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114화. 아포칼립스 사이비 혈마 (6)
* * *
기사 흡혈귀를 해치운 하이디가 갑자기 두 눈을 까뒤집었다.
“하이디?”
후크와 함께 지붕 위로 올라간 쪼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던 하이디의 몸이 순식간에 검은 구체에 휩싸였다.
“뭐, 뭐예용!”
“일단 우리부터 살자고!”
당황한 쪼커의 손을 후크가 끌어당겼다. 지붕 밑에 있던 흡혈귀가 올라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창문이나 집 밖에 전시해놓은 장식품을 잡기 위해 두 팔을 휘젓는 놈들도 보였다.
그들을 살펴보던 쪼커가 다시 하이디를 확인했다.
“저거 봐, 아직은 괜찮아.”
크고 검은 구체 안에 들어간 하이디를 공격하는 흡혈귀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의 공격은 공을 뚫지 못했다.
구체가 점성을 가진 미끌미끌한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디 걱정할 때가 아니야. 문제는 우리라고.”
후크가 닌자클로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신경질을 부렸다.
“합류하기는 힘들 거 같아용…”
침울해진 쪼커가 벌벌 떨고 있는 오큘리우스를 쓰다듬었다.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는지 계속 떠는 오큘리우스.
후크는 용주골 닌자들과 생존자 무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아갈 생각 말고, 일단 버텨! 잘못하다가는 뚫린다!”
“물리지만 마!”
“머리와 심장 위주로 공격해! 재생이 느리다!”
닌자들 중에서도 전투력이 뛰어난 루녹스, 막시무스, 빅빵댕이라 불리는 고위 마법사가 열심히 싸우고 있었으나, 수적 열세 때문에 잘 나아가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루녹스가 백룡참으로 흡혈귀들을 두 동강 내는 속도보다 흡혈귀들이 빈자리를 채우는 속도가 더 빠를 정도.
우르르…
“어엇?”
상황을 지켜보던 쪼커와 후크는 집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씨…”
후크는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지붕 끝으로 가 밑을 내려다봤다. 어느새 집 안으로 흡혈귀들이 벽과 기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이 미친놈들은 얼마나 사람의 피를 빨고 싶길래 이러는 것일까. 후크는 혀를 차고 쪼커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떨어질 준비를 해야겠다.”
“넹?”
“우리 좆된 것 같다고!”
썩어 문드러진 이빨이 단단한 음식물과 충돌하여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흔들리던 집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좆됐!”
“으아아아앗!”
“웩~!”
폭삭 주저앉은 지붕에서 쪼커와 후크가 몸을 굴렸다. 쪼커의 몸에서 튀어나온 오큘리우스는 특유의 동물적인 본능으로 균형을 잡고 내려왔다.
집은 무너졌고, 지붕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질 때의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시킨 둘은 몸 상태를 확인했다.
부러지거나 상처 난 곳은 없었다.
“괜찮아?”
“넹…”
“웩.”
“야, 온다.”
무사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보급형 닌자도를 뽑았다.
집 아래 있던 흡혈귀들은 전부 깔려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근처에서 하이디를 공격하던 놈들이 목표물을 변경했다.
후크와 쪼커를 향해 달려오는 흡혈귀들의 수는 너무도 많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용… 수 개월을 수련했는데 몇 달만에 제 닌자생활이 끝나다니…눈물 나와용…”
“웩…”
“상관없다. 씨바, 사람도 구했고, 싸움도 좀 했고, 매직먼키 그 새끼들도 전부 다 쳐죽었으니, 난 여한이 없어.”
“그래도 죽을 때는 멋지게 죽고 싶었는데…왜 자꾸 눈물이 나올까용.”
“네가 쫄보라 그렇지.”
“제가 왜 쫄보인가용! 쫄보였으면 여기서 이렇게 죽지도 않았을 거라구용!”
“웩!”
“말투부터 고쳐라 넌. 뒤질 때도 그러네.”
후크는 허탈하게 웃었고, 쪼커는 눈물을 흘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오큘리우스는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렸다.
마지막 순간에 혼자서 쓸쓸히 죽는 게 아니라 그나마 다행일까.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흡혈귀들을 구경하듯이 보던 후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야. 그래도 이 정도면 멋진 편 아냐?”
“넹?”
“우리 같은 병신이 여기까지 왔잖아. 얼굴도 모르는 다른 나라 사람들 구하려고. 이 정도면 충분히 멋진데.”
“그건 그런데… 제가 왜 병신인가용? 전 실리번 연극단에서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고용! 절 보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용!”
“연극단에서는 뭘 했는데?”
“전 만능 예능인이었어용. 노래도 잘하고, 저글링도 잘하고, 상황극도 잘하고…몇 개 빼고는 다 잘했다구용.”
“오큘리우스는 뭐 했어?”
“웨웩.”
“그래, 알았다, 알았어. …쪼커, 노래나 한 곡 불러봐라. 애달픈 걸로.”
“싫어용.”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만담을 나누던 두 사람은 흡혈귀로 이루어진 파도와 맞닥뜨렸다.
아니, 맞닥뜨리기 전이었다.
촤라락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온 수십 개의 촉수들이 흡혈귀들의 몸을 꿰뚫었다.
“하, 하이디?”
쪼커는 촉수를 보내 흡혈귀들의 진격을 막아선 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쪼커를 맞이한 것은 등에서 촉수가 돋아난 열다섯 살의 소녀가 아니었다.
액체괴물처럼 끈적한 점액질의 몸과 성인 여성의 체형을 가진, 기괴한 존재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오큘리우스 너도.
텔레파시 마법처럼 하이디의 목소리가 쪼커와 후크의 머리에서 울린다.
