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93화 (93/119)

〈 93화 〉 93화. Who watches the Watchmen? (4)

* * *

“키에에에에!”

검은 점액으로 뒤덮인 하이디가 수십 개의 촉수를 난사한다. 여성 특유의 굴곡은 유지하고 있지만 덩치가 두 배 이상은 커진 탓에 하이디라고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문어의 다리같이 생긴 촉수로 퍼붓는 맹공을 탈주닌자도로 저지했다. 아니, 정확히는 초밥 장인처럼 그 촉수를 하나하나 잘라냈다.

“흡!”

오르페는 어느새 변신을 마쳤는지 황금갑옷을 두르고 창으로 촉수를 막아내고 있었다.

수많은 전장을 거치면서 고대용사 풀세트의 기능을 많이 알아낸 그녀는 이제 장비를 소환했다 해제했다 할 수 있다.

아공간에 저장된 장비를 의지로 불러내는 거라는데, 나에게는 매블 시리즈의 아이론맨처럼 슈트가 갑자기 생성되어 입혀지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깡­! 통­!

[우앗.]

특별한 방어수단이 없는 트리보는 육쪽마늘처럼 쪼개진 지 오래. 불사신이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끄르르르륵­!”

하이디의 촉수를 전부 잘라내기 직전이었다. 몸을 슈슉! 하고 아크로바틱하게 비튼 그녀가 동굴 벽을 타고 올라간다.

“어딜 도망가.”

이렇게 날뛸 때를 대비해서 동굴 깊숙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빠르게 따라붙은 후 검은 촉수로 이루어진 하이디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비틀었다.

탈모 걸린 아저씨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아가듯 슝슝 빠지는 머리카락. 이때다 싶어 발버둥치는 하이디였지만.

“키켁!”

만화 속 탈모환자들도 잘 빠지지 않는 세 가닥은 있기 마련. 빠지지 않은 채 팽팽함을 유지하는 건강한 머리카락 때문에 하이디는 도주에 실패했다.

“크르앙!”

탈출은 포기했는지 몸을 돌린 녀석이 흑요석같이 날카로운 손톱을 앞세워 공격을 시도한다.

“흠.”

일일히 막으면서 녀석의 전투력을 테스트했다. 속도, 근력, 공격력 다 높은 편이다. 붉게 물든 하이디의 눈은 내 손이 움직일 때마다 핑그르르 돌아갔는데, 내 움직임을 캐치하기 위한 거 같았다.

“­따라올 수 있겠나?”

투타타타타­!

눈썰미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 헬리콥터 검법을 사용했다. 처음 공격은 포착했는지 아슬아슬하게 막아내면서 모방하는 그녀였지만, 내가 속도를 높일수록 방황하며 몸 이곳저곳이 찢겨 나간다.

순발력이 높고 눈썰미도 좋았으나, 등급표에서 8점을 받은 내 공격을 받기에는 무리였다.

“키르륵…”

재생력이 높은지 찢긴 상처를 금방 수복하는 베년 버전 하이디. 재생력 또한 큰 장점인데.

“오르페.”

6조각으로 쪼개진 트리보를 맞춘 후 우리 전투를 지켜보던 오르페를 불렀다.

“네가 상대해라.”

대충 등급을 정했지만, 아무래도 수준 차이가 크게 나는지라 세세한 그림이 부족하다. 6점에서도 최상위권인 오르페가 상대한다면 더 확실해지겠지.

“알았어.”

“재생력이 높으니 안 봐줘도 돼.”

“응.”

창을 앞세운 오르페가 하이디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딴지가 없는 게 맘에 든다.

이윽고 오르페의 창이 하이디의 어깨를 꿰뚫었다. 하이디는 견제하기 위해 촉수를 휘둘렀지만 고대용사의 방패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케에에엑!”

비명을 지르면서도 손톱을 휘두르는 하이디. 하지만 그 공격 또한 전설 등급 아이템인 오르페의 갑옷 앞에서는 무력했다.

결국 긁힌 자국조차 남기지 못하고 부러지는 손톱.

