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116화. 아포칼립스 사이비 혈마 (8)
* * *
혈마가 씩 웃었다.
“용족 대전사도 몇 놈 죽였지.”
그거 참 자랑이다. 용족 대전사라고 깝죽거리던 델라미온은 전투력이 5점 초중반에 불과한 놈이었다.
그놈 동족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더 강하겠는가.
…라고 생각하며 내리친 탈주닌자도에 마나를 불어넣었는데, 혈마의 팔이 잘리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막아내던 놈이 여유로운 척 씩 웃는다.
“이놈은 용족 중에서도 거북목에 속해 있는 대전사였다. 고대 우수종인 거북목답게 단단함이 고대용사의 갑옷에 필적할 정도였지. 죽이느라 꽤 힘들었지.”
거북목? 이제 보니 상식이 부족한 친구였네. 어차피 곧 뒤질 놈이니 친절하게 알려주기로 했다.
“공부를 못 하는 놈이군. 거북목은 목이 구부정하게 앞으로 나오는 자세를 오래 취해 목이 일자목으로 바뀌고 뒷목, 어깨, 허리 등에 통증이 생기는 증상을 말한다. 거북목에 ‘고대’나 ‘우수’이 붙는다고 몸이 단단해지지는 않아.”
혈마가 인상을 팍 찌푸린다.
“내가 말하는 건 그 거북목이 아니라 생물의 분류…넌 바보인가?”
뭐? 바보? 이 새끼가?!
거북목을생물의분류라고주장하는멍청이주제에날바보라고 불러?
당황해서 띄어쓰기를 못 하고 생각했네.
뭐, 악당이 정의롭고 착한 탈주닌자에게 가스라이팅(개구라 치면서 심리 흔들기)을 시도하는 건 흔한 일이다.
침착하게 인술을 사용했다.
“사시미 살법.”
“큭!”
혈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내 공격을 막아내던 두 팔이 전부 잘려나갔다.
단단하다는 건 진짜였는지 몸통까지는 내 살법이 닿지 않았다. 아깝네.
“후읍!”
이상한 기합을 지른 혈마가 등에서 또다시 날개를 뽑아냈다. 이번에는 박쥐 날개가 아니라 드래곤의 날개 같은 파충류의 날개였는데, 그것만 뽑아낸 게 아니었다.
놈의 몸통은 꿀벌여왕의 껍질과 비슷한 재질로, 안개와 함께 다시 생성된 두 팔은 용족 대전사의 비늘로, 발은 하이너의 다리 같은 역관절로, 얼굴은 장수풍뎅이처럼 머리 중앙에 큰 뿔이 난 곤충의 머리통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은 노란색 빛을 띠는 야수의 눈빛으로, 입에는 백상아리 같은 톱니 이빨이 나 있었고, 뜬금없이 돋아난 전갈의 꼬리 끝은 맹독이라도 묻어있는 듯이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새끼, 혈마가 아니라 키메라였나?
뒤에서 덤벼든 적혈구 기사단을 처리하고 있을 때, 융합 요괴로 변신한 혈마가 입을 열었다. 상어 이빨로 어떻게 말하는가 싶어 자세히 봤는데, 상어 이빨 뒤에 인간 입이 달려 있었다.
아니, 얼마나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지금까지 흡수했던 이계 우수종들의 장점만을 녹여냈다. 수백 년 전부터 강적과의 전투를 대비해 만든 최강의”
“누구 물어본 사람?”
트리보와 같은 시대에 살던 새끼 아니랄까 봐 말이 존나게 많다.
“...최강의”
“그만.”
“최강의 육체다. 진정한 의미의 궁극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지. 자, 덤벼 봐라!”
“아니.”
진짜 끈질긴 새끼네.
적혈구 기사단을 전부 죽이고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혈마가 달리기 전의 운동선수처럼 몸을 잔뜩 웅크렸고.
펑!
뻥튀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 쪽으로 쇄도했다.
움직임이 마치 비바람 몰아치는 날의 비늘 봉지 같았다.
별건 아니고, 존나 빨랐다는 뜻이다.
슉!
몸을 비틀어 내 탈주닌자도를 피한 혈마의 꼬리가 내 얼굴을 향한다.
진한 보라색 액체를 뚝뚝 흘리고 있는 꼬리는 ‘나 존나 위험하니까 찔리지 마세요’이라는 분위기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몸을 웅크린 후 왼쪽 발로 꼬리를 쳐냈다.
