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111화. 아포칼립스 사이비 혈마 (3)
* * *
용주골 닌자들을 전부 성혈령 앞으로 소집했다.
내 궁극 인술인 ‘궤도 폭격의 술’만 성혈령에 발사하면 끝나는데 뭐 하는 짓이냐고?
나라고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겠는가? 성혈령 안에 백성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안에 있는 사람들부터 구하고 발사하기로 이미 말을 맞췄다.
“마지막 시험이다. 흡혈귀로부터 백성을 구하라.”
“”닌닌!””
씩씩하게 대답한 용주골 닌자들이 경비병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성혈령으로 입장했다.
따라가 ‘엿보기’를 하고 싶지만, 이번만큼은 참아야 한다.
쓸데없는 짓에 힘을 빼다간, 써야 할 때 쓰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오르페도 같은 이유로 성혈령에 들어가지 않는다. 베아트릭스랑 싸우면서 마나를 많이 소모해서, 조금 쉬어야 한다고.
괜찮다. 흡혈귀를 따돌리고 백성을 구하는 것쯤은 우리 용주골 닌자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 갔다 오겠다. 이변이 생겼을 경우, 목걸이로 연락하겠다.]
아, 트리보 새끼도 닌자들이랑 같이 가기로 했다. 별 전력은 안 되겠지만 일단 불사신이고 고철이라 흡혈귀한테 물려도 문제없다는 점에서 편리하다.
“알겠어.”
목걸이를 찬 오르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낡고 디자인 구린 저 목걸이는 디아나의 언니인 라미나의 유품임과 동시에 트리보와 장거리 전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하급 아이템이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트리보까지 성혈령에 입장했고, 성문이 닫혔다.
타타탓!
난 성혈령을 감싼 돔을 타고 올라갔다.
“어엇…?”
깜짝 놀란 경비병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멀어진다.
닌자들이 백성을 모두 구출해낸 후 무사히 빠져나오면, 바로 궁극 인술을 써야 한다.
효과적이고 확실한 흡혈귀 구역의 파괴를 위해서 적절한 위치를 잡고 있을 뿐이다.
루녹스와 막시무스, 하이디.
…잘 해주겠지?
엿보기로 용주골의 활약을 지켜보지 않은 적은 처음이라 살짝 걱정되는데.
***
“이제부터 위험합니다.”
앞서 걷던 경비 하나가 막시무스를 멈춰 세우고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된 방벽을 가리켰다.
“보이시죠?”
나무 판자나 바위 같은 잡다한 것을 이어붙여 만든 방벽.
수백은 되는 경비들이 그 방벽 위에서 봉을 휘두르며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키에에에!
시체들은 성대가 망가졌음에도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뼈밖에 안 남은 손으로 방벽을 긁고 있었다.
문제는 놈들의 동작이 느리지 않다는 거였다. 보는 사람도 정신이 없을 정도로 민첩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녀석들은 시체보다는 개구리나 광견병에 걸린 짐승에 가까웠다.
“저게 흡혈귀입니까. 끔찍합니다.”
루녹스가 눈을 찌푸렸다.
“이치에서 벗어난 생명체군요.”
“악몽에서나 나올 법하게 생겼어용.”
빅빵댕이와 쪼커가 한 마디씩 거들었다. 오큘리우스는 쪼커 도복 앞섬에 꼬리만 내밀고 있었는데, 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걸로 보아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소문으로도 접한 적이 없던 요괴를 본 용주골 닌자들의 표정이 진지해져 간다.
“그러니까, 저놈들을 헤쳐나가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백성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까?”
난쟁이 닌자가 질린다는 듯이 혀를 찼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토벌대도 데려와야지. 겸사겸사 뒤진 놈들도 좀 더 찢어놓고.”
후크는 반질반질하게 닦아놓은 닌자클로를 점검했고.
“...살아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요. 평범한 사람들은 피해서 달아날 수 없겠는데요.”
하이디는 걱정을 토해냈다.
“경비들이 시선을 끌기로 했다. 우린 뜬그림자로 들어가면 돼. 생존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살펴본다.”
막시무스는 그들 전부를 통솔하면서 방벽 밑으로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
왠만한 야생동물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시체들이 쫙 깔린 거리.
폐허가 된 도시에서 움직이는 건 붉은 눈을 번뜩이는 망자들뿐이었다.
방벽에서 성혈령의 모습을 지켜보던 닌자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쪽이다! 저주받은 괴물 새끼들아!”
“그렇게 사람이 먹고 싶더냐! 와서 잡아 보아라!”
동쪽 끝에 있는 방벽이 열렸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흡혈귀들이 무장한 경비병들한테 손을 뻗친다.
용주골 닌자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가자.”
막시무스가 망설임 없이 방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이어서 루녹스가, 후크가, 빅빵댕이가 뛰어내렸다.
타탓!
모든 용주골 닌자들이 성혈령 안으로 들어와 뜬그림자를 시전했을 때, 트리보는 크고 둔한 몸을 절그럭거리며 움직이다 추락하듯이 떨어졌다.
[으아아악]
깡!
피범벅이 된 땅바닥과 입맞춤을 한 트리보가 여섯 조각으로 쪼개진다.
통!
키에에엑!
고철로봇이 떨어지면서 낸 소리가 흡혈귀들의 시선을 잡아끌 때였다.
“트리보 님, 그럼 우리는 가보겠습니다.”
