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117화 (117/119)

〈 117화 〉 117화. 탈주닌자 질풍전 (1)

* * *

­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재앙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약조한 것들은 모두 지키겠습니다.

코름갈드 국왕은 알몸 도게자를 할 기세로 감사를 표했다.

­ 혈신 일은…유감이라고 할 수밖에 없군요. 루베나르교는 더는 국교가 아닙니다. 고위 성직자들과 대성당이 무너져서 교세를 유지할 수 없게 됐죠. 또한, 재앙의 원인이 명백히 밝혀졌으니,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다른 사람들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혈마 문제도 어떻게든 잘 넘어간 것 같다. 극성 루베나르교 신도나 고위 관리들이 다 성혈령에서 목숨을 잃었기에 가능했다고.

백성들 사이에서 반발이 좀 있다고는 하는데, 워낙에 먹고 살기도 바쁜 사람들이 많은지라 큰 움직임까지는 보이고 있지 않다고 한다.

뭐, 반발은 알아서 잠재우겠다고 하니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난 정치인이 아니라 탈주닌자다. 야사요를 쓰러뜨리고 난 후의 여파 같은 건 그런 일을 수습하는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 보셨습니까? 성혈령이 무너진 후 숨어 지내던 혈마법사들이 곳곳에서 모여들고 있습니다. 다들 당신께 감사를 표하고 있죠. 모여든 사람 중에서 고위 혈마법사들도 몇 있더군요. 추적은 수월하게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단다. 오르페는 혈마법사들에게 피 묻은 양피지를 넘겼고, 혈마법사들은 며칠이 넘도록 그 조그만 것을 붙잡고 있었다.

그동안 명상도 하고 몸 관리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뭐 어쩌겠는가. 혈마법이라는 마법 아니면 베아트릭스를 찾을 방법이 없는데.

마나는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혈마의 독에 당한 왼발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걷는데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격렬하게 달릴 때 욱신거리는 정도?

건물 하나를 잡고 이상한 주문을 외우던 혈마법사들이 다시 우리에게 찾아온 건 일주일 후였다.

­ 추적에 성공했습니다. 이 수정구에 표시된 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트리보와 오르페한테 부탁했고, 베아트릭스와 버마재비 용병단을 용주골 닌자들과 함께 쫓았다.

참, 난 모든 시험을 끝내고 당당한 닌자가 된 용주골 닌자 몇몇 사람에게 칭호를 부여해줬다.

마지막 대결이 다가오는 상황이니, 서열 정리를 빨리해야 했다.

용주골을 통솔하는 마스터닌자의 자리는 막시무스에게 맡겼다.

­ 마스터닌자…집단의 수장 역할입니까? 그렇군요. 용주골의 두령이라…좋습니다. 실망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막시무스는 비장한 얼굴로 마스터닌자의 상징인 빨간색 허리띠를 머리에 묶었다.

내가 잘못 말한 게 아니다. 막시무스는 허리띠를 허리에 매는 게 아니라 머리에 묶었다.

얇은 천으로 된 띠라 착각한 것 같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문어머리에 붉은 띠를 묶은 흑인닌자라니. 벌써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는가.

그냥 허리띠가 아니라 머리띠로 치자.

막시무스는 통솔력이 가장 뛰어나고, 무력 또한 평균 이상이니, 잘할 거라고 믿는다.

용주골 최강의 닌자, 슈퍼닌자의 자리는 루녹스에게 맡겼다.

­ 감사합니다, 마스터. 제가 슈퍼닌자라니… 눈을 뜬 채로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설사 죽는다 해도, 걸음은 멈추지 않겠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멋있는 말을 한 루녹스는 겸허한 표정으로 하얀색 도복을 받아들였다.

우연찮게도 백룡검과 깔맞춤인 옷을 손에 넣은 셈. 성장 여지가 충분한 그녀니 언젠가는 칠검경급으로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빅빵댕이에게는 참모를 맡겼다.

­ 알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만 있다면야…

고위 마법사고, 아는 것도 많으니 잘하겠지.

쪼커와 후크, 오큘리우스는 일반 닌자를 맡겼다.

­ 일반 닌자용? 그냥 닌자랑 다를 게 뭐죵? …없다고용? 대체 뭘 맡기신거죵…?

­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 웩?

뭐, 대부분의 닌자는 일반 닌자를 맡고 있다.

그리고 하이디는…

­ 네? 제가요? 너무 큰 책임이 아닌가 싶은, 네? 안 하면 죽는, 아니, 죽이겠다고요? 이, 일단 해볼게요.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니까…

…가장 중요한 것을 맡겼다.

트리보는 하이디를 ‘감시자의 정신공격을 이겨낸 몇 안 되는 사람’ 이라 칭했다.

감시자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승리했고, 그 능력을 고스란히 얻어와 칠검경만큼 강해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이제 베아트릭스를 잡으러 가자.

산에서 강으로, 강에서 산으로. 어디에 길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 우리는 그냥 무식하게 베아트릭스를 향해서 일직선으로 쭉 나아갔다.

그리고 지금.

고대 정령의 사원 문 앞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우리는 베아트릭스와 맞닥뜨렸다.

녀석들도 방금 도착했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어쨌든,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베아트릭스­!”

일단 사자후를 먼저 질러줬다. 코앞에 있는 거리가 아니라 몇백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베아트릭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탈주닌자, 지금까지 날 추적하고 있던 건가?”

“죽을 준비나 해라.”

그녀와 나눌 말은 없다.

