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110화 (110/119)

〈 110화 〉 110화. 아포칼립스 사이비 혈마 (2)

* * *

코름갈드 병사들의 안내로 찾아간 개인 숙소.

세면을 마친 오르페는 배낭에서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평범한 양피지가 아니라, 그녀의 갑옷과 무기에 묻어 있던 베아트릭스와 버마재비 용병단의 피를 닦아낸 양피지다.

놈들의 피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원한이 커 직접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다.

크롬갈드 왕국 측에서 혈마법을 사용해 주겠다고 해서 소지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갑옷을 닦지 않은 채 아공간으로 보낸 게 다행이었다. 정확히 따지면 닦을 힘도 없을 정도로 지쳐서 그랬던 거지만.

“근심이 많으시군요.”

오르페와 같은 방을 쓰는 마법사가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로빈이 빅빵댕이라고 부르는 여자다.

“그래 보이나요?”

픽 웃은 오르페가 양피지를 접고 배낭 안에 넣었다.

근심이라, 있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전체적인 상황이야 어쨌든 결국 베아트릭스를 막지 못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지나간 일에 미련을 버리기란…쉽지 않죠.”

오르페 옆에 앉은 마법사가 차를 들이켰다.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오르페의 코를 자극했다.

케모타일 차였나? 아멜리아 홀이 하녀인 아달리를 시켜 대접하려던 적이 있었다.

로빈, 오르페와 같은 사갈의 꼬리 출신이었던 아달리가 겁을 먹고 도망가서 결국 마시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제가 벨더가드 사무초에게 마법을 가르쳤습니다.”

“네?!”

뜬금없는 고백에 당황한 오르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벨더가드 사무초.

붉은고래 마탑의 4급 직원이자, 오르페의 가족을 잔인하게 죽인 이계인 혼혈이다.

붉은고래 마탑 전투에서 직접 죽인 원수이기도 하고.

아직도 그녀의 집에는 박제해놓은 벨더가드의 머리통(늑대)이 장식품처럼 걸려 있다.

­ 작품명은 ‘뽀삐 더 헬하운드’로 하자.

로빈은 예전에 기르던 애완견이 생각난다고 좋아했었지.

“똑똑하고 총명했지만,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자였습니다. 자신이 몬스터 혼혈이라는 것에 큰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죠.”

이미 지나간 일이고, 원수도 갚았다. 오르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깊은 사이였나요?”

“미래를 꿈꾼 적이 있었죠.”

“음.”

보통 깊은 사이가 아니었다는 뜻인데.

“자기혐오에 빠져 있던 그를 돕기 위해, 전 마법을 가르쳤습니다. 마나 사이의 결합, 생명체 사이의 파동…세계의 경이 앞에서 개인은 작디 작은 존재죠. 그가 마법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길 바랐어요.”

“실패했군요.”

마법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거대한 것에 사로잡히더군요. 그때야 깨달았죠. 그에게 필요했던 건 자아 성찰을 위한 시간도, 몰두할 일도 아닌, 숭배할 대상이었던 거에요.”

“...”

“전 수십 년 동안 잘못을 곱씹으며 마법에 몰두했어요. 벨더가드가 죽었고, 붉은고래 마탑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죠.”

이후 마법사는 더 많은 말을 했지만, 오르페의 귀에 들어오는 단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반쯤은 멍을 때리고 있던 그녀였다.

“...그러니 증오하는 것을 파괴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게­”

“그렇군요.”

오르페는 마법사의 말을 끊고 벌떡 일어났다. 조금은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네, 네?”

“제가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

가족을 잃은 원통함과 괴로움은 벨더가드를 죽이면서 많이 해소됐다.

이 분노와 원통함 또한 베아트릭스를 죽이면 해결되리라.

고통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라. 로빈이 예전에 했던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이미 누군가에게 물들어버린 오르페였다.

***

“당신이 탈주닌자입니까.”

적어도 일주일째는 편하게 못 잔 것 같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네가 국왕인가?”

“그렇습니다.”

30대 중반 정도일까. 다크서클 가득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보다는 철학자나 방콕형 과학자에 어울리는 생김새다.

“왜 날 불렀지?”

발이랑 베이비 신노빈을 닦고 자야 할 시간에 이렇게 불러내다니. 좋은 말이 나갈래야 나갈 수가 없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성혈령에 대해 아십니까?”

“그게 뭐지?”

“성혈령은 우리 왕국의 수도 역할을­”

“물론, 알고 있다.”

이제서야 떠오르는 난쟁이 닌자의 설명. 이 새끼가 설명만 더 잘 해줬어도 바로 기억났을 텐데.

“...전 수많은 경쟁자를 무찌르고 지금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누군가는 왕위에 올라야 이 지긋지긋한 내전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죠.”

부터 시작한 국왕의 말은 수도가 파괴된 이후로 권력층이 갈라져 여러 내전이 있었고~ 전부 이겨냈지만~ 백성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줄 방법은 없었다~ 까지 계속됐다.

이딴 게 본론?

“그렇군.”

“고심 끝에 성혈령을 다시 짓기로 했습니다. 왕국의 상징이자 루베나르교의 성지였던 성혈령을 재건하면 민심과 국가의 안정을 다시 얻을 수 있다 생각했죠.”

“그래서?”

