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95화. 진짜 다 몰살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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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건 이루셨나요?”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세일린은 예전처럼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있지 않을까. 얼굴을 유추할 수 없는 미스테리한 부분이 맘에 든단 말이지.
“그렇다 볼 수 있지. 일행도 끌고 왔다고.”
“절 찾아오신 것도 업무의 일종이겠군요.”
“우연히 동선이 겹친 거야. 나도 네가 아직도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어. 6개월 정도는 외부와 연락이 차단된 곳에서 있었거든.”
“용건이 뭔가요?”
“다짜고짜 용건이라니. 좀 섭섭하네.”
사람좋게 웃는 막시무스. 인싸적인 웃음소리다.
“용건이 없으면 찾아온 적이 없으니 그렇죠.”
“서로 바쁘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마.”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범죄조직에 대해 알고 있나?”
“와, 이것도 우연인가요?”
“음? 무슨 뜻이지?”
“제가 의뢰를 받고 조사하고 있는 것도 그쪽이거든요.”
“의뢰 내용이 뭐지?”
바로 캐묻는 걸로 보아 사이가 보통 좋은 게 아닌 거 같다. 유사부녀 관계쯤 되려나?
“놈들에게 끌려간 남편을 구출하는 거요. 아내분이 직접 의뢰하셨어요.”
“좋아. 같이 협력하자고. 나와 일행은 놈들 목만 따면 되거든.”
“그러죠. 쉽지는 않겠지만.”
서류인가? 세일린이 얇고 가볍고 팔랑이는 무언가를 막시무스가 있는 방향으로 넘긴다.
“뿔장어파?”
종이 몇 장을 넘긴 막시무스가 묻는다.
“가칭이에요. 조직 간부들이 허리 부분에 뿔장어 문신을 새겼거든요.”
뿔장어파. 야쿠자다운 파멸적인 작명 센스다.
“뿔장어…노루거북 해적단이 생각나는군.”
“아, 그 녀석들이요.”
“상징성이라고 했었나? 뿔 달린 식인 거북을 길렀지.”
“식인 뿔장어를 기르지는 않더라고요.”
“아쉽군.”
뿔 달린 식인 거북이가 있다고?
하긴, 자살에 최적화된 어금니를 가진 멧돼지 요괴가 있는 세상이다. 뭐가 있든 이상할 건 없지.
“살인, 강도, 약탈, 인신매매. 방화도 가끔 하고. 돈 되는 일은 다 하는 놈들이에요. 빈민가에서 활동하는 놈들이라 경비대도 별 신경 안 써요.”
“귀찮은 놈들이네. 조직원 수는 파악되고?”
“떼를 지어 다니는 놈들은 30명. 전부 합쳐도 70명 좀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이름 있는 놈은?”
이름 있는 놈. 아마 유명한 놈이 있느냐는 뜻이겠지.
“별로 없어요. 그나마 ‘딸깍발이’ 루들리와 ‘불청객’ 토토란, ‘불콰한’ 룩사우 정도?”
“잡놈들이군. 쉽겠어.”
막시무스가 픽 하고 코웃음을 친다.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기사단 하나가 이놈들 뒤를 봐 주는 거 같아요.”
“기사단?”
“밤토끼 기사단이라는 놈들이에요.”
“밤토끼? 질서유지군 소속 기사들이 만든?”
질서유지군.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거의 다 죽여 놨는데 아직도 잔당이 남아 있었나 보다. 천마 모니카에 관심이 쏠려 확실하게 끝장을 내지는 못했지.
“맞아요. 변검경도 없고 열두제자도 없어서 영향력은 적지만, 썩어도 기사단이죠.”
“단원 수는?”
“13명.”
등급표에서 3점 이상은 가는 기사가 13명이라. 용주골 닌자들도 가볍게 여기기 힘든 숫자다. 루녹스와 막시무스가 절반 정도는 잡고 있어야 확실한 우세를 점할 수 있지 않을까.
변수인 하이디도 있기에 승률이 낮지만은 않다.
“진짜 골치 아픈 건 이쪽이었군.”
“그렇지도 않아요.”
“뭐?”
“확실하지는 않지만, 마검경이 밤토끼 기사단의 뒤를 봐 주고 있을 수도 있어요.”
“마검경? 처음 듣는데.”
“몇 개월 전에 새로 임명된 칠검경이에요. 지금은 네오네오솔리트론의 치안을 맡고 있죠.”
내가 3명을 죽였고 오르페가 패검경을 죽였으니 칠검경 자리에 공석이 많긴 하다.
그건 그렇고 관계가 존나 오묘한데. 뿔장어파의 뒤를 봐주는 밤토끼 기사단의 뒤를 봐 주는 마검경이라니.
속사포로 쏟아붓는 랩에 나오는 가사 같은 느낌이다.
세일린의 뒤를 봐 주는 막시무스의 뒤를 봐 주는 용주골의 뒤를 봐 주는 탈주닌자가 여기 있으니 여기 있으니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원래 세상은 복잡한 관계로 엮이고 엮인 법이다.
“설표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합니다.”
세일린이 마검경에 대한 정보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설표 기사단? 그쪽 부단장이 그렇게 실력 있지는 않았는데.”
막시무스가 만나본 적이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은근히 인맥왕이라니까.
설표 기사단은 들어본 적이 있다. 쾌검경이 붉은고래 마탑에서 개조 받기 전에 이끌었던 여성 기사단 이름이다.
이제는 해체됐다고 들었는데, 그놈들 보스가 악당이었지 기사단 자체는 문제가 없어서 그냥 가볍게 넘겼다.
“암시장에 올라온 변검경의 마검을 손에 넣고 강해졌다네요.”
