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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113화 (113/119)

〈 113화 〉 113화. 아포칼립스 사이비 혈마 (5)

* * *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하이디는 안데스 마을을 떠올렸다.

안데스. 여름과 겨울밖에 없는 마을이다.

여름은 그나마 선선한 편이지만, 겨울이면 물을 뿌리자마자 얼음이 될 정도로 추웠다.

안데스 마을의 주 특산품은 감자였다. 특산품이라 불러도 될지 모를 정도로 평범한 맛과 크기였으나, 마을 사람 대부분은 농부였고, 감자를 길렀다.

하이디는 어렸을 때부터 감자 기르는 법과 수확하는 법을 배웠다. 이 마을의 사람들처럼 그녀의 부모 또한 감자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 고구마는 달아서 오래 먹으면 질리고, 쌀은 그냥 먹으면 맛이 덜해. 그런데 감자는 달라. 쪄도 맛있고, 구워도 맛있고, 튀겨도 맛있어. 양념을 안 쳐도 맛있고, 치면 두 배로 맛있어져. 게다가 어떤 음식과도 어울려서 부담 없이 먹기 좋지.

하이디의 엄마는 자신이 감자 농사를 한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 꼭꼭 씹어 먹지 않으면 목 막히니, 조심해야 해.

전쟁에 끌려가 외팔이가 된 남편과 벙어리인 큰딸, 아직 어린 하이디를 감자 팔아서 먹여 살렸으니, 자부심이 있을만했다.

체격 좋고 털털한 하이디의 엄마가 하도 ‘맛있다. 대단하다. 훌륭하다.’ 세뇌해서인지, 하이디도 감자가 좋았다.

보통은 소금을 쳐서 먹었지만, 치즈와 함께 먹기도 했고, 설탕을 조금 뿌려서 먹기도 했다.

소스를 뿌려서 먹기도 했었는데, 언제나 색다른 맛으로 다가와서 질리지가 않았다.

“앗…”

컴컴하던 하이디의 눈앞에서 안데스 마을 사람들이 나타났다.

기운찬 엄마와 풀 죽어있는 아빠, 어버버 거리며 손을 휘젓는 언니와 항상 알감자를 챙겨 주던 옆집 제이 언니, 나무껍질로 장난감을 만들어 주던 톰 아저씨까지.

헌데 이상했다. 그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왜?

천천히 다가가던 하이디의 귓가에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이디…

묘하게 질척거리는 신경질적인 목소리.

그녀의 육체를 빼앗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감시자, 잔다­르칸이었다.

­ 얼굴을 보고 싶니?

하이디는 고개를 저었다. 무서워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 사양할 필요 없어. 한 번 보고 와.

잔다­르칸의 말이 끝나자 하이디의 몸이 붕 떠올랐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습관적으로 뒤를 봤다. 그녀의 등을 뚫고 나온 네 개의 기다란 촉수가 거미의 다리처럼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

비명도 잘 나오지 않는다. 동그랗고 딱딱한 무언가가 목을 막아놓고 있는 것 같았다.

­ 자, 잘 보이지?

순식간에 안데스 사람들의 앞에 선 하이디가 눈을 움직였다.

다리처럼 몸을 지탱하고 있는 촉수가 상당히 길어서 내려다봐야 했다.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잘 보인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였다.

등에서 다시 솟아난 촉수들이 안데스 사람들의 몸을 꿰뚫었다.

하이디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촥­!

“아아악!”

피가 사방으로 튀고, 비명이 울려 퍼진다. 수십, 수백의 비명소리가 뒤섞여 기괴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하이디는 재빨리 귀를 막았다.

­ 복습한다고 생각해. 한 번 해봤잖아. 별일 아니잖아.

잔다­르칸이 속삭였다.

­ 그 미치광이 뒤에 숨어있을 때는 좋았지? 응? 그랬잖아.

이때다 싶어 달려드는 기회주의자처럼, 굶주린 늑대처럼.

­ 이제 알 때가 됐어.

잔다­르칸과 융합된 그녀의 모습이 하이디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수백 개가 넘는 촉수를 넘실거리며 움직이는 융합된 하이디는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촉수가 생명체를 꿰뚫을 때마다 하이디는 강해졌고, 커졌다.

가정이 무너지고, 마을이 무너지고, 도시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진다. 순식간이었다.

­ 내가 왜 널 선택했을까?

하이디는 대답하지 않았다.

­ 아직도 네가 운 없는 촌동네 아이라고 생각해?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 아니. 난 널 선택한 거야. 네 안의 가능성을 봤으니까. 네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알았으니까.

하지만 잔다­르칸은 사라지지 않았다.

­ 왜 아직도 거부하는 거지? 너한테 남은 게 있어? 안데스 마을은 사라졌잖아. 어린 시절의 널 알던 사람들은 이제 없어. 넌 혼자야.

감시자는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 용주골 사람들? 그들은 안데스 사람들을 대체할 수 없어. 이미 알고 있잖아.

“나, 나무아미타불…”

­ 뭐?

하이디는 열심히 용주골에서 배운 기도문을 읆었다.

“관세워보살…”

­ 멍청한 짓은 그만 해!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잔다­르칸의 화를 돋우기만 할 뿐이었다.

­ 이 답답한 년! 넌 안데스에서 미쳤어야 했어. 자기 손으로 다 죽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정신줄을 놓았어야 했다고! 아직도 쓸데없는 짓을…!

쾅­!

