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101화. 모든 시대의 평화 (1)
* * *
난 흑룡검을 집어들었다.
고오오오오…
비탄의 쇼군이 인생 마지막 칼춤을 출 때 사용하던 중2병 무기가 온몸을 떨면서 검은 불꽃을 뿜어냈다.
진짜 불꽃처럼 뜨겁지는 않았고, 그냥 이펙트만 활활 타오른다.
고오오오오오…
“흠.”
뭔가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죽은 비탄의 쇼군 제이드의 원한과 증오가 엑기스로 남아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오래전에 뒤진 새끼가 현세에 영향을 끼칠 리 없다. 그놈의 영혼이 소멸하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냥 그런 느낌만 내는, 장식품이겠지.
“루녹스.”
난 눈물을 소매 끝으로 훔치고 있는 ‘받아쓰기 빵점’과 눈을 맞췄다.
“네에, 마스터…”
씩씩하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발음이 뭉개졌고, 그래도 대답하기 위해 억지로 말을 잇는 티가 난다.
모른 척 무시해 주는 게 배려겠지.
“이 검은 너에게 주겠다.”
억지로 강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녹스에게 흑룡검을 던졌다.
너무 강한 표정은 짓지 마, 약해 보인다.
“어, 엇?”
맹한 소리를 내면서도 받아드는 루녹스.
“너라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이 끝난 막시무스와 아직도 성장 중인 루녹스. 심지어 둘은 전투력마저 비슷한 편이다.
둘 중 하나를 파워업 시켜줘야 한다면, 전에 사용하던 무기랑 얼추 비슷한 검 종류를 쓰던 루녹스를 밀어주는 게 났다.
“윽, 목소리가…!”
흑룡검을 잡은 루녹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상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아무래도 느낌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착각이다. 아무도 속삭이고 있지 않다.”
물리적인 해를 끼치지는 못하겠지. 그렇다면 그냥 시끄러운 알람시계 정도일 뿐이다.
“그, 그렇지만 소리가 갈수록 커지는 것 같은 느낌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아무래도 저주 같은 게 있지 않나”
“그런 건 없다. 그러니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원혼이나 저주가 들러붙어 있었다면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그냥 제이드 그 새끼가 허세 부리는 것뿐이다.
“아니면 내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럼 됐고.
“설령 저주나 원혼이 붙어 있다 해도, 완벽히 소화하여 다루는 게 닌자다.”
그딴 잡귀 따위에 진 병신은 닌자 자격이 없는 거다.
“어둠마저 받아들이며…흡수한다.”
갑자기 몽롱한 눈으로 중얼거리는 루녹스. 뭔가 삘이 꽂힌 모양인데.
“알겠습니다. 잘 다룰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제야 원하는 대답이 나오네.
눈앞의 금은보화 절반은 전부 싹싹 긁어서 끌어안았다.
“이것들은 전부 닌자발전기금으로 쓰겠다. 나머지 절반은 사회복지를 위해 사용해라.”
사회복지. 별건 아니고, 그냥 보육원 이재민(?災民) 지원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이건 너희가 사용하고.”
전부 가져가면 정 없으니까 닌자들 까까 사 먹으라고 큼지막한 금 몇 개를 바닥에 다시 내려놨다.
막시무스와 루녹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불만은 없겠지.
내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위해 절반을 가져가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용주골의 발전과 내가 사용할 부드럽고 안락한 침대 및 최신식 화장실 구매와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을 위해서다.
전부 사용하고 남은 돈은 트리보와 기술자들에게 주면 되겠지?
그래. 전부 용주골의 발전과 백성 수호를 위해서다.
“막시무스, 루녹스. 마지막 시험이다. 용주골 닌자들을 통솔해 요괴를 무찔러라.”
““닌닌!””
***
일주일을 내리 쉬며 기초 훈련만 하던 용주골의 닌자들이 드디어 출발했다.
루녹스는 개인 훈련방에서 흑룡검과 함께 시간 대부분을 보냈는데, 지금은 거의 자기 새끼처럼 어딜 가든지 흑룡검을 들고 다니는 걸 보니 어떻게 잘 합의를 한 것 같다.
긍지를 하나 버릴 때마다 우리는 요괴에 한 걸음 다가간다. 마음을 하나 죽일 때마다
우리는 요괴에서 한 걸음 멀리 물러선다.
어둠은 나의 벗, 그림자는 나의 몸종…!
혼자서 중얼거리는 빈도가 많이 높아지기는 했는데,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루녹스는 예전부터 자주 그랬으니까.
목적지는 상록수 마을 주변에 있는 흑령산. 내가 꿀벌여왕을 죽이고 산세리프와 야인족의 성물을 되찾아 준 산이다.
고대에 거대하고 검은 영적 존재가 살았기에 흑령산이라나 뭐라나.
고대 얘기는 대부분 장난 반 허세 반이기 때문에 그냥 미신일 확률이 높다.
예전에 그런 놈이 살았다 해도 지금은 없을 거고,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쳐도 꿀벌여왕의 ‘거대 벌집 만들기 프로젝트’를 막지 못했으니 무능력한 놈이겠지.
