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109화. 아포칼립스 사이비 혈마 (1)
* * *
공기가 갈라지면서 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움직인 베아트릭스가 허공을 향해 ‘불의 춤’을 휘둘렀다.
챙!
다시 모습을 드러낸 환검경이 재빨리 자수정 검을 휘둘러 막아낸다. 그녀의 눈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이렇게 빨리 기척을 들킨 일은 탈주닌자와 처음 만났을 때 말고는 없었는데.
“내 감이 좀 좋아서!”
베아트릭스의 패도적인 공격이 환검경의 방어를 압도한다.
힘겹게 ‘불의 춤’을 막아내는 자수정 검에 균열이 생길 정도였다.
“...명성이 허언은 아니었군.”
기습과 교란, 암살에 특화된 환검경이었지만, 그녀는 칠검경이다.
왕국에서 가장 강한 일곱 명의 기사만 받을 수 있는 칭호를 받은 강자.
은신 기술은 탈주닌자나 절검경 제임스 본크(죽었다)를 제외하고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고, 시야 교란 기술은 왕국, 아니, 더 나아가 대륙 최고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 환검경을 베아트릭스는 정면에서 압도하고 있었다.
용병왕은 칠검경에 맞먹는 강자였다.
“...”
환검경은 사실을 받아들였고,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그녀의 오색갑옷이 빛났다.
삐리리리
기묘한 소리와 함께 환검경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주변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나타나는 것은…빨간색과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 검은색.
베아트릭스의 시야를, 아니, 주변 풍경 전체를 다섯 가지 색깔이 가득 채운다.
“우윽…”
“웩…!”
버마재비 용병단의 용병들은 갑자기 일어난 기현상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어지럽게 변한 풍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굳어버린 용병도 있었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헛구역질을 하는 용병도 있었다.
“보지 말고 눈을 돌려!”
베아트릭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환각 마법이다! 환각 마법!”
이제야 정신이 든 부단장이 넋 나간 용병들을 챙겼다.
“눈 밑으로 깔아!”
“감지는 말고!”
정신을 차린 그들이었으나, 단장을 도울 수는 없었다.
그들은 초인들의 싸움에서 도움이 될 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챙!
이제는 환검경만을 위한 지역이 된 곳에서 두 검이 부딪힌다.
챙!
불시에 날아드는 보이지 않는 검.
챙!
그에 맞서는 끝 부분이 뭉툭한 검.
베아트릭스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환검경의 공격을 차분히 받아내고 있었다.
챙!
수십 합을 겨뤘을 때, 베아트릭스의 검이 불꽃을 뿜었다.
폭염이 특정 공간을 집어삼키고.
화르륵!
“큭!”
열기를 견디지 못한 환검경이 공간에서 튀어나온다.
그녀의 오색갑옷은 불이 붙어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가속한 베아트릭스가 허리춤에 있던 단도를 꺼내 환검경의 심장에 박아넣었다.
노란색으로 손잡이가 빛나는 게 보통 단도가 아닌 듯했다.
“윽!”
짧은 외마디 소리와 함께 피가 뿜어져 나오고, 환검경은 경악한 표정 그대로 쓰러졌다.
동시에 오색공간이 사라지며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국경선.
하지만 베아트릭스를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칫.”
환검경이 시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깔끔하게 절단된 사람의 팔 하나밖에 없었다.
단도가 박히기 전 환상을 보여주고 빠져나간 게 틀림없었다.
승부는 환검경 또한 팔 하나를 미끼로 쓸 정도로 매우 급했으리라.
“어떻게 할까요?”
철퇴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는 부단장. 명령만 하면 도망친 환검경을 쫓겠다는 의지가 가득하다.
“됐어. 국경선을 넘어 코름갈드로 간다.”
환검경의 팔에 박힌 단도를 빼낸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았고, 불길한 예감은 가시지 않는다.
이유 모를 불안함과 초조함, 긴장감이 조금씩 섞이면 이런 느낌일까.
“서두르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채 모든 일이 끝나기를.
***
그리하여 난 용주골 모두를 이끌고 국경선으로 향했다.
