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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104화 (104/119)

〈 104화 〉 104화. 모든 시대의 평화 (4)

* * *

“후.”

쾌변 완료.

지금쯤이면 상록수 마을에 도착했을 용주골 닌자들을 지켜보기 위해 국방닌자복을 찾던 중이었다.

“수상해.”

아까부터 뭘 골똘히 생각하던 오르페가 입을 열었다.

“뭐가?”

“베아트릭스 말이야.”

“맞아. 좀 건방졌어.”

지가 뭔데 탈주닌자의 철학을…

“아니, 그거 말고.”

“그럼 뭐?”

“산세리프님을 보러 왔다 했잖아.”

“그랬지.”

“용병단 전체를 끌고 왔는데, 산세리프님을 보러 왔다고?”

“그럴 수도 있지. 용병왕 밑에 있는 애들이니 자부심도 크고 충성심도 강해서 그런 거 아니야?”

원래 충성심 강한 부하들은 대장이 가자고 하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드는 법이다.

“친동생의 죽음을 무덤덤하게 밝힌 사람이야. 그런 공허한 사람이 어릴 적 친구 하나 만나겠다고 여기까지 찾아왔을 것 같지는 않아.”

“산세리프를 많이 좋아하나 보지.”

원래 어린 시절 사귄 친구가 가장 기억에 남고 오래가는 법이다.

나만해도 아직도 이빨 나간 지민이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베아트릭스는 더 하겠지.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러 오는데 군대, 아니, 용병단을 끌고 와? 용병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사람이?”

“많이 부끄러웠나 봐.”

오르페의 얼굴이 확 구겨진다. 아니 왜 갑자기?

“...나 말 안­”

또 다시 나오는 ‘그 발언’.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것도 좋겠군.”

또 삐쳐서 입이 삐죽 튀어나오기 전에 움직였다.

뭐, 그냥 베아트릭스랑 몇 마디 하면서 떠보기만 하면 된다.

산세리프와 떠들고 있는 베아트릭스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성물이 여기 있는 게 맞다는 거지?”

“그렇다. 안전하게 보관 중이다.”

성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네.

“안녕.”

별로 중요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아 그냥 껴들었다.

“아, 로빈님. 아까는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술을 입에 대서 그런지, 무례한 말이 나왔군요.”

“신경 쓰지 마. 나도 신경 안 쓰고 있었어.”

사실 되게 신경(띠껍다) 쓰고 있었지만, 사과를 받았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 그렇다. 탈주닌자가 성물을 되찾아 줬다.”

산세리프가 싱글벙글 웃으며 꿀벌여왕 스토리를 풀어놓았다.

“성물을 되찾아 줬는데,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았다고요?”

이야기를 다 들은 베아트릭스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난 탈주닌자니까.”

“탈주닌자가 대체 뭐길래 그런 행동을…”

“말했잖아. 그림자 속에서 야사요를 무찌르며 백성을 수호한다.”

“...로빈님이 원하는 건 그것뿐입니까?”

“내가 아니라 탈주닌자가 원하는 거지.”

그게 그거지만.

“사리사욕은 전혀 없다는 겁니까?”

“그딴 건 안 키운다.”

“...탈주닌자는 왜 백성을 수호해야 하는 거죠? 무엇을 위해서?”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지.”

“로빈님은 왜 세계평화를 지키고 싶어하시는 거죠? 명예를 위해서입니까?”

존나 꼬치꼬치 캐묻네.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탈주닌자의 의무니까.”

“로빈님이 원하는 건 의무를 다 하는 거군요.”

“물론이지. 그걸 위해서는 내 목숨도 바칠 수 있어.”

그렇기에 탈주닌자는 강인한 의지와 신념을 지닌 지상 최강의 존재만 될 수 있다.

“...그렇군요. 이제 알겠네요.”

웬지 날 보는 베아트릭스의 시선이 좀 싸늘해진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그나저나, 베아트릭스. 너에게 몇 가지 여쭤볼 게 있다.”

“괜찮습니다.”

“요즘 나쁜 짓 하고 다니니?”

난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눈은 마음을 담은 창이라, 자신을 속이기가 쉽지 않다.

한 순간이라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거나, 그녀의 눈이 돌아가면, 내 탈주닌자도가 불을 뿜을 거다.

“나쁜 짓이라…감이 안 잡힙니다.”

다시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온 베아트릭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나와 눈을 맞췄다.

“뭐, 별건 아니고.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거나,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거나, 그런 짓을 말하는 거야.”

“용병 일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기억은 없습니다. 전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죠.”

그 기준 또한 베아트릭스만의 기준일 것이다.

“그렇군.”

하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원하면 단둘이서 오붓하게 고문, 아니, ‘인터뷰’를 진행해야 한다.

베아트릭스가 조금 띠껍게 굴었다고는 하나, 죽여 마땅한 야사요와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터뷰’를 진행한다면, 부처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산세리프, 난 이만 가볼게. 밥 잘 먹었어. 이제 베아트릭스랑 좋은 시간 보내렴.”

“버, 벌써 가는 건가?”

“나 바쁜 사람이야.”

“그렇구나.”

뭔가 섭섭해 보이는 산세리프.

“탈주닌자의 의무를 다하러 가시는 겁니까?”

물어본 건 베아트릭스였다.