흑령산 깊은 곳에서는 지금 ‘매직먼키’라는 요괴들이 살고 있다 한다.
유인원처럼 생겼고, 요술이라고 하는 마법 비스름한 음양술을 다루는 요괴종이라나 뭐라나. 후크는 모험가 동료를 이놈들에게 잃었다고 말했다.
이놈들을 잡자고 강력히 주장한 것도 후크다.
원래는 가족 단위로 움직이며 인간사냥을 나서는 식인 요괴인데, 치료제가 왕국 곳곳에 살포되고 난 후 거대한 집단을 이뤘다고 한다.
놈들이 치료제를 맞아서 그러는지 안 맞기 위해 그러는지는 마법사들도 모른다고.
집단을 만든 후 인류에게 도전했다면 깡그리 잡혀 죽었을 테지만, 놈들은 영악했다. 인적 드문 흑령산을 차지한 후 지금까지도 숨어 살고 있단다.
규모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고 피해를 봤다는 신고도 없는지라 아직도 왕국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어쨌든 그런 꺼림칙한 놈들이 가까운 산에 숨어 살고 있으니 상록수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겁에 질려 있겠는가.
아예 흑령산에서 사는 산세리프와 야인족 녀석들은 어떻고.
식인요괴들이 미쳐서 날뛰기 전에 전부 잡아 족쳐야 한다.
“출발한다!”
막시무스의 명령에 ‘상표 없는 상회’의 마차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다있소 상회’는 네오네오솔리트론에서 사용해 정체를 들킬 위험이 있기에 사용하지 않았다고.
아, 뒤처리는 물론 깔끔하게 했다. 오르페가 사건 수사대장과 새로 부임한 시장에게 찾아가 잘 말했다.
설득을 했는지 협박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밤토끼 기사단과 뿔장어파, 아보카도 운송 연합 3 동맹과 그들의 자금줄을 원하던 마검경이 암투를 벌이다 전부 파멸했다는 식으로 알려졌을 거다.
밤토끼 기사단과 마검경은 왕국 쪽 주요 인사들과 충돌이 잦았다고 한다. 그들이 네오네오솔리트론으로 온 것도 좌천된 거라고.
네오네오솔리트론은 네오솔리트론 시절과 다르게 더 이상 촉망받는 대도시가 아니다. 네오솔리트론을 새로운 수도 겸 왕국의 중심지로 만들려고 했던 붉은고래 마탑과 검성회가 개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냥 재개발되고 있는 도시 A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고보니 밤토끼 기사단의 사무라이 하나가 막시무스한테 ‘왕국의 개가 됐나?’ 라는 말을 했었지. 이게 복선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나.
야쿠자나 사무라이가 미화되는 일 없이 조용하게 해결됐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결말도 별로 없지.
내가 탈주닌자 일을 할 때보다 쉽게 쉽게 일이 끝난 거 같기도 하고?
전부 선배인 내가 길을 잘 닦았기 때문이다.
나 때는 진짜로 힘들었는데.
“이번엔 우리도 마차를 타고 가자.”
입을 연 건 먼지를 만들며 떠나가는 ‘상표 없는 상회’를 지켜보던 오르페였다.
“그래.”
네오네오솔리트론처럼 바로 옆에 있다면 모를까, 저 멀리 있는 상록수 마을까지 뜬그림자를 쓰며 뚜벅뚜벅 걷기는 불가능하다.
가능하긴 한데 용주골 닌자들과 비슷한 시각에 도착하기는 힘들 거다.
“트리보가 우릴 위해 따로 만들어준 마차가 있어.”
“그래?”
문득 궁금해진다. 내 모든 마나와 열정을 불태워서 뜬그림자로 상태로 쉬지 않고 달린다면, 용주골 닌자들보다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말 듣고 있지?”
“그래.”
슈퍼 탈주닌자 시절보다 마나량이 많이 줄어든 나지만, 치타보다 더 빠른 속도로 수십 시간은 달릴 수 있다.
“대답이 너무 성의 없지 않아?”
“그렇군.”
체력 또한 끊임없이 단련하고 있으니, 아예 오르페를 등에 업고 가도 충분하겠지.
“바보.”
“그래.”
이번에도 국방닌자복을 입고 가야 하나?
“나 말 안 할래.”
“그래, 지 마.”
“진짜로 안 할 거야.”
“잘 생각해봐. ‘그래’가 아니라 ‘그러지 마’로 말했잖아.”
“맨날 말도 안 되는 핑계만 대면서.”
진짜 삐졌는지 아예 이쪽을 보지도 않는다.
예전에는 이런 구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전처럼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되나?
“자! 가자! 흑령산으로!”
뭐, 사춘기는 누구나 겪는 법. 오르페는 아직 꼬맹이니까 내가 이해해줄 수밖에 없다.
“으앗!”
바보같은 비명을 지르는 오르페를 번쩍 들어 올리고 닌자 개구리 점프로 폴짝폴짝 뛰었다.
오늘만큼은 홀스빈, 아니, 프로그빈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