“진짜 개사기라니까.”

템빨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 하이디도 지금 ‘우리 조상도 고대용사였어야 했는데.’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뭐, 혈통빨과 템빨도 전투력의 일부니 비겁하다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기적인 장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 또한 능력이니까.

둘은 몇 번의 공격을 더 주고받기는 했지만, 의미 없는 싸움이었다.

하이디의 공격은 오르페의 갑옷을 뚫을 수 없었고, 속도는 비슷했기에 장점을 살릴 수 없었으며, 점액으로 만들어진 육체의 내구도와 재생력은 황금창을 버텨낼 수 없었다.

내가 먼저 신나게 패서 빠르게 승부가 난 것도 있지만, 오르페가 전체적으로 스펙적인 우위에 있는 건 맞다.

“케에에엑!”

하이디가 마지막으로 취한 수는 겁에 질린 누렁이처럼 뒤로 물러선 채 왈왈 컹컹 짖는 것이었다.

“그만.”

따닥­!

기습공격(꿀밤)으로 하이디를 제압했다. 볼 거 다 봤으니 이제 필요 없다.

감시자에게 빙의당한 하이디, 줄여서 베년 하이디의 전투력은 6점. 그것도 중간 정도다. 그 정도면 웬만한 칠검경급은 된다는 거다.

“음.”

좋은 소식은 아니다. 폭주한 하이디를 안전하게 제압할 수 있는 강자가 거의 없다는 뜻이니까.

베년이 몸을 움찔움찔 떨다 뻗어버리자, 하이디의 몸을 덮고 있던 촉수들이 그 작은 몸으로 흡수되듯이 빨려 들어간다.

영혼이 탈출하려는 시도를 보일 때 멸혼안을 쓰려고 했는데, 감시자는 결국 하이디의 몸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건 처음 봐…”

[제압할 수도 있는 거였나. 여유가 있기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써먹는 건 힘들겠지만.]

오르페와 트리보가 어느새 인간 모습으로 돌아온 하이디에게 다가간다.

감시자 특유의 ‘위험에 처한 숙주 보호’ 본능을 이용해 바깥으로 나가는 걸 유도하고, 그 영혼을 멸혼안으로 없앤다.

내가 생각한 작전이다. 한 번 숙주에 붙으면 숙주가 죽거나 죽음 직전까지 가기 전에는 몸에서 빠져나갈 수 없으니, 적당한 고통을 줘서 도망칠 구멍을 주자는 작전이었다.

오르페는 이미 한 번 멸혼안을 본 감시자가 숙주를 벗어날 거 같냐고 딴죽을 걸었지만, 무시하고 진행했다.

“씁.”

결과야 뭐 좋지 않았지만, 시도할 가치가 있는 작전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하이디를 안아 든 오르페가 묻는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야.”

“어떤 방법?”

“하이디가 감시자를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준다.”

“마구 때리려는 건 아니지?”

날 뭘로 보는 거야.

“요괴와 싸워 이겨낼 수 있는 굳센 정신을 주겠어.”

“...기합이다 인간수업이다 하면서 때리려는 건 아니지?”

“아 아니라니까 그러네 진짜.”

엄밀히 따지면 이 방법만 있지는 않다. 내가 평생 하이디를 지켜본다는 선택지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좀 귀찮, 아니, 서로에게 성가시다.

“용주골 닌자 시험에 하이디를 데리고 갈 거야.”

“뭐? 너무 위험해.”

예상대로 화들짝 놀라는 오르페.

“괜찮아. 우리 둘이서 닌자 시험을 지켜볼 거니까.”

이미 짜 놓은 스케줄이 있다.

“잘 봐.”

오르페의 품에 안긴 하이디의 몸에 탈주닌자도를 ‘살살’ 찔러 넣었다. 츄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하이디의 등에서 검은 촉수가 튀어나와 내 공격을 방어한다.

[숙주를 보호하고 있군.]

