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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108화 (108/119)

〈 108화 〉 108화. 모든 시대의 평화 (8)

* * *

“오르페!”

도대체 뭘 했길래 시뻘건 김칫국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인가.

김치의 나라인 한국에서 온 나를 위한 특별 이벤트?

물론 오르페가 그렇게 사려 깊을 리가 없다는 건 안다.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몸이 드라이아이스처럼 차갑다.

숨소리는 또 고른 게 엄청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전설 등급 용사의 갑옷을 들춰내고(존나 힘들었다) 피가 난 곳이 어딘지 살폈다.

없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피가 새어나온 곳이 없다.

뭐지? 진짜로 김칫국물인가?

웅덩이의 빨간 국물을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서 입에 넣었다.

이 비릿한 맛은…피가 맞는데.

“산세리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세크다니다…와 투스 세크다니다…”

정신줄을 놓았는지 했던 말만 계속 반복하는 산세리프. 심지어 자기네 부족 언어로 말하는 중이다.

이러면 본인에게 직접 듣는 수밖에 없는데.

“정신 차려!!!”

오르페의 뺨을 모짜렐라 치즈 늘리듯이 잡아당겼다.

“아야앗!”

볼따구가 매직먼키 엉덩이처럼 빨개진 오르페가 벌떡 일어난다.

“멀쩡하군.”

“어딜 봐서!”

깨워준 게 매우 기쁜지 눈물까지 맺혔네.

“이런 곳에서 자면 입 돌아가.”

“안 잤어!”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버마재비 용병단원들의 시체가 한 천막 구석에 쌓여 있다.

야인족 시체는 없었다.

“이 피는 다 뭐야?”

피웅덩이를 가리켰다.

“...내가 죽인 용병들.”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지만,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어떻게 된 거야?”

따뜻해진 자신의 볼을 쓰다듬던 오르페가 목을 가다듬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

오르페는 버마재비 용병단의 앞길을 막아서면서 야인족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었다.

다수와 한 명의 싸움이었지만, 용병들은 압도적인 전투력 차이 때문에 야인족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탈주닌자는 없군.”

지금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베아트릭스가 부단장에게 눈짓했다.

“물러나!”

부단장의 명령에 천천히 뒤로 빠지는 용병들.

“탈주닌자는 어딨지? 서로 싸우기라도 했나?”

로빈의 존재를 신경 쓰느라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던 용병왕이 움직였다.

“근처에 있어. 곧 올 거야.”

오르페는 블러핑을 하면서 가까이 다가온 베아트릭스의 무장을 살폈다.

베아트릭스에게 ‘용병왕’이라는 칭호를 안겨준 마법무기인 쌍검 ‘얼음과 불의 춤’.

순간적인 가속을 가능케 해준다는 갑옷 ‘야생마의 질주’.

그 밖에도 다양한 도구로 무장한 베아트릭스였지만, 가장 위험한 건 저 둘이었다.

세간에 칠검경급이라 평가받는 강자가 바로 베아트릭스다.

그들에 비하면 비슷하거나 조금 떨어지는 오르페한테는 매우 위협적인 적이었다.

“거짓말.”

픽 하고 싱겁게 웃은 베아트릭스가 갑옷 ‘야생마의 질주’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녀의 모습이 흐릿해짐과 동시에 ‘불과 얼음의 춤’이 오르페의 방패를 향해 쇄도했다.

“큿.”

묵직한 충격에 뒤로 물러서는 오르페.

“탈주닌자는 오지 않아.”

확신하는 베아트릭스. 그녀의 검 ‘불의 춤’이 붉어지더니 불을 뿜었다.

화르륵­!

순식간에 오르페와 방패를 집어삼킨 화염. 하지만 베아트릭스는 방심하지 않고 차분히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멀쩡한 모습으로 불길을 뚫고 나오는 오르페가 보였기 때문이다.

“고대용사의 갑옷이라.”

씹어뱉듯이 말한 베아트릭스와 창기병처럼 질주하는 오르페가 맞붙었다.

창과 방패, 두 검이 궤적을 남기며 부딪힌다.

오르페보다 반 박자 빠르게 움직인 베아트릭스가 그녀의 몸에 검 ‘불꽃의 춤’을 박아넣었지만, 초월적인 갑옷의 내구도는 날붙이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역으로 오르페의 창에 뺨을 긁히고 마는 베아트릭스.

“칫.”

혀를 찬 베아트릭스의 뺨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가는 두 사람.

노련한 솜씨로 계속해서 오르페한테 타격을 가하고 있는 베아트릭스였지만, ‘얼음과 불의 춤’은 황금갑옷을 뚫지 못했다.

투구가 없다는 점을 노려 얼굴 부분을 찌르려 해도, 오르페는 방패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방어할 뿐이었다.

오르페가 입은 황금갑옷의 내구도를 시험하던 베아트릭스가 특이한 수를 쓴 건 그때였다.

펑­!

용병왕의 검 ‘얼음의 춤’이 오르페의 방패에 스스로 박히더니 터져 나갔다.

폭발은 일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이 찾아왔다.

쩌저저적.

오르페의 방패가 얼어붙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오르페는 재빨리 방패를 떨구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읏.”

오르페의 장갑과 어깨 보호대를 얼린 한기는 이윽고 멀리 퍼져나가 그녀의 갑옷 전체를 얼렸다.

순식간에 냉동 눈사람이 된 오르페.