야쿠자에게 붙잡혀 있던 사람들, 요괴들에게 사육당하던 사람들을 돌봐줄 몇 명만 빼고.
그동안 베아트릭스는 국경선을 넘어 크롬갈드 왕국령에 도착한 것 같았다.
국경선을 건너기 전 여러 범죄행위를 저지른 테러리스트 사무라이는 어느새 이르갈 왕국의 특급 수배자가 되어 있었다.
환검경 아줌마를 공격해 팔을 자르고 국경선을 넘었다나 뭐라나.
덕분에 환검경은 칠검경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채 피눈물을 흘리며 싸구려 소주를 마시는 힉힉호무리가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하다고.
“힉힉호무리는 뭐야?”
“그런 게 있어.”
아는 동네 오빠(농장주)랑 결혼한다고 했었나? 운 좋게도 그 사람의 아내가 제작년에 오렌지병으로 죽었다는 것 같다.
“오렌지병이 아니라 오랜 지병.”
“아무튼 병이잖아.”
“운이 좋았다는 표현은 또 뭐야. 사람이 죽었는데.”
“환검경 입장에서는 운이 좋은 게 아닐까?”
나이로 계란 한 판을 채운 아줌마를 받아줄 사람은 외로운 돌싱남밖에 없다.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면 안 돼. 탈주닌자 일을 할 때는 특히.”
“닌닌.”
가는 동안 심심해서 떠들고 있었는데, 오르페가 너무 날선 반응만 보여서 오히려 귀찮아졌다.
난 그냥 사갈의 꼬리 출신 커플 첩보요원 붉은고래 마탑 전투에서 트리보를 도왔다 이 가져다준 정보를 그대로 읊은 거뿐인데.
‘테러리스트 사무라이’ 베아트릭스한테 탈탈 털린 이후로 좀 날카로워진 것 같다.
패배가 잠자고 있던 오르페의 호승심과 투지를 일깨운 게 아닐까.
“통행증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국경선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상관인 환검경이 은퇴했으니 마음의 여유가 없을 거다.
“여깄습니다.”
맨 앞줄에 있던 막시무스가 왕국에서 받아온 통행증을 내밀었다.
“...검은문어 용병단. 알겠습니다. 통과시켜!”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용주골 닌자들이 만든, 아니, 검증받은 공식적인 신분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번에는 왕국 측과 협상해서 신분을 만들었다.
그쪽 정치인들도 최강전력인 칠검경 한 명의 팔을 자른 베아트릭스를 좋게 보지 않는 거겠지.
검은문어 용병단. 이름은 내가 지었다.
절대로 막시무스의 피부색과 매끈한 두상에서 따온 이름이 아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타코야끼를 용병단 이름으로 삼자고 했을 뿐이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도록.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용주골 닌자들은 병사들의 안내를 받고 가볍게 국경선을 통과했다.
[코름갈드는 오랜만이다. 어느 정도 발전됐는지 궁금하군.]
트리보가 옆에서 깔짝댄다. 온종일 즐겁게 용주골에서 무기 만들다 나오니 맛탱이가 가 버린 건가.
“안 물어봤어.”
녀석을 무시하고 용주골 닌자들의 뒤를 따랐다.
이번엔 예전처럼 뜬그림자로 몰래 따라가는 게 아닌, 같이 간다.
용주골 닌자들의 자립심을 길러주기 위해 맨 앞이 아닌 맨 뒤를 택했을 뿐이다.
“코름갈드! 예전에 공연 때문에 간 적이 있어용! 제가 안내할게용!”
“웩.”
지가 아는 게 나왔다고 신이 난 쪼커가 오큘리우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말만 하세용! 저 쪼커가 오늘만큼은 길잡이로”
“전 코름갈드 출신입니다. 저에게 맡기시죠.”
난쟁이 닌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쪼커.
‘당신은 무례해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나한테 말하지 말고, 막시무스한테 말해.”
“앗…!”
난 난쟁이 닌자의 뒷덜미를 잡고 다시 앞으로 보냈다. 하이디랑 쎄쎄쎄하기 딱 좋은 키다.