아 씨, 신발을 좀 두꺼운 걸로 신을 걸 그랬다. 발 존나 저리네.
독이 살짝 침투한 것 같기도 한데, 아직은 버틸 만했다.
발 상태를 확인하려고 살짝 물러난 때, 혈마가 또 입을 열었다.
“어떤가? 풀모노스코르피우타리우스의 독 맛은?”
싸우러 온 건지, 말하러 온 건지 모르겠는 놈이다.
“폴모노스코르피우타리우스는 소탄기라는 행성에서 온 이계인이다. 그들의 꼬리는”
“와자뵷!”
굳이 대꾸해주지 않고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텅텅텅텅텅!
혈마의 단단한 팔과 내 탈주닌자도가 부딪힌다.
“범상치 않은 움직임이로다. 이계인인가? 그렇다면 어느 행성에서 왔지? 데문도? 아스라펠? 지구? 티키토칸?”
귀찮게 또 말 거네.
“고그마그족의 수호자와 같이 다니는 걸 보니 감시자가 지배했던 시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거 같은데, 맞나? 그렇다면 나에 대해서도 알겠군. 나는”
“닌닌.”
그냥 씹었다.
두 팔을 휘두르며 열심히 막아내던 녀석은 꼬리와 머리 위에 난 뿔, 날카로운 이빨을 이용해 계속해서 역공을 가했지만, 내 움직임을 쫓아오지는 못했다.
육체를 이것저것 섞은 놈답게 반응속도가 부위마다 제각각이다. 꼬리는 좀 빠른 편이었지만 몸통과 팔, 머리통은 평범했다.
…사시미 살법으로 놈을 죽이기는 힘들다. 다른 살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살법’을 사용하려면 초근거리까지 접근해야 하는데, 놈의 다리가 생각 이상으로 빨라 기회를 잡았다 싶을 때마다 빠져나갔다.
파괴력, 재생력, 장악력, 특수능력인 소환술과 안개화, 뛰어난 전투 센스까지.
8점.
이 녀석의 전투력은 변검경 제이드와 언데드 노부츠나, 그리고 탈주닌자 신노빈과 같은 8점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급의 적수. 내 안의 닌자소울이 뜨겁게 요동친다.
하지만 혈마는 강력한 전투력에 비해 한심한 지능을 가진 놈이었다.
“왜, 자꾸, 내, 말을, 막는, 거지?”
입 털다가 막힌 게 억울한지 공격을 이어나가면서도 계속 불만을 토로하는 녀석.
물론 이번에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네 최후의 적수가 이 혈신 루베나르 루베드 루베스 일수도 있단 말이다!”
“닌닌.”
무시하고 놈의 꼬리를 잘라냈다. 몸을 잠깐 움찔인 혈마가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닌닌? 닌닌은 대체 뭔가? 와자뵷은 또 뭐고? 성혈령에 거주하던 자들의 기억 속에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혹시 새로 생긴 언어인가?”
그렇게 말하고는 두 손을 나한테 내밀었다. 놈의 손바닥이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갈라지더니, 식물의 씨앗같이 생긴 걸 발사했다.
토토토토토!
미사일만큼 빠른 속도로 쏘아지는 씨앗들을 피하고 쳐내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씨앗들은 바닥에 닿자마자 뿌리를 내리더니 커졌는데, 뿌리 힘이 얼마나 센지 바닥이 쩌적 하고 갈라질 정도였다.
저걸 정면으로 맞았다면 내 몸도 갈라졌겠지.
혈마는 아직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대답해라! 적수에게 마땅한 예의를 지켜라!”
얘는 혈마가 아니라 마을 이장이나 동사무소 안내방송 담당자를 해야 했다.
딩동댕(효과음)~! 아아, 이장입니다. 주민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김춘수 씨네 집 암소 ‘닥쳐 밭은 내가 간다’가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오늘 마을 회관에서 축하 잔치를 열려고 하니, 주민 여러분은 오후 8시 전까지 참석하여 김씨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암소 이름은 온라인 투표로 지었다고 했었지.
아무튼 이놈도 이장을 했으면 참 잘했을 것 같은데.
“탈주닌자! 탈주닌자는 대체 뭔가? 어디서 어떤 일을 하고서 얻은 칭호지? 칭호가 아니면 이름인가?”