갑옷의 보호 기능 덕분에 얼굴을 비롯한 직접적인 신체 부위는 얼지 않았지만, 갑옷이 꽁꽁 얼어붙었기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애검 하나를 바친 보람이 있네.”

베아트릭스는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을 한 채 오르페한테 천천히 다가왔다.

“야인족들을 찾아.”

“알겠습니다.”

초인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뒤로 빠져있던 용병들이 움직였고, 죽음을 각오한 오르페는 베아트릭스를 조용히 노려봤다.

서로를 마주한 두 여자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헬베티카!”

야인족들을 피신시키고 사라졌던 산세리프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성물을 숨겨놓은 장소를 알려줄게. 대신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약속하지.”

산세리프는 성물의 위치를 말했고, 베아트릭스는 용병을 시켜 가져오게 했다.

“찾았습니다!”

곧이어 용병이 성물을 가져왔다. 하얗게 빛나는 구슬이었다.

부단장이 구슬처럼 똑같이 생긴 나머지 성물 세 개를 가져왔다.

오오오오오오­

서로 빛나면서 진동하던 네 성물이 하나로 합쳐진다.

“완성했네.”

뺨에 흐르는 피를 닦아낸 베아트릭스가 다시 오르페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널 죽이면, 탈주닌자가 세상 끝까지 날 추격하겠지?”

오르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든, 죽이지 않든, 로빈은 베아트릭스가 지금까지 저지른 일 때문이라도 베아트릭스를 세상 끝까지 추격할 것이다.

“원하는 게 뭐야?”

역으로 그녀에게 질문하는 오르페였지만.

“모든 시대의 평화.”

순식간에 다가간 베아트릭스는 그녀의 목을 손날로 쳤다.

***

“...그렇게 된 거야.”

그러니까, 베아트릭스가 사실은 테러리스트 사무라이였다?

“개쌍년이 진짜.”

제육천마왕에 대항한 동료가 사실은 악당이었다니.

믿었기에 더 배신감이 크다.

“미, 미안. 내가 이겼어야 했는데.”

오르페가 고개를 떨군다.

“아니, 너 말고. 베아트릭스 말이야.”

착각, 곤란.

“아…”

“질문. 성물은 뭐임?”

꿀벌여왕의 파워업 재료였다는 거 말고 아는 게 없다.

그게 대체 뭐길래 악당 새끼가 모았단 말인가.

“성물, 네 개다. 땅과 하늘, 불과 물 다룬다. 정령들께서 만드셨다.”

대답한 건 산세리프였다. 어느새 멘탈을 잡았는지 벌떡 서 있다.

“그런 사기템이었어?”

근데 왜 꿀벌여왕은 그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 걸까?

궁금해서 산세리프한테 물어봤다.

“성물. 아무나 사용할 수 없다. 그 혐오스러운 괴물은 성물의 힘을 사용한 게 아니다. 기운만 받았을 뿐.”

“뭔 소리야?”

“비릭스의 여왕 개체는 마나가 담긴 것, 예를 들어 마법무구 같은 것을 먹고 강해질 수 있다 들었어. 하지만 마법무구의 능력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나를 흡수해서 마나량을 늘리는 것뿐이야.”

그나마 오르페의 설명이 낫다.

“성물 네 개를 모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다시 하나로 합쳐진 성물. 가지고 고대 정령의 사원 들어가면, 조종할 수 있다. 하늘과 땅, 불과 물.”

사원소를 다루는 힘을 얻을 수 있다라…

이거 잘못하다가는 넥스트 제네레이션 에코 천마가 탄생할 수도 있겠다. 어서 빨리 죽여야 한다.

“고대 정령의 사원은 어디 있지?”

“나도 모른다.”

닌?

“아니,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먼 조상께서 장소 감췄다. 위험한 곳이다.”

환장하겠네.

“그럼 베아트릭스는 어떻게 그곳을 찾는 건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코름갈드 왕국이 세워진 땅, 그 땅 어딘가에 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마 헬베티카도 그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을까.”

그럼 나는 고대 정령의 사원을 찾는 베아트릭스를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오르페.”

“응?”

잘못하다간 고래의 숨결 사건(모든 왕국 수도 개박살)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용주골 소집령을 내린다.”

지금이야말로 모두의 힘이 필요할 때다.

“전부 다 코름갈드로 간다.”

세계평화를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빡센지 닌자들도 좀 배워야 한다.

***

이르갈 왕국과 코름갈드 왕국의 국경선.

베아트릭스와 버마재비 용병단은 그곳을 몰래 가로지르려 하고 있었다.

“잠깐.”

맨앞에서 걷던 베아트릭스가 걸음을 멈추고 한 방향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벌판이었다.

“용병왕 베아트릭스.”

잠시 후, 벌판이었던 공간이 뭉개지면서 오색갑옷을 입은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경을 수호하는 기사, 환검경이다.

“오랜만이군요.”

베아트릭스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고래 마탑에서 결전을 벌일 때 만난 적 있는 두 사람이었다.

“코름갈드로 가는 건가?”

환검경이 버마재비 용병단을 슥 훑어봤다. 용병 몇 명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습니다. 잠시 볼 일이 있어서요.”

“통행증은?”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시면 안 됩니까. 급한 일인지라 받고 올 시간이 없었습니다.”

“통행증 없이는 지나갈 수 없다.”

환검경이 보라색으로 빛나는 검에 손을 올렸다.

완강한 환검경의 태도에 베아트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결정을 끝낸 베아트릭스가 갑옷 ‘야생마의 질주’의 능력으로 가속함과 동시에 환검경이 모습이 사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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