아까까지만 해도 궁지에 몰려 있던 두 사람과 한 동물은 뭔가에 홀린 듯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몰려오는 흡혈귀들을 촉수로 쳐 내던 점액괴물은 다가온 자들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응앗.”
“촉감이 좀…”
“웩.”
점액괴물을 촉수 네 개를 기다랗게 늘려 공중으로 떠올랐고, 그대로 용주골 닌자들을 향해 움직였다.
다리 역할을 하는 촉수가 꽤 빨라 점액괴물은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저예요, 하이디.
불쑥 나타난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보고 경계하던 닌자들 앞에서 점액괴물은 멈춰섰다.
“하이디? 모습이…”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막시무스였다.
설명은 나중에 드릴게요. 우선 성혈령을 벗어나죠. 모두 제 뒤로 오세요.
“...알겠다.”
빠르게 상황판단을 마친 막시무스가 사람들을 이끌고 점액괴물로 변한 하이디 뒤에 섰다.
주변을 둘러싸던 흡혈귀들은 촉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는 중이었다.
“이겨내셨군요.”
하이디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루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말대로, 하이디는 잔다르칸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승리를 차지한 후였다.
하이디는 긴 촉수 하나를 훌라후프처럼 둥글게 만들어 사람들을 보호하면서 전진했다.
그녀의 몸 곳곳에서 생성되는 촉수들이 흡혈귀를 찌르고 공중에 매달았다.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가던 그들은 하이디의 보호를 받으며 성혈령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도 데려가라.]
어느새 맞춰진 트리보도 함께였다.
***
“구출에 성공했다!”
“해냈어!”
방벽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용주골의 닌자들이 성혈령에 갖혀 있던 생존자들을 구출해왔다. 그것도 이상한 점액괴물과 함께 말이다.
처음에는 새로운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낸 줄 알고 공격 준비를 했던 경비병들이지만, 닌자들에게 적당한 설명을 들어 경계를 풀 수 있었다.
“탈주닌자님! 구출작전이 끝났습니다!”
막시무스가 마나를 담은 고함을 내질렀다. 성혈령의 돔 꼭대기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한 사내를 향해서였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이제 ‘그것’을 볼 수 있는 건가?”
이르갈을 제외한 모든 왕국의 수도를 폭격했던 이계의 악마.
그 강대한 존재와 힘겨루기를 가능하게 했다 일컬어지는 기술, 궤도 폭격의 술.
모두가 그 기술의 사용을 기대하고 있었다.
잠시 후, 돔 위에서 있던 남자가 일어났다. 옆구리에 손을 올린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다들 뭐 빠지게 달려라.
마나가 극도로 압축된 소리였다.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소리가 멀리 울려 퍼져 모두의 귀에 들려왔다.
“자, 갑시다!”
“믿고 맡기자고요.”
사람들이 성혈령에서 멀어졌을 때였다.
붕! 하는 소리와 함께 돔 위의 남자, 탈주닌자가 떠올랐다. 그의 검은 막대한 양의 마나를 받아 푸른 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굉장히 청명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궤도 폭격의 술.
굳이 기술 이름을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외치고 발사해야 했을까.
한 경비병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부아아아아아앙!
파괴적인 효과음과 함께 푸른 광선이 발사됐다. 돔 중앙을 순식간에 뚫고 나간 광선이 수백 줄기로 갈라지며 성혈령 곳곳을 강타한다.
쿠쿠쿠쿠쿵!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성혈령이 푸른 빛에 휩싸였다.
“으아악! 눈이…!”
맨앞에서 관람하던 왕눈이 경비병이 두 눈을 부여잡을 정도로 밝고 강렬한 빛이었다. 빛은 몇 초 더 성혈령이 있던 땅에서 머무르다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파괴의 여파 탓에 휘몰아치는 먼지 폭풍 때문에 얼굴을 가리던 자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고, 파괴의 흔적을 확인했다.
“서, 성혈령이…없어졌다?!”
모두가 기겁했다. 한 경비병의 말처럼, 성혈령이 통째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건물들은 싹 다 쓸려 있었고, 바글거리던 흡혈귀들은 새까맣게 탄 재처럼 변해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
완벽한 승리를 확신한 용주골 닌자들과 경비병, 생존자들이 기쁨의 함성을 지르기 전이었다.
스스스스…
다른 건물들과 같이 싹 쓸려버린 대성당의 바닥,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검은 안개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저, 저건 뭐야?”
“안개?”
추측은 많았지만, 누구도 그 안개의 정체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대성당 지하에서 나온 것 같다. 설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트리보의 말과 함께 검은 안개는 얇게 퍼져 나가 재가 되어버린 흡혈귀들에게 다가갔다.
수많은 흡혈귀가 먹히듯이 안개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을 흡수한 안개는 고급진 귀족 의상을 입은, 늙은 노인의 모습으로 형체를 갖춰나갔다.
아, 아오, 어.
괴상한 신음을 내는 노인. 그를 바라보던 한 경비병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루, 루베나르?”
그리고 모두가 노인의 입에 난 기다란 송곳니를 확인했다.
“혈신이라고? 저 늙은이가?”
“대성당 지하에 있었단 말이야?”
“아니야. 저딴 건 혈신님이 아니야…!”
코름갈드인들이 혼란에 빠진 그때였다.
어느새 나타난 탈주닌자가 노인의 앞에 서 있었다.
혈마?
어우, 아, 으에.
노인은 탈주닌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기초적인 어휘조차 구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군.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탈주닌자가 검을 뽑았고.
사요나라.
재빠르게 휘둘러 노인의 목을 잘라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