 닦는 거다. 닌자가 되기 위해서는 너도 그 짐승처럼 행동해야 한다.

­ 과연…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해보겠습니다.

작은노랑머리콘도르였던 거 같기도 해서 일단 그놈으로 말했다.

곤충과 공룡의 종류라면 500종도 넘게 알고 있는 나지만, 어째선지 조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치킨 메뉴만 기억하면 되지 뭐 그런 새끼들까지 기억해야 하나 싶다.

어쨌든 막시무스는 루녹스 다음으로 좋은 닌자의 자질을 갖춘 녀석이었다.

피부색이 검어서 그런지 위장도 잘했고, 체력이 좋아 닌자몰살을 펼치기도 좋았다. 성장이 끝났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그건 새로운 장비와 기술로 때우면 된다.

트리보가 사용했던 개백정 도른의 도끼는 단단한 건 물론이고 접이식이라 휴대하기도 편한 희귀 등급 아이템이니 문제는 없다.

깡! 깡!

생각한 김에 트리보를 찾아갔다. 녀석은 열심히 쇠를 두들기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아직도. 해야. 하는.]

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작업하는 걸 보니 대장장이 일에 적응이 된 것 같아 다행이다. 파란색 닌자 도복을 만들라고 했을 때는 그 육중한 몸으로 펄쩍 뛰면서 반항했었지.

철컥. 철컥.

“이제 더 많이 죽일 수 있어. 웬디…피터…릴리…하늘에서 지켜봐 줘.”

후크는 뭐라 중얼거리며 보급형 닌자도를 만지는 중이었다.

살인마적 면모를 갖춘 이 닌자는 이번에 손가락이 갈고리 모양인 의수를 왼손에 달았다. 손가락은 3개인데 꽤 날카로워 근접전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의수 이름은 ‘닌자클로’다. 나중에 팔뚝 부분에다 닌자 단도를 부착할 예정이다.

“그렇지. 잘 먹는다.”

하이디는 동굴 바깥에서 기르는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몇 개월 전에 알아서 번식하라고 암수 세 쌍씩 짝지어 데려왔다. 돼지, 닭, 염소, 양은 비교적 끌고 오기 편했지만, 소는 덩치가 커서 그런지 동굴 구멍에 잘 안 들어가 힘들었지.

주변에 풀도 많고, 좀 더 걸으면 호수도 있으니 기르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거 같다. 똥 처리야 뭐 따로 하는 닌자들이 있으니 걱정도 없고.

“흐윽…”

저쪽에서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삽으로 똥을 푸고 있는 쪼커가 뒤처리반 대표다.

“오큘리우스…나 너무 힘들어용…이런 걸 생각하고 들어온 게 아닌뎅…”

“웩.”

멀리 떨어져서 구경 중인 오큘리우스는 물갈퀴로 부리를 가리고 있었는데, 코를 손으로 막은 것 같은 자세였다.

알몸으로 다니는 건 좋지 않으니, 오큘리우스한테도 파란색 미니 도복을 입혀줬다.

“닌자의 길은 포기하는 게 좋을까용…연극단으로 돌아가고 싶어용…”

쪼커, 네가 기어이 일을 만드는구나. 배신자는 용서치 않는 게 닌자마을의 규칙이거늘.

탈주닌자도의 검집에 손을 올렸다. 녀석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사람을 썬 지가 좀 오래되긴 했지.

쪼커…넌 죽을 때도 그 빌어먹을 말투를 유지할 수 있을까? 목숨의 위기 앞에서 사람은 비굴한 법이야. 넌 나에게 표준어로 자비를 구걸하게 될 거다.

난 단호하게 거부할 테고.

“...!”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웩.”

“...그렇겠죵? 이것 또한 제가 선택한 길이니까용. 여기서 도망친다면 평생 후회하겠죵. 부끄러워서 다시는 단장님과 동료를 볼 수 없을 거에용.”

뭐?

“웩.”

“단장님이 옳은 길은 언제나 고달프고 가파르다 했었죵.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더 힘낼게용.”

“웩?”

어이가 없네. 아니, 네가 무슨 소년만화 주인공이야? 왜 자문자답을 하면서 정신적인 성장을 이루는 거야?

“...”

별 쓸데없는 성장 이벤트 때문에 흥이 다 식어버렸다. 탈주닌자도를 검집에 넣고 동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건 그렇고, 하이디…

첫날부터 계속 지켜봤지만,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지.

참을성이 좋은 건지,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개인적인 ‘인터뷰’를 진행할 때가 온 거 같다.

쪼커가 날 너무 자극했기 때문에, 아니, 더는 기다리는 건 나와 맞지 않기에 오늘 저녁에 찾아갈 예정이다.

“로빈? 어디야?”

오르페가 눈을 깜빡거리며 날 찾길래 엿보기를 마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별건 아니고, 다음 주 스케줄 때문이야. 불 속에서 한 시간 버티기라니, 이건 대체 뭐야? 내가 모르는 뜻이 숨겨져 있는 거야?”

“말 그대론데.”

“...좋아. 우선 이건 바꾸는 게 좋겠어.”

“뭐? 내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

아무도 내 교육에 딴죽을 걸 수는 없다.

“비상식적이잖아. 불 속에서 버텨서 뭐가 좋은데? 화상만 잔뜩 입고 끝날걸.”

“­오르페, 시건방 떠는 것도 거기까지다. 지금 당장 그 주둥아리를 놀리지 못하게 해주지.”

이 다음 엉망진창으로 설교를 들었다.

***

모든 랜턴이 꺼진 용주골의 밤. 슬그머니 하이디가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음냐…”

지푸라기로 가득 찬 다키마쿠라를 꼭 끌어안고 자는 하이디의 모습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이렇게만 보면 평범한 어린아이인데 말이지.

“...하이디~!”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이­디­! 어서 일어나렴.”

“음?”

잠에서 깬 하이디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타, 탈주닌자님?”

“조용. 사람들 깨면 안 되잖아.”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시죠?...”

난 어린아이들을 싫어한다. 그냥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극도로 혐오한다.

솔직히,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다. 먹고 싸고 자고 울고만 하는 건방지고 쓸모없는 생명체를 좋아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지?

그래도 하이디는 자기 역할을 잘 해내는 아이였으니, 나도 서비스를 해 줄 생각이다.

“흐흐흐흐…”

우선 스윗한 웃음으로 그녀의 긴장을 풀어줬다.

“왜, 왜 그렇게 웃으시는…”

“하이디, 난 널 좋아하는 편이다.”

다른 꼬맹이들에 비해서는 그렇다. 내가 오랫동안 봐 왔으면서도 딱밤을 때리지 않은 꼬맹이는 하이디가 최초다.

“네…?”

“그러니 최대한 부드럽게 대해줄 생각이야.”

“...”

“너도 정직하게 날 대해야겠지?”

“...끅.”

밤이라 추워서 그런지 하이디의 얼굴이 새하얗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 건…수상한데.

스릉.

탈주닌자도를 빼 들었다.

“흐, 흣!”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등을 천막에 바짝 붙이는 하이디. 그 눈에는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이건 도둑이 제 발을 저리는 거라고 봐야 하나.

“너.”

미친듯이 떨리던 그녀의 몸이.

“감시자냐?”

이 말을 듣고 거짓말처럼 멈췄다.

“대답해.”

“...윽.”

이제는 사라진 안데스 마을에서 온 소녀 하이디.

“10초 안에 대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그녀에게는 감시자의 기운이 느껴진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