계속 공중에 뜬 채로 나불거리는 혈마에게 탈주닌자도를 겨눴다.
“사시미 살법.”
“흣!”
두 번이나 당해봐서인지 잔뜩 겁을 집어먹은 혈마가 땅바닥 밑으로 피신했다.
바닥에 떨어진 씨앗이 급속도로 피워낸 거대 식물 뒤에 숨으려고 하는 건가.
“은 구라고 제트킥.”
하지만 이번 공격은 페이크였다. 탈주닌자도를 검집에 집어넣고 닌자축지법으로 빠르게 놈한테 다가가 발차기를 날렸다.
마나가 잔뜩 실려 슈퍼 터널 굴착기 드릴급의 파워를 뿜어내는 내 킥이 혈마의 오른쪽 날개에 구멍을 뚫었다.
“끄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른 혈마가 노란 눈을 번뜩이며 나를 노려본다.
“자네는 정말 무례하군! 예의도 없고, 낭만도 없고, 존중도 없어!”
요괴 주제에 그런 걸 바라는 게 건방진 거다.
혈마의 몸은 부위마다 반응속도나 강도가 다 다르다. 순수 육탄전으로 싸움을 밀어붙이면 그 불균형함에 문제가 생기겠지.
“말하는 법을 모르는 저능아여! 이만 죽어라!”
잔뜩 흥분한 혈마는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불 못 가리는 멧돼지처럼 돌진해왔다.
혼자 말하다가 혼자 화내고, 이게 분노조절 장애?!
투탓! 투투투투! 토팟! 토숏!
닌자펀치와 닌자킥, 정권 지르기와 자진모리 장단으로 두들기기.
그에 맞서는 혈마의 공격은 장수풍뎅이 뿔 어택과 하이너 킥, 드래곤 펀치와 백상아리 이빨 바이트.
놈의 뿔은 내 박치기(단단하다)를 정통으로 맞아 부러졌고, 하이너 다리는 내 킥에 의해 꺾였으며, 백상아리 이빨은 이빨탈곡기로 다 뽑아버렸다.
그러는 와중에 드래곤 펀치를 몇 번 맞긴 했는데, 그 묵직함에 비해서 공격력이 부족했는지 크게 아프지 않았다.
“하, 항복. 항복한다. 패자에게 마땅한 대우를 해 주도록.”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놈의 머리통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졌으면 죽어야지.”
항복? 대우? 그딴 건 애새끼들이나 보는 미소녀 연속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나 존재한다.
현실은 다르다. 줘 터진 놈은 가죽이나 이빨, 주머니 속에 있는 지갑과 동전, 혹시나 해서 들고 다니는 콘돔을 말없이 헌납하고 죽는다.
“오코노미야끼 살법.”
“끄웨에에에에에에!”
놈의 머리통을 아작내 버렸다. 앵간한 놈이라면 고통을 버티지 못한 채 즉사했을만한 충격.
하지만 상대는 혈마. 방심하지 않고 멸혼안을 시전했다.
영혼을 없애는 멸혼안이라면 혈마도 누벨피어처럼 깔끔하게 죽겠지.
“웨..웨에…!”
붉게 빛나는 내 오른쪽 눈을 본 혈마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 녀석,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본능적으로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죽으렴.”
놈의 눈 너머에서 넘실거리는 수천 가지의 영혼들이 보인다.
그 영혼들을 강제적으로 붙잡고 있는 가장 거대한 영혼을 노려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영혼이 소멸함과 동시에 혈마의 몸이 축 늘어졌다.
혈마는 궁극인술을 소모하고 너프를 당한 나와 맞먹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승패를 가른 건 강적과의 전투 경험이다.
이놈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강한 자와 싸워본 경험이 없었고, 난 항상 한계를 뛰어넘으며 강적들을 쓰러뜨렸다.
“정말 좆같은 싸움이었다.”
싸우면서 괜히 입을 털어서 나한테 진 것 같기도 하고?
싸움도 잘하고 특이한 기술도 많은 강적이었지만, 긴장되거나 신이 나기는 커녕 너무 시끄러운 녀석이라 불쾌지수만 높아졌다.
…베아트릭스를 상대하기 전임에도 피해를 많이 입었다.
궁극인술 ‘궤도 폭격의 술’은 사실상 봉인이고, 왼쪽 발은 아직도 욱신거리고, 마나 소모도 극심하다.
슈퍼 탈주닌자가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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