“마검? 변검경은 마검을 사용하지 않아.”
“변검경이 탈주닌자와 대결을 벌였을 때 사용했던 검이라 하더군요.”
이건 흑룡검 얘기 같은데.
비탄의 쇼군 전투 당시에 제이드 놈이 생성했던 검인데, 내가 반으로 갈라버렸다. 이후 본드를 잘 발라 고친 모양이다.
마검경은 템빨로 파워업을 했다는 건가. 왠지 모르게 오르페가 생각난다.
“...?”
오르페에게 눈치를 주고 고개를 몇 번 저어준 후 다시 집중했다.
‘봐, 너랑 똑같지?’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가까스로 참은 거다.
“밤토끼 기사단장과 마검경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건 확실해요. 이쪽 자료를 보시면…”
“연인 관계로 추정된다…이게 가장 확실하지. 바쁘게 이곳저곳 싸돌아다니는 기사님들이 전쟁터 말고 어디서 사람을 만나겠어.”
“여튼 까다로운 상대에요. 뿔장어파의 본거지는 알아냈는데, 쉽사리 행동을 취할 수 없더라고요.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밤토끼 기사단이 나서기 전에 전부 정리하면 돼.”
그들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상인 쪽은 잘 되나 볼까?
***
“싸다! 진짜 싸다! 다있소 상회는 거짓말하지도 않고, 수상하지도 않습니다!”
상인으로 변장한 용주골 닌자들이 시장바닥에서 손님을 모으고 있었다. 상인경험이 있던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괴상한 표정과 어색한 대사로 꾸물거릴 뿐이었다.
팔고 있던 물건도 무질서하다. 우유와 야채, 단검을 같은 테이블에 놓다니.
아침은 우유로 간단히 때우고 점심은 샐러드, 저녁은 단검으로 야사요을 죽인 후 그놈의 지갑으로 사 먹으라는 뜻인가.
간섭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정도가 너무 심해서 나설지 말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제가 해볼게용.”
눈치만 보고 있던 쪼커가 나섰다. 진열된 단검을 싹 치우더니 오큘리우스를 테이블 구석에 올려둔다.
“최고급 비료로 기른 유기농 채소와 마법으로 살균 처리를 마친 우유 팝니당!”
최고급 비료와 마법 살균이라. 당연히 뻥이다. 그런 게 용주골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이들과 애완동물에게도 좋아용! 오큘리우스!”
“웩.”
오큘리우스가 테이블 위의 채소를 향해 움직인다. 오리의 부리 같은 주둥이를 신이 나게 움직이면서 자칭 유기농 채소를 흡입하는 녀석.
“뭐야, 오큘이잖아.”
“쟤 채식동물이었어?”
“초식동물이겠지.”
“얌전히 있으니 귀엽다.”
게걸스러운 짐승이 뭐가 좋은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한다.
“오늘만 특별히! 특가로 판매합니당! 다시는 안 오는 기회!”
이때다 싶어 더 목소리를 키우는 쪼커. 시원시원하고 청명하게 말하는 게 확실히 연극배우 느낌이 나긴 한다.
“우유의 효능! 우유에는 칼슘이 많이 들어 있어용! 따라서 골밀도를 높여 주어 아이들의 성장을 돕고, 골다공증 예방과 치료에도 도움을 줘용! 우유를 하루 3번 식후에 한 잔씩 꾸준히 마시면 건강에 좋아용!”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효능까지. 즉석에서 저런 개소리를 만든 건가. 확실히 닌자적 재능은 있다.
싸움을 못한다는 게 걸리지만, 탈주닌자나 슈퍼닌자가 아닌 일반 닌자기에 어느 정도 봐줄 수 있다. 정보수집이랑 교란, 침투만 잘해도 제 몫은 톡톡히 하는 셈이다.
얼굴이 반반하게 생겨서 미인계도 할 수 있을 거 같다.
‘로빈.’
다른 쪽으로 보낸 오르페가 이쪽으로 돌아와 신호를 보내길래 자리를 옮겼다.
“후크와 루녹스는 어때?”
인적이 드문 곳이라 조용히 말해도 된다.
“후크는 범죄조직…아니, 야쿠자 클랜에 들어갔어. 뿔장어파는 아냐.”
“뭐?”
아니 씨발 그게 대체 뭔 소리야. 걔가 왜 갑자기 야쿠자가 돼? 열정 있던 녀석이었는데. 바깥 공기를 마시니 마음이 변했나?
“죽이고 온 거지?”
아무리 친아들처럼 아꼈던 후크라도 배신은 안 된다. 타락닌자는 단호하게 처리하는 게 용주골의 규율이다.
오르페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정보를 얻기 위해서 잠입한 거 같아.”
“정보?”
“그쪽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잖아.”
“막시무스가 한다고 했는데 왜 걔가 나서.”
“여차할 때 도움이 되려고 한 거 아닐까. 들어봐.”
중소 야쿠자 클랜에 잠입해서 보스의 신임을 얻고, 대형 클랜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였나.
대충 설명을 들으니 그럴듯하다.
“루녹스는?”
“검술 연습 중이야. 다른 닌자들 말을 엿들었는데, 오늘 종일 검만 휘둘렀다는 거 같아.”
그렇게 헬리콥터 검법이 맘에 든 건가. 솜씨도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니 뿌듯할 뿐이다.
“참 맘에 드는 친구야. 그치?”
“난 걔 맘에 안 들어.”
갑자기?
“왜?”
“너무 뻔히 쳐다보잖아.”
“뭐가?”
“아냐. 못 들은 걸로 해.”
갑자기 흐름이 이상하게 끊겼지만, 오늘 먹을 음식 얘기를 해 자연스럽게 넘겼다.
어쨌든 다들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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