일단 아침밥을 채식주의자들이나 먹을법한 풀떼기들로 떼워서 배고팠고, 걷는 동안 트리보 새끼가 계속 말을 걸어대서 피곤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햇빛을 본다며 얼마나 떠드는지.

[이곳이 고대 정령의 사원이군. 소문만 무성했던 곳을 실제로 와 보니 신기하다. 소문대로라면 사원 수호자도 있겠지. 특이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정령이란 존재의 파장인가?]

아, 씨바. 또 시작이네.

베아트릭스는 우리 앞에서 보란듯이 왕구슬을 꺼내 들었다. 저게 4 성물이겠지.

“정령들이여. 네 가지 성물을 모두 모아 사원 앞에 섰다. 문을 열어다오.”

크고 두꺼운 사원의 문이 그녀의 말에 반응하듯 진동하더니 열렸다.

“달려!”

쏜살같이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베아트릭스와 용병단. 용주골 닌자들에게 놈들을 놓치지 말라고 윽박지르면서 나 또한 전력질주를 했다.

텅!

아슬아슬하게 문이 닫히기 전에 전부 들어온 나와 오르페를 비롯한 용주골 닌자들.

[사원 안에 있는 성역에 들어서기 전에 막아야 한다! 성역에 들어가 소원을 빌게 된다면­]

느려터진 트리보는 결국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저 한마디만 남겼다.

뭐, 시끄러웠는데 잘 됐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전투에서 크게 도움이 되는 친구도 아니다.

먼저 들어선 베아트릭스와 버마재비 용병단은 빌딩만한 두 석상 앞에 서 있었다.

거대로봇 영화에 나올법하게 생긴 석상들, 커다란 보석으로 만들어진 눈이 살짝 빛나는 거 같은데…설마?

“사원 수호자들이여, 네 가지 성물을 모은 자로서 명한다. 저기 있는 침입자들을 격퇴하고 우릴 보호하라. 특히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노리도록.”

[알겠다.]

우르르­

사원 수호자라 불린 슈퍼로봇 두 개체가 움직이면서 몸에 붙은 모래들을 떨쳐낸다.

“저, 저거랑 싸워야 하나용?”

“웩!”

슈퍼로봇을 보고 눈이 돌아간 쪼커는 거의 기절할 것 같아 보였다.

아, 제발. 여기까지 와서 저런 놈들과 싸워야 한다고? 덩치가 천마 모니카 본체의 절반만한 놈들과?

“­슈퍼로봇은 나와 하이디, 루녹스가 맡는다. 막시무스는 용주골 닌자들을 이끌어 버마재비 용병단을 죽이고, 오르페는 베아트릭스를 잡도록.”

“”닌닌!””

용주골 닌자들은 호다닥 달려갔고.

“맡겨줘서 고마워.”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한 오르페는 고대용사 세트를 소환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저 존나 큰 돌덩어리 두 개지, 베아트릭스가 아니다.

일단 내가 슈퍼로봇 한 개체를 파괴하고, 어떻게든 나머지 한 놈을 막아내고 있는 하이디와 루녹스를 지원하면 되겠지.

베아트릭스는 이제 무기도 하나 없으니 오르페가 이길 수 있다고 믿는다. 뭐, 버티고만 있어도 된다. 슈퍼로봇 두 개체를 처리한 내가 합류하면 끝나니까.

“부처님!!! 이게 맞습니까? 예???”

왜 난 트리보 주고 저년은 슈퍼로봇을 두 개나 주는데?!?!?! 심지어 트리보는 사원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했는데?

사회적 불평등 현상에 크나큰 박탈감을 느끼며 보석눈을 번쩍번쩍 빛내는 슈퍼로봇들에게 향했다.

아직도 왼발이 저리는 것 같은데…저놈들, 약점은 있을까?

***

수백 년 만에 다시 열린 고대 정령의 사원. 신화적인 장소에서 두 세력이 충돌했다.

용주골의 닌자들과 버마재비 용병단이 그들이었다.

패싸움을 벌이는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는 성스러운 하얀 빛으로 가득 찬 공간, 성역이 있었다.

성물을 모두 모은 자가 성역에 들어가면, 땅과 바람, 불과 물 이렇게 네 가지 원소를 다룰 수 있다 전해진다.

닌자들의 공격을 사뿐히 피해 성역을 향해 달려가던 베아트릭스를 가로막은 건 오르페였다.

“날 죽이지 못한 벨더가드는 내 손에 죽었어. 머리를 잘라 복도 중앙에 걸어 놨지. 베아트릭스, 너도 그 옆에 있게 될 거야.”

“...됐어. 그냥 여기서 죽어라.”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편, 용병단원들을 토막내던 막시무스는 뜻밖의 인물과 마주했다.

“막시무스. 오랜만이네. 그 괴상한 머리띠는 뭐야?”

덩치 큰 근육질의 여자 용병이 험상궂게 웃으면서 막시무스 앞에 섰다.

‘지옥참수도’ 라 불리는 마법 무구를 가지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사티엘라.

막시무스와 같은 용병단 소속이었고, 오랜 전우였으며, 비슷한 실력을 갖춘 맞수기도 했다.

막시무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사티엘라, 언제부터 버마재비 용병단에 있었지?”

“좀 오래 됐어. 여기가 그래도 용병단 중에서는 제일 잘 나가잖아. 돈도 제일 많이 주고. 부단장 좀 털어 주니까 영입해 주더라. 강자는 환영이래.”

사티엘라는 말을 하다 멈추고 멀리서 사원 수호자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탈주닌자를 봤다.

“보자, 그 대단하신 탈주