작게 속삭인 막시무스가 용주골 닌자들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역시, 청각이나 후각은 망가졌군. 작동하는 건 시각뿐인가.]
트리보는 흩어진 자신의 신체 부위를 물고 뜯고 공격하는 흡혈귀들을 담담히 지켜봤다.
경비병이 1차로 시선을 끌고, 2차로 트리보가 시선을 끄는 사이 용주골 닌자들이 성혈령에 들어선다.
작전은 성공했다.
트리보의 예상대로 흡혈귀들은 뜬그림자를 알아챌 수 없었다.
[루베나르와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하다.]
트리보는 감시자가 지배했던 고대에 만났던 한 여자를 떠올렸다.
아니, 여자라는 성별로 꼭 집어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만날 때마다 항상 다른 성별과 육체로 용사 일행을 맞이했다.
10대 소녀의 모습인 적도 있었고, 20대 청년, 50대 아줌마, 심지어 70대 할머니의 모습인 적도 있었다.
언제나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던 루베나르의 종족은 트리보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걔, 진조 아냐? 일본 만화에서 자주 나오는 애들인데…
고대용사 김성훈이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진조. 뱀파이어(흡혈귀)라는 상상 속 존재의 상위종이라 한다.
다른 뱀파이어한테 피를 빨리면서 종족이 바뀌는 일반 뱀파이어들과는 다르게 태어났을 때부터 뱀파이어인 존재인데, 순혈인만큼 일반 개체보다 빠르고 강하다고.
[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트리보의 조각들이 흡혈귀들을 밀어내더니 하나둘 조립되기 시작한다.
더욱 격렬히 공격을 가하는 흡혈귀들이었지만, 트리보의 내구도를 뚫을 수는 없었다.
[근력은 보통.]
잘 훈련된 기사가 맹공을 퍼부었으면 트리보의 강철 육체에도 손상이 갔겠지만, 이들의 공격은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텅!
트리보가 강철 주먹으로 흡혈귀 한 명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박살나는 흡혈귀의 머리.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풀썩 주저앉은 흡혈귀였지만, 다시 꿈틀거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치이이이
박살난 흡혈귀의 골통이 연기에 휩싸인다.
[재생력은 높고.]
트리보는 이런 광경을 자주 봤다. 루베나르의 파손된 신체 부위가 재생할 때도 연기가 솟아났다.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이었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딴죽을 걸 수는 없는 해괴한 상황이었달까.
태연하게 움직이면서 자신들을 분석하는 트리보의 모습이 화가 났는지 더욱 달려드는 흡혈귀들.
매점에서 가장 잘 나가는 베스트빵인 ‘핫 더블 소세지빵’을 구하지 못한 빵셔틀을 응징하는 일진들의 발길질과 같은 공격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트리보는 침착할 뿐이었다.
[변신은 못 하는 건가?]
트리보의 기억 속에 있는 루베나르는 변신도 곧잘 했다. 다른 이계인의 모습뿐만 아니라 식물의 모습까지 취하기도 했던 그다.
그렇지만 루베나르의 아류작 같은 이 흡혈귀들은 그런 능력까지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변이 일어난 원인을 알아봐야겠군.]
혼자서 있기 외로운지 열심히 혼잣말하던 트리보는 대성당이 있다는 방향으로 향했다.
트리보가 성혈령에 온 이유. 흡혈귀들의 시선 끌기도 있지만, 왜 이런 일이 터졌느냐에 대한 조사 때문도 있었다.
통하지 않는 공격에 지친 흡혈귀들도 하나둘씩 떨어져 갈 무렵, 트리보는 대성당 문을 열었다.
퍼걱!
‘열기’보다는 ‘강제로 들어가기’에 가까웠다. 낡고 금이 간 문이 트리보의 손길이 닿자마자 불길한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기 때문이다.
흡혈귀들조차 잘 들어오지 않는지 거미줄이 쳐진 대성당에는 한 사람의 조각상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루베나르교의 혈신, 루베나르 루베드 루베스의 신상(??)이었다.
얼굴이나 체형조차 불분명하게 만들어진 신상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송곳니가 두드러져 있었다.
[루베나르, 네 짓인가?]
물론 대답은 없었다.
수백년이 흘렀고, 별다른 소식도 듣지 못했지만, 트리보는 왠지 루베나르라면 지금까지도 살아있을 것만 같았다.
[그랬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대성당을 둘러보던 트리보는 모든 일이 시작된 공동묘지로 자리를 옮겼다.
마구 파헤쳐진 공동묘지에는 죽은 잡초와 흙, 파손된 관짝만 가득했다.
관을 이리저리 만져보던 트리보는 빠른 결론을 내렸다.
[모르겠다.]
성혈령에 입장하기 전 방벽 위에서 이미 흡혈귀들의 영혼을 확인했던 트리보였다.
불길한 그림자가 흡혈귀들의 영혼을 휘감고 있었지만, 그 그림자의 주인은 알아낼 수 없었다.
대성당은 루베나르 본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고, 흡혈귀들은 목적 없이 눈앞에 움직이는 물체들을 공격하기만 했다.
누군가의 계획이나 음모가 아닌,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나?
[인공두뇌가 손상됐기 때문인가.]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다. 어쩌면 용주골에서 쇠만 종일 두드려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
트리보는 로빈의 험담을 하면서 계속 대성당 주위를 맴돌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