이건 내 임무면서 용주골 닌자들의 임무다.
특수상황이 된다면 내가 직접 지휘하겠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막시무스가 용주골을 통솔하는 게 낫다.
“수도 쪽으로 바로 간다.”
막시무스가 용주골 전체에 명령을 내렸다.
정확히는 새로 만들어진 수도다. 이르갈 왕국의 수도처럼 코름갈드의 원래 수도도 고래의 숨결로 날아갔다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코름갈드의 수도로 가는 건 아니다.
코가는 이가에서 도망친, 아니, 코름갈드는 이르갈에서 도망친 특급 범죄자를 잡는데 협력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우리도 힘들다며 반대했지만, 이르갈 쪽에서 내 이름을 팔아넘기니 쉽게 허락해줬다 하더라.
혈마법으로 베아트릭스를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도 했었지. 예전에 만난 가부키녀 때문에 신뢰는 가지 않지만, 뭐,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고라니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
아무튼 지금은 그런 상황이다.
“아, 저곳이 예전의 수도인 성혈령입니다. 코름갈드의 왕족들과 루베나르교의 고위 성직자들만 살았던 곳이죠. 우린 옆길로 가면 됩니다.”
며칠 후, 목표 장소에 도착한 난쟁이 닌자가 설명을 시작했다.
“닌?”
예전 수도라고 해서 쳐다봤는데, 땅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돔 형식의 구조물만 보였다. 저래선 햇빛도 못 볼 것 같은데.
돔 밑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가득했는데, 표정이 급똥 직전일 정도로 비장감 넘치는 게 경비를 서는 게 아니라 전쟁 준비를 하려는 것 같았다.
“저건 왜 저렇게 생겼지?”
“코름갈드는 종교국가입니다. 그들이 숭배하는 혈신 루베나르는 태양을 싫어합니다. 경전에 태양을 가까이하지 말라 적었을 정도로요. 그래서 성직자들과 왕족들은 태양을 보지 않습니다. 종교의 전통에 따라 수도를 지은 셈이죠. 아, 물론 랜턴과 마법이 있어 생활에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원하지는 않았는데. 쓸데없는 것에 열심인 난쟁이다.
“수도는 고래의 숨결로 박살났잖아. 왜 돔은 그대로지?”
“새로 왕위에 오른 국왕의 명령으로 파손된 부위를 매꿨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니 돔에 땜빵 자국이 있었다. 고래의 숨결에 파괴된 돔을 어떻게든 원상복귀 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인가.
“새로운 왕이라.”
코름갈드 왕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전부 수도에 살았기에 고래의 숨결을 정통으로 맞았다. 결과는 뭐, 전멸이겠지.
새로운 왕가가 들어서기에는 충분한 상황이다. 오르페를 제외한 왕족이 전부 죽은 이르갈 왕국처럼 말이다.
“그렇군. 근데 왜 수도를 바꾼 거지?”
돔까지 고쳤으면 다시 거기서 살면 되는 거 아닌가.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만…불안해서가 아닐까요? 대량학살이 벌어졌던 곳이니까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혼령이 되어 나타날 거라 생각했을지도요. 그냥 종교적 상징물로 남겨두겠다, 그런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사이비 나라의 국왕다운 생각이다.
다시 돔이 복원된 ‘코름갈드의 전 수도’를 지나쳐 새로운 수도로 향했다. 드디어 도착한 수도의 모습은…음, 개발도상국의 평범한 도시 같았다.
“검은문어 용병단입니다. 얘기는 들으셨겠죠.”
“뭐, 네. …그, 탈주닌자님은 계십니까?”
막시무스와 대화를 나누던 수도 경비대장이 두리번거렸다. 다급해 보이는 표정이다.
“여깄다.”
일단 앞으로 나섰다. 하루종일 마차 안에서 떠들기만 해서 그런지 피곤하고 졸립다.
빨리 끝내고 잤으면.
“아…탈주닌자님. 국왕님께서 긴밀히 할 얘기가 있다고 하십니다.”
뭐?
“정말 긴밀한 얘기라서, 혼자 오셔야 합니다.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또 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