“우선 성혈령 안에 있는 루베나르교 대성당의 정원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전 왕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시신을 묻었습니다. 혈신께서 보우하셨는지 짐승이 파먹은 흔적은 없더군요.”

“그렇구나.”

고래의 숨결로 바싹 구워진 시체? 내가 쥐새끼라도 그딴 건 안 먹는다.

“그다음은 건물을 재건했습니다. 파괴되거나 무너진 건물이 많았지만, 다행히도 건물 설계도를 가진 건축 마법사들을 데려왔기에…”

대충 몇 개월 동안 막노동을 한 끝에 도로나 건물을 복원했거나 다시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랬었군.”

슬슬 졸린데.

“재건된 성혈령은 왕족과 고위 성직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땅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땅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멋지군.”

“마지막으로 하늘을 가릴 돔만 덧대면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완벽한 재건의 현장을 눈으로 보기 위해 여러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성혈령 안으로 들어왔죠.”

“...씁.”

살짝 졸았다.

“저 역시도 많은 병사와 함께 광장으로 가 지켜봤습니다. …재앙은 갑작스레 찾아오더군요. 이변은 돔 완성이 끝난 직후 찾아왔습니다.”

“자세히 얘기해봐.”

재앙.

그 한 마디에 잠이 확 달아났다.

“공동묘지에 묻었던 시체들이 관을 부수고 일어났습니다. 그냥 움직이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시체들이…사람을 공격해 잡아먹더군요.”

“흡혈귀?!”

흡혈귀. 언데드 계열의 요괴다.

죽기 전에 요괴의 피를 마신 사람은 대부분 흡혈귀가 된다.

이렇게 들으면 하찮은 반인반요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식인 자체가 목적인 요괴들과는 다르게 흡혈귀들의 궁극적 목적은 영생.

단기적인 목표가 아닌 장기적인 목표가 있기에 녀석들은 대부분 가방끈이 길었고, 긴 만큼 머리를 잘 굴릴 줄 알았다.

분명 뎃셈이나 뺄셈, 나눗셈도 잘하겠지.

“빠져나오는 즉시 성혈령을 폐쇄했고, 쓸데없는 소문이 나지 않도록 입단속을 철저히 했습니다. 성혈령 앞을 지키는 병사들의 수도 몇 배는 늘렸고요. 저와 귀족들은 며칠만 지나면 이 끔찍한 일도 끝나리라 믿었습니다. 시체인 그들은 언젠가는 썩게 되어 있으니까요.”

“놈들은 썩지 않는다.”

요괴의 피로 부활한 자들은 더는 ‘생명체’가 아니다. 요술로 만들어진 악령이라 부르는 게 더 정확하다.

“...탈주닌자님은 놈들을 잘 아시는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시체들은 썩지 않았어요. 오히려 물어뜯은 사람들을 감염시켜 수를 늘리더군요.”

“그게 녀석들의 방식이다.”

“놈들은 잘 훈련된 병사보다 빠르고, 강인합니다. 창과 칼로 몸을 난자해도 잘 죽지 않아요. 지금이야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지만, 결국 패배하는 건 우리 병사들일 겁니다.”

초라한 왕좌에서 일어난 국왕이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제 알량한 권력을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성혈령이 이계에서 온 괴신(모니카)의 공격을 받은 이후로 고통과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아지겠지요. 사랑하는 제 조국 코름갈드가 망령들의 공격으로 무너지는 건 막고 싶습니다. …부탁합니다. 당신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아예 머리까지 박은 국왕의 눈에서 눈물이 질질 흘러내린다.

수치심 때문일까? 아니면 절박함?

백성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대가리를 박을 수 있는 왕이 얼마나 될까.

이놈이 폭군인지 명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기 쉽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아직도 성혈령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원군을 수도 없이 보냈지만, 결과는 항상…”

흡혈귀들이 득실거리는 그 공간에 살아있는 백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고위 성직자가 전부 죽고 망령이 되어 고위 혈마법은 사용하지 못한다, 그래도 최대한 많은 혈마법사들을 불러 베아트릭스를 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 , ‘내 즉위 기간에는 침략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 서약하겠다’ 등 많은 보상을 약속해주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코름갈드 국왕.”

흡혈귀를 한 번에 모조리 없애려면 성혈령을 통째로 날려버려야 한다.

그걸 가능케 할 인술은 현재 ‘궤도 폭격의 술’ 단 하나뿐.

지금 여기서 내 궁극기를 소모하면, 한 달 동안은 쿨타임 때문에 사용하지 못한다.

가장 강력한 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

용병왕 베아트릭스.

녀석이 얼마나 더 강해질지도 모르고, 얼마나 더 빨리 고대 정령의 사원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일단은 ‘궤도 폭격의 술’을 비축해두는 게 효율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베아트릭스를 잡고 난 후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탈주닌자가 위기에 처한 백성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애초에 효율성이나 논리성을 따졌다면 탈주닌자나 지상 최강의 사나이 같은 건 노리지 않았을 거다.

“내가 돕겠다.”

전성기 때보다 좀 약해졌지만, 뭐 어떤가.

난 천마까지 쓰러뜨린 탈주닌자,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천마, 심마, 혈마.

이 세 가지 맛 씹새끼들만 갑자기 성혈령에서 튀어나오지 않으면 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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