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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112화 (112/119)

〈 112화 〉 112화. 아포칼립스 사이비 혈마 (4)

* * *

닌자들은 어딘가에 있을 생존자를 찾아 헤맸다.

그냥 무작정 헤맨 게 아니라 경비들이 넘긴 지도를 보고 갔지만, 생존자들이 어딨는지 유추하기란 쉽지 않았다.

‘저놈들이 빠르고 날렵하기는 하지만 공중을 날지는 못합니다. 가장 높은 건물부터 확인하죠.’

일단은 빅빵댕이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눈에 들어오는 높은 건물마다 직접 올라가 확인했지만, 생존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있는 건 파손된 문과 이리저리 어질러진 물건들, 사방에 뿌려진 피 뿐이었다.

‘날지는 못해도 계단을 사용할 줄 아나 봐. 헛짚었네.’

흡혈귀들이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걸 본 적이 없던 이유는 그 위에 생존자가 없어서였다.

‘서쪽에 있는 곡물 창고는 어떨까요? 아까 설명 들어보니까 금속으로 만들었다는 것 같던데. 문도 튼튼하고 식량도 있으니 버티기엔 딱 맞잖아요.’

후크의 말도 일리가 있어서 따랐다.

하지만 서쪽 곡물 창고의 강철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곡물은 텅 비어 있었다.

확인을 마친 막시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건 오히려 좋은 징조다. 곡물이 전부 사라졌어. 어딘가에 있는 생존자 무리가 식량을 가져간 거야.’

그렇다면 그 생존자 무리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닌자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식량을 가져갔을까요? 평범한 사람들이 저렇게 날랜 괴물들을 상대로 빠져나갈 수는 없을 거 같은데.’

‘토벌대가 날뛰면서 흡혈귀들의 이목을 끌 때 식량을 가져온 건 아닐까? 놈들의 시야가 넓지는 않아.’

‘아니, 토벌대랑 같이 싸워서 빠져나갈 생각은 안 하고 기회 삼아 식량이나 가져갔다는 말입니까? 그런 놈들을 구할 가치가 있어요?’

‘상황이 어떤지 모르잖아. 생존자 무리가 왔을 때는 이미 토벌대가 전멸에 가까운 상황에 부닥쳤을 수도 있지.’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쓸데없는 망상 하지 말고 생존자들이나 찾아보자고.’

뭐가 됐든 아직도 생존자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닌자들은 뜬그림자를 펼친 상태에서 성혈령을 돌아다녔다.

마나가 부족해 뜬그림자를 계속 펼칠 수 없게 된 자들은 아까 본 서쪽의 곡물 창고로 향했다. 쪼커와 후크, 하이디가 그들 중에 있었다.

축생까지 포함하자면 쪼커의 품속에서 숨을 죽인 채 숨어 있었던 오큘리우스도 같이.

‘기척이 느껴집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탐지를 위해서인지 땅거미처럼 기어 다니던 루녹스가 벌떡, 아니,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녀의 손가락은 땅바닥을 향해 있었다.

막시무스가 물었다.

‘기척?’

‘소란스럽게 움직이지 않는 걸로 보아 흡혈귀는 아닙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꿈틀거리듯이 움직입니다.’

‘수는 얼마나 됩니까?’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꽤 많습니다.’

생존자들이 지하에서 살아가는 광경을 생각한 막시무스가 고개를 휘저었다.

잘 씻지도 못한 채 숨죽이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입구를 찾아보죠.’

‘알겠습니다.’

막시무스와 루녹스는 아직까지 쌩쌩한 닌자들을 이끌고 지하로 통하는 문을 찾았다.

다행히도 지하통로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창문이 다 깨지고 문이 박살이 난 집의 지하창고였다.

‘이쪽 같습니다. 손을 대어보면 바람이 느껴집니다.’

‘규모가 꽤 큰 것 같은데요. 단순한 집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이런 지하창고가…’

‘새로 만든 건물은 아니고, 아마 성혈령 시절부터 있었던 대피소 같습니다.’

‘이상한 실험을 하던 연구소였을 수도 있죠.’

마지막 말을 한 사람은 빅빵댕이였다.

붉은고래 마탑이 무너진 후 도망친 잔당들을 추적하던 그녀는 숨겨놓았던 비밀 연구소들을 찾아냈고, 파괴했다.

오래된 도서관의 밀실, 아카데미의 기숙사 밑, 심지어 수용소의 고문실까지.

이르갈 왕국 곳곳에 암세포처럼 퍼져 있던 연구소들은 항상 의외의 장소에 있었다.

루녹스는 조심스럽게 문에 귀를 대었다. 속삭이는 소리가 아직도 들려온다.

수화 또는 입 모양으로 의사소통을 주고받으면서 뜬그림자로 온 닌자들이라 생존자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똑똑.

고민 끝에 루녹스가 지하창고의 문을 두드렸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세기였다.

“...”

정적이 찾아온 건 순식간이었다.

사람이 움직이면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용주골 닌자들은 생존자들이 마음을 정하기 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삼사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맨 앞에 서 있던 루녹스의 옷차림을 흩어본 노인이 속삭였다.

‘...토벌대는 아니군요.’

