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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103화 (103/119)

〈 103화 〉 103화. 모든 시대의 평화 (3)

* * *

산세리프, 오르페와 함께 술을 마신 날 밤이었다.

“로빈…”

딸국, 하는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오르페. 눈은 풀려있고, 볼은 빨갛다.

“완전히 취해버렸군.”

모험가로서 첫 의뢰를 끝내고 외식을 할 때처럼 완전히 맛탱이가 가 버린 그녀를 들쳐메고 천막까지 데려온 건 나다.

이번에는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인지 가벼웠지.

“로빈…”

오르페가 내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엄마 품에 안기고 싶은 아이처럼 엉겨붙는다.

사람마다 술주정이 다 다르다.

누군가는 술주정으로 무언가를 부수고, 누군가는 술주정으로 패드립을 하다가 행인과 스트리트 파이트를 찍고, 누군가는 술주정으로 할배국밥에 들어가 특대사이즈 순대국을 두 그릇이나 시켜서 먹는다.

야쿠자는 술주정으로 애인을 때리고, 사무라이는 술주정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죽이고, 천마는 술주정으로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

오르페의 술주정은 달라붙으면서 사과를 하는 거였다.

“미안해…”

“뭐가.”

“내가 바보라고 해서 속상했지? 아무리 화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나한테 바보라고 한 적이 있나?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이 안 나니 특별히 용서해줄게.”

“고마워…근데 나도 가끔 속상해…”

뭐 어쩌라는 건지.

또 안기려고 다가오는 오르페. 이제는 밀어내기도 지친다.

그냥 안게 놔뒀다. 자기 전까지만 봐준다.

“따뜻해…”

자연스럽게 내 몸을 더듬으며 성추행을 하네. 이런 못된 버릇은 누구한테 배운 거지?

트리보? 디아나? 에로위키(트리위키의 부속 위키)를 가지고 있는 트리보일 확률이 높다.

“로빈…”

“그래. 로빈이란다. 네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지.”

“응…”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기도 하고.”

“...응.”

대답이 좀 늦지 않았나?

“빨리 자렴. 늦게 자는 아이는 엉덩이에 뿔이 나요.”

적당히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재웠다. 문제가 있다면, 나도 존나 졸렸다는 거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자자.

“닌자취침.”

바로 잠들었다.

뭐, 하루 딱 붙어서 잔다고 오르페가 임신하고 그러진 않겠지.

그런 기괴한 일이 일어날 리 없잖아?

***

기괴한 일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다.

물론 오르페가 하루 만에 임신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아직도 자는 오르페한테 이불을 덮어 주고, 아침운동도 할 겸 바깥에 나왔다.

“베아트릭스.”

용병왕이라 불리는 그녀는 사오십 명쯤 되는 용병들과 함께 갈색바위 부족의 부락 앞에 서 있었다.

“아.”

개장수를 본 누렁이처럼 베아트릭스의 눈이 흔들린다.

왜 그럴까? 우린 나름대로 좋은 협력관계 아니었나.

“안녕. 탈주닌자 로빈이다.”

일단 다가가서 악수를 청했다.

“아, 안녕하세요. 베아트릭스입니다.”

눈을 빠르게 몇 번 깜빡인 베아트릭스가 내 손을 붙잡았다.

변함없이 굳세고 강건한 손이었다.

나름대로 단련한 오르페의 손이 아가처럼 부드럽다 느껴질 정도.

하지만 그녀가 빼먹은 게 있다.

“무슨 베아트릭스?”

“네? 아, 용병왕 베아트릭스입니다.”

그렇지.

“세누…헬베티카!?”

야인족의 호위를 받으면서 도착한 산세리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후아, 산세리프.”

“헬베티카! 아누 타 카 소르벤타!”

“아누 타 이벤 투 모로드. 렛 투 퍼시발트.”

“퍼시발트…와 아이 투 나.”

“와 아이 투 나.”

야인족 언어로 대화하는 둘.

“아, 죄송합니다. 저와 산세리프는 인연이 있어서요.”

베아트릭스가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전 야인족 출신입니다. 헬베티카는 우리 부족의 제사장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죠.”

“그렇군.”

별로 궁금하지 않은 정보였지만, 내 맘에 드는 사람이었기에 간단하게 넘어가 줬다.

뭐니뭐니 해도 붉은고래 마탑에 맞서 싸운 동료 아닌가.

새튼이나 무카, 쪼커 같은 예술가 새끼들이 까불면 바로 딱밤이지만, 베아트릭스는 몇 번 봐줄 수 있다.

“헬베티카, 동맹 부족의 일원. 누나 같은 사람이었다. 부족이 멸망했어도 인연, 끊기지 않는다.”

“멸망?”

베아트릭스의 부족이 멸망했다고?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베아트릭스는 허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럴 게 아니다. 반가운 손님, 대접한다. 탈주닌자, 너도 와라. 아침 식사다.”

“닌닌.”

오르페도 깨우고 와야겠네.

***

“아, 이 요리는 오랜만이네.”

훈제 닭다리를 집어든 베아트릭스가 산세리프와 눈을 마주했다.

“양념이 참 독특해서 기억에 남아. 자색구름 부족의 요리였나?”

“그렇다. 우리도 예전에 같이, 먹은 적 있다.”

“이탤릭이 참 좋아했는데…”

베아트릭스의 눈동자가 차가워진다.

이탤릭? 그건 또 누군데.

“아, 제 남동생 이름입니다. 살아있으면 지금쯤 산세리프랑 동갑이었겠네요.”

죽은 남동생 이름이었구나.