“뭐, 그런 셈이지.”

용주골 닌자 육성 또한 중대사항이다.

“이제 옷 입고 나갈 거야. 괜히 애들 불러서 배웅하지 말고.”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사용하는 야인족 새끼들의 배웅 따위는 받아봤자 즐겁지 않다.

“알겠다. 탈주닌자, 네가 가는 길에 행운이 가득하길 빌겠다.”

산세리프의 배웅을 받으면서 오르페와 함께 야인족 부락을 벗어났다.

베아트릭스가 이끄는 버마재비 용병단은 그 옆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

날 보더니 별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차리는 용병단원들. 험악하게 생긴 게 야쿠자 뺨친다.

“그렇게 대놓고 나쁜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어떡해.”

오르페는 내 유도신문에 불만이 있는지 볼을 부풀리며 항의했다.

“보통은 쉽게 대답 못 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으면 눈이 흔들리는 게 사람이다.

“베아트릭스는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수십 년 넘게 전쟁터에서 구른 전사라고.”

“그럼 네가 가서 말하던가.”

“이제 와서 그러면 이상하잖아.”

“나 너랑 말 안 해.”

해줘도 뭐라 하면, 내가 삐칠 수밖에 없다.

“로빈…제발.”

내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쳐다보는 오르페.

“뭘 하고 싶은데?”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건 어때? 내가­”

***

“자, 충분히 쉬었으니, 가자!”

막시무스가 기지개를 피면서 목을 꺾는다.

상록수 마을에서 짐을 푼 용주골 닌자들이 출발한 건 점심을 먹은 후였다.

난 지켜보고 있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이 새끼들은 큼지막한 돼지를 통째로 구워서 먹었다.

…제자들 몰래 야식을 먹었던 사갈의 꼬리 교관들이 생각난다.

“오큘리우스! 준비됐나용!”

“웩.”

가장 많이 고기를 먹은 쪼커는 출발하기 전 상록수 마을 사람들에게 적당한 핑계를 댔다.

상회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몬스터를 소탕해야 하는데, ‘상표 없는 상회’가 고용한 용병들로 놈들을 대신 처리해 주겠다나 뭐라나.

어쩌다보니 용주골 닌자마을의 얼굴마담 겸 바지사장을 맡게 된 쪼커였다.

“보수는 따로 받지 않을거예용! 서로의 이득을 위해서니까용!”

“그러시다면야…우린 가져오신 물건만 전부 사면 되는 거죠?”

“그래용!”

“조심하세요.”

상록수 마을의 촌장 에이미가 쪼커와 닌자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꿀벌여왕 사건 당시에는 임시촌장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예 촌장직을 맡았나 보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반갑네.

“출발이에용!”

상회의 대표 역할을 맡은 쪼커가 신호를 보내고, 용병단장 역할을 맡은 막시무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야쿠자, 사무라이. 이제는 요괴군.”

“매직먼키는 예전에도 많이 잡아봤지.”

“어때?”

“스태프같이 생긴 막대기를 들고 있는 놈들은 마법을 사용해. 그놈들만 조심하면 별것 아냐.”

“마나 사용자도 있는 건 아니겠지? 매직먼키 기사라던가.”

“개소리는. 애초에 사용하는 마법도 우리가 아는 그 마법이 아냐.”

조용히 떠들면서 전진하는 닌자들.

“매직먼키들은 원시마법을 사용하죠. 저주 마법도 곧잘 사용하니 방심하는 건 좋지 않아요.”

난쟁이 닌자와 홀쭉이 닌자의 대화에 빅빵댕이가 끼어들었다.

“아, 마법사님. 저주 마법이라면 어떤 겁니까?”

“신체능력 저하 마법이라던가, 인식저하 마법을 주로 써요. 상태이상 부류의 마법을 주로 사용하니, 잘 살피고 공격을 피하는 게 좋아요.”

“알겠습니다.”

상태이상이라, 꽤 귀찮은 놈들이다. 숫자도 꽤 많다고 들었으니, 용주골 닌자들이 상대하기 적절한 수준의 적이 아닌가 싶다.

“웬디, 피터, 릴리…걱정하지 마. 놈들은 내가 전부 토막 쳐서 햇볕 잘 드는 곳에…”

눈을 미친 놈처럼 뜬 후크는 또 혼잣말하고 있었다.

“또 시작이군.”

“완전히 맛탱이가 가 버렸어.”

“야, 진정해.”

가까이 있는 닌자들이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후크에게서 멀어진다.

“장소는 알겠나?”

“아, 막시무스님.”

루녹스와 같이 선봉에 선 막시무스가 매직먼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던 닌자에게 다가간다.

예전에는 잘 나가는 추적탐색탐험모험가(추적꾼이면서 탐색가고 탐험가며 모험가라고)였다는 이 닌자는 코에 마나를 집중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녀석은 돼지나 개처럼 킁킁대며 상대의 흔적을 파악하는데 능했다.

나도 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품격이 떨어지니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이쪽 근처입니다. 매직먼키들의 냄새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막시무스가 닌자들에게 기척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낸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닌자들이 천천히 발을 놀린다.

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 뜬그림자를 펼치는 모습이 상당하다.

“...!”

순간 기립박수를 칠 뻔했네.

어쨌든, 자랑스럽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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