루녹스는 정석대로 원리원칙을 지키며 탈주닌자와 용주골, 닌자를 소개했다.

다른 건 몰라도 탈주닌자의 명성은 대단했기에 노인은 안심한 듯이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식량창고가 비어 있던데, 어떻게 나갔다가 돌아오신 겁니까.’

‘며칠 전에 이 부근까지 토벌대가 들어선 적이 있습니다. 남은 사람들을 모아 탈출을 시도했지만, 보시다시피 실패했죠. 한 기사님이 놈들의 이목을 끌어 우리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식량은 그때 챙겼습니다. 다른 토벌대원분들도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다른 생존자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예전에는 몇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다 죽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여기 말고는 버틸 곳이 없거든요.’

루녹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노인 뒤의 생존자 무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륙십 명은 될까. 전투와는 무관한 몸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단련된 몸을 가진 사람들도 조금 되었다.

‘성혈령 바깥까지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토벌대에 참가하셨던 분들은 무기를 들고 따라와 주십시오.’

성혈령을 벗어나기 전까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게 루녹스의 생각이었다.

이윽고 나갈 채비를 마친 생존자 무리가 땅 위로 올라왔다.

휴식을 취하려 서쪽 곡물 창고에 간 자들까지 부른 용주골 닌자들은 허리춤에 찬 보급형 닌자도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 많은 인원을 뜬그림자를 펼친 상태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몸집이 오큘리우스처럼 작은 사람이라면 한 명씩 안고 갈 수 있었으나, 생존자들은 대부분이 성인이었다.

…흡혈귀들을 정면에서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동합시다.’

막시무스의 지휘에 따라 모두가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전투는 필연적이지만, 처음부터 눈에 띌 필요는 없었다.

지하창고가 있던 집을 빠져나와 몇 걸음쯤 걸었을까.

짐승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흡혈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빠르게 튀어 나가 백룡검을 휘둘러 놈들의 머리통을 잘라낸 루녹스였지만,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다른 쪽에 있던 흡혈귀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온 흡혈귀들은 머리통이 잘렸다고 해서 죽지 않았다. 그들은 잘린 부위에서 불길한 연기를 내뿜더니 다시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태워 죽여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닌자들과 함께 흡혈귀들을 막아내던 후크가 소리쳤다. 불사신에 가까운 요괴들이기에 그게 아니면 효과를 보지 못할 것 같았다.

빅빵댕이가 스태프 끝으로 불꽃을 피워올렸다.

“제압한 후 한 곳으로!”

빅빵댕이의 말을 대충 알아들은 닌자들이 흡혈귀들의 머리나 가슴을 찌르고 바닥에 집어 던졌다.

여러 층으로 쌓인 흡혈귀들을 향해 빅빵댕이가 스태프를 휘둘렀다.

화륵­!

흡혈귀들에게 옮겨붙은 불이 타오른다. 인간이 타는 끔찍한 냄새와 함께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안심할 때가 아니다! 계속 몰려오고 있어! 움직여!”

쌍도끼를 휘두르며 흡혈귀들의 이동을 막던 막시무스의 명령에 닌자들이 움직였다.

“웩?”

그 와중에 한 흡혈귀한테 뒷발로 독을 투여한 오큘리우스였지만, 놈들에게는 신경독이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성제라도 맞은 듯이 더 발광할 뿐이었다.

“그냥 이리 와서 안겨용!”

“웩~!”

다시 쪼커의 품 안에 안긴 오큘리우스.

이 난전에서 그나마 여유로운 건 하이디였다.

츄속!

“우와악!”

하이디를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오던 흡혈귀가 검은 촉수에 꿰뚫렸다.

촉수에 꿰뚫려 대롱대롱 매달린 녀석은 이놈 하나가 아니었다. 벌써 수십은 되는 흡혈귀들이 하이디를 공격하다 제압당해 감나무에 매달린 감 신세가 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하이디의 앞을 가로막는 생체 방패가 된 녀석들이 다른 흡혈귀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 있던 것이다.

“아, 안 보여요! 도와주세요!”

문제가 있다면 생체방패들이 하이디의 시선을 가려버려 용주골 닌자들과 생존자 무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는 것 정도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요!”

다른 닌자들도 바쁘게 싸우고 있는 와중이었기에 하이디는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어우…”

흡혈귀들의 몸을 꿰뚫었던 촉수는 예전과는 다르게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힘차게 꿈틀거리는 촉수들의 모습은 오히려 흡혈귀로부터 생기를 빨아먹는, 그런 불길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탈주닌자님이 곁에 없어서 그런 거야.’

하이디는 잔다­르칸의 통제력이 약해진 이유가 그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곁에(제 딴에는 몰래) 쭉 탈주닌자님이 있었기에 잔다­르칸이 기를 펴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 히히히히…

잔다­르칸의 목소리마저 작지만 확실히 들려온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죠…?”

답을 알려줄 사람이 주위에 없단 걸 알고 있는 하이디였지만, 그래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 끼히히히히히…

잔다­르칸의 목소리가 점점 다가오듯 커졌고, 수십 개로 뻗어 나간 촉수들은 붉게 물든 채 꿈틀거린다.

악몽과도 같은 상황.

“어우…”

오랜만에 찾아온 공포에 새파랗게 질린 하이디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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