“푸른절벽 부족은 어떻게 된 건가? 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난 알고 싶다.”

산세리프가 조심스레 물었다.

“...재밌는 이야기는 아닌데.”

“괜찮다.”

“나도 괜찮아.”

사실 아까부터 별생각 없이 밥만 먹는 중이다. 뭘 하든 상관없다.

“...”

박수를 쳐서 깨운 오르페도 아직 잠이 덜 깼는지 깨작깨작 음식을 먹고 있었다.

“...20년 전이었어.”

그렇게 베아트릭스의 이야기는 시작됐다.

“왕국군이 우리 부족을 공격했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데 방해가 된다는 게 이유였을 거야. 우리 부족은 나름대로 열심히 싸웠지만, 뭐, 상대가 안 됐지.”

“타마나…”

방금 추임새는 산세리프가 낸 거다.

“어른들은 전부 죽었고, 아이들은 투기장으로 끌려갔어. 나와 내 동생도. 그래, 모두 노예 검투사가 된 거야.”

“투기, 장?”

산세리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투기장…몬스터나 야생동물, 노예들을 데리고 결투를 벌이게 하는 곳이에요. 잔인하고 야만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6년 전에 사라졌어요.”

오르페의 적절한 설명.

산세리프가 고개를 끄덕인 걸 확인한 베아트릭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온갖 것들과 싸웠어. 난 타고난 전사의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있었고, 운이 좋았지. 하지만 동생과 다른 아이들은 그러지 못했어.”

이런, 아주 어두운 이야기네.

밥 먹을 자리에서 할 만한 얘기가 아니다.

“동생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경기에 나가게 됐어. 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귀족에게 외쳤어. 더 열심히 싸우겠다고, 더 멋지게 이겨 보겠다고. 그럴테니 동생을 살려주라고…”

말하는 사람의 멘탈이 흔들릴 것 같은 상황에도 베아트릭스의 눈은 고요했다.

하도 많은 전투를 겪어 무감각해진 건가.

“놈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지. ‘동생이 살아 기뻐하는 널 보는 것보다, 분노에 차 싸우는 내 모습이 보고 싶다’...”

전형적인 야쿠자식 사고방식을 가진 놈이 할법한 짓이다.

그것보다 이 얘기, 계속해도 되는 건가?

신경쓰지 않고 먹고 있던 오르페의 얼굴빛도 새파랗게 질려 있다.

“그렇게 내 동생, 이탤릭은 투기장에서 온몸이 갈려나가 죽었어. 난 울지 않았어. 분노하지도 않았지. 놈이 원하는 꼴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헬베티카, 더는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미안하다. 아픈 기억일 텐데.”

이제야 행동하는 눈치 없는 산세리프.

“아냐.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베아트릭스는 진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우리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여줬다.

“얼마나 더 싸웠을까. 난 한 용병단장의 눈에 들어 팔려나갔고, 그녀 밑에서 전사로 길러졌어. 내가 어지간히 맘에 든 모양인지, 그녀는 죽기 전에 나에게 단장 자리를 넘겼지.”

그나마 좋은 사람을 만난 건가. 뭐, 온 세상에 야사요만 있는 건 아니다.

“용병단을 이끌고 계속해서 싸워나갔지. 영지전도 참여하고, 국가 간의 전쟁에도 끼어들고…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그러니 어느 날부터 세상이 날 용병왕이라 부르더라. ”

용병왕 비긴즈였군.

“적당한 때가 됐다고 생각할 때, 부하들을 이끌고 투기장으로 다시 돌아갔어. 아직도 바뀐 게 없더라. 용병단과 함께 거기 있던 노예주들과 상인들, 관리자들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다 죽였지.”

그렇단다.

평론을 하자면, ‘몽쉘크리스토 백작형 복수극은 너무 진부해.’ 정도로 할 수 있겠다.

“뭐, 내 얘기는 이 정도야. 그렇게 재밌는 얘기는 아니지?”

“헬베티카…!”

산세리프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베아트릭스를 끌어안는다.

참 감성적인 친구다.

“가족이 죽는 건 견디기 힘들죠…”

오르페는 공감대를 형상하는 것 같았다.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야.”

사실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나도 공감해주는 척했다.

“그때도 탈주닌자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그런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별 생각없이 한 말에 베아트릭스의 눈썹이 움직였다.

“탈주닌자, 요?”

“그래.”

“탈주닌자는 당신이 아닌가요?”

“탈주닌자는 칭호야. 죄 없는 선량한 백성을 수호하고, 사악한 악당들을 벌하는 사람을 부르는 칭호.”

“사악한 악당?”

“그 투기장 귀족 같은 놈 말이야.”

“죄 없는 선량한 백성.”

갑자기 입가를 비트는 베아트릭스. 뭐지?

“사악한 귀족과 선량하고 나약한 백성이라…그런 건 없습니다.”

닌?

“무신경한 강자와 비겁한 약자만이 있을 뿐이죠. 인간은 그런­”

“그건 네 생각이고.”

뭐라 더 말하려고 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동료였으니까 이번 한 번만은 봐 주지만, 개똥철학으로 탈주닌자의 철학을 모욕하는 건 안 된다.

“밥 다 먹었으면 일어나지.”

사실 아까부터 똥이 마려워서 참을 수 없었다.

배고프다고 이것저것 집어먹었는데, 상한 음식이 그중에 있던 것 같다.

“...위험한 생각이에요.”

오르페도 베아트릭스한테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고 나왔다.

좋은 지원사격이다.

자, 그럼 화장실을 들렀다 온 후, 슬슬 도착했을 용주골 닌자들이나 보러 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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