굉음과 함께 잔다­르칸이 조용해졌고, 하이디의 시야가 돌아왔다.

끄워어어어­!

눈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기사가 보인다.

붉은 눈을 빛내며 하이디의 등에서 자라난 촉수를 자르고 있는 기사는 사람이 아니라 흡혈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디를 죽이기 위해 달려든 기사 흡혈귀가 잔다­르칸의 정신 공격을 끊어낸 셈이었다.

자동으로 공격을 가하는 촉수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사 흡혈귀와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하이디!”

쪼커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니 쪼커와 후크가 가까운 곳에서 흡혈귀들과 싸우고 있었다.

용주골 닌자들과 생존자 무리는 멀어져 있었는데, 촉수에 휩싸인 하이디를 두고 움직인 것 같았다.

조금 배신감을 느끼는 하이디였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백성의 목숨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배웠던 닌자들이다.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하이디를 아예 버리고 간 것은 또 아니다.

“하이디! 괜찮아용?”

그녀가 걱정됐기 때문에 쪼커와 후크를 이쪽으로 보낸 것이리라.

막시무스와 루녹스, 고위 마법사 아주머니는 흡혈귀들의 공세를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다가오지 마세요!”

하이디는 쪼커와 후크를 향해 소리쳤다.

아직도 기사 흡혈귀와 혈투를 벌이고 있는 촉수들이 쪼커를 공격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기사 흡혈귀는 촉수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었지만, 방패를 잡고 있는 손이 떨리는 걸로 보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두 닌자가 멈춰선 걸 확인한 하이디가 상황을 살피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성혈령 곳곳에 퍼져있던 흡혈귀들이 전부 이곳으로 모이고 있는지 사방이 흡혈귀 천지다.

“어?”

하이디는 눈을 비볐다.

개미떼처럼 쏟아져 나오는 흡혈귀들 사이에서 이계에서 온 대장장이 아저씨가 보인 것 같은데.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흡혈귀들 사이에서 용주골의 대장장이 트리보의 머리가 보였다.

“트리보 씨! 구해주러 오셨군용!”

쪼커도 봤는지 두 손을 흔들며 호응했다.

“형씨, 진짜로 불사신이었어?”

흡혈귀의 배를 닌자클로로 쑤시고 있던 후크가 감탄을 내뱉는다.

[아니. 나도 잡혔다.]

하지만 세 명의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트리보는 그냥 머리통만 둥둥 떠 있는 상태였고, 흡혈귀들의 손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 거였다.

트리보의 나머지 몸뚱어리 또한 머리통처럼 사방에 흩어져 흡혈귀들의 손에서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

용주골 닌자들과 생존자 무리는 흡혈귀 떼에 둘러싸였고, 쪼커와 후크는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지붕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탈주닌자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이디는 그제야 깨달았다.

평소처럼 멀리서 지켜봐 주는 탈주닌자님은 없다.

하이디는 깨달았다.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건 감시자의 힘을 가진 자신뿐이었다.

기사 흡혈귀와 촉수가 뒤엉켜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도 안데스 마을 사람들, 인신매매 때문에 끌려온 사람들, 사육당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

하이디는 닌자들과 소수 토벌대원의 보호를 받고 있는 생존자 무리를 살폈다.

안데스 사람들은 구하지 못했지만, 이 사람들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난 강해졌어. 그때와는 달라.’

6개월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잔다­르칸에게 무력하게 끌려갔던 그때와는 다르다.

혼란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이 오히려 하이디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힘겹게 저항하던 기사 흡혈귀의 가슴이 촉수에 꿰뚫렸고, 하이디의 의식이 다시금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이동했다.

­ 이제 방해꾼은 없다.

잔다­르칸은 아직 그녀의 정신과 육체를 손에 넣지 못했다. 그러니까 계속 이런 어두컴컴한 곳으로 불러놓고 굴복시키려 하는 것이겠지.

이곳은 자신의 의식 속. 그렇다면 저항할 수 있다.

­ 뭐 하는 거야?

하이디는 자신의 무기를 상상했다. 잔다­르칸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한 무기를.

하이디가 지금까지 사용해본 무기. 얼마 되지도 않지만, 그중에 가장 강력한 건…그래, 이거였다.

뿅 하고 생성된 보급형 닌자도와 수리검이 손에 잡힌다.

­ 그딴 쇠붙이로 뭘 할 건데?

목소리만 남아 있던 잔다­르칸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며 형체를 갖춰 간다.

검은 촉수로 뒤덮인 괴물, 감시자와 융합을 마친 하이디였다.

“읏.”

하이디는 재빨리 보급형 닌자도와 수리검을 버렸다. 아무리 봐도 이런 걸로 저 괴물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한심하기는.

루녹스 님의 백룡검…탈주닌자 님의 탈주닌자도…막시무스 님의 도끼…머릿속에서 갖가지 무기가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어떤 것도 그녀의 무기가 아니었다.

잔다­르칸을 쓰러뜨릴 수 있는 무기…가장 자신 있는…좋아하는…뭐가 있었지…

얄궂게도, 다음으로 그녀의 손에 생성된 건 감자였다.

“...”

­ 감자? 감자라고?

어이가 없는지 낄낄대는 잔다­르칸.

잔다­르칸의 조롱을 듣던 하이디가 갑작스럽게 움직이더니.

­ 켁!

촉수괴물의 입에 감자를 박아넣었다.

목이나 막혀서 죽어라.

그런 생각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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