방어를 마친 후 스르륵 들어가는 촉수. 오르페는 신기한지 촉수나 나왔다 들어간 하이디의 등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을걸.”

목숨을 위협하는 자를 견제하는, 일종의 자동방어 시스템이 있지 않나 싶다.

“오늘은 여기까지. 씻고 자자.”

등을 돌리기 전 트리보에게 말을 전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여기 박살난 거 다 메꿔줘.”

[...뭐라고 했나.]

“먼지 많이 날리잖아. 공기 청정기라도 만들어서 틀어 봐.”

가고일 석상처럼 멍하니 서 있는 트리보.

어쨌든 이로써 하이디 육성계획은 시작됐다. 그녀에게 악과 맞설 수 있는 정의롭고 굳센 정신을 심어주리라.

“­감시자는 내가 감시한다.”

마지막으로 멋지게 말해준 후 자러 들어갔다.

***

“...따라서 갈색바위 부족이 성물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붉은고래 마탑의 전 6급 직원, 대니 호프먼이 힘겹게 말을 마쳤다.

“그렇군.”

탁자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치던 베아트릭스가 그녀의 용병단원들에게 눈을 돌렸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용병들이 무기를 챙겨 바깥으로 나간다.

“이제 볼일은 끝났습니까.”

대니가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버마재비 용병단과 용병왕 베아트릭스는 마탑 전투 이후 숨어 살던 그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대니가 붉은고래 마탑에서 정령의 4 성물을 찾는 임무를 맡았다는 걸 알고 찾아왔다.

‘전쟁억제력이라니.’

대니는 버마재비 용병단의 부단장이 했던 허무맹랑한 말을 떠올렸다.

­ 지금이야 새로운 지배계층을 만드느라 바쁘지만, 몇 년만 지나도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새로운 왕족이 된 자들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지. 전쟁을 시작될 거고,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릴 거다.누군가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전쟁을 막아야 한다.

그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지 부단장은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마치 세상을 위해 우리가 고귀한 희생을 한다는 듯한…

정령의 4성물. 감시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정령들이 만들어낸 유물이다.

물과 불, 공기와 흙의 성물을 전부 모아서 고대 정령의 사원에 갖다 놓으면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다고 전해진다.

용병왕 베아트릭스와 버마재비 용병단은 벌써 3개의 성물을 모은 상태였다.

‘어디까지 정보가 새어나간 건지…’

마탑의 본부가 함락되고, 마탑주와 여러 간부가 싹 쓸려나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비밀리에 만든 연구소부터 지하기지, 멀고 먼 오지의 마탑 지부에서 아직도 목적을 위해 실험을 이어나가고 있는 간부들까지.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붉은고래 마탑의 잔재는 아직 대륙 곳곳에 퍼져 있었다.

“글쎄.”

베아트릭스가 픽 웃었다. 전쟁억제력이 되어 모든 전쟁을 막겠다는 사람의 웃음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허한 웃음이었다.

“...끝났다면 죽여 주십시오.”

대니는 눈을 감았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이제 더는 알 바가 아니었다.

버마재비 용병단이 가족을 모두 죽였고, 자백제를 먹여 성물이 있을만한 위치를 실토하게 하였다. 살아갈 이유도, 적들이 살려둘 가치도 없는 인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고귀한 희생이라 생각해라.”

베아트릭스가 완전히 무력화된 대니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냥 절대적인 권력을 얻고 싶은 거 아닙니까.”

그 말이 대니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폭력이 폭력을 부르고, 작은 전쟁이 큰 전쟁을 부르지.”

베아트릭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싸운 끝에 무엇이 남지?”

대니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 여자는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승자와 패자?”

“...”

“마음이 꺾인 패잔병들과, 분노에 가득 찬 그들의 아이들?”

“무슨.”

베아트릭스의 눈에서는 광기가 들끓고 있었다.

“난 차라리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면 한다.”

대니의 머리를 쥔 베아트릭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이 끊임없는 연쇄를…내가 끊어내겠다.”

무언가가 으깨지는 소리가 대니의 집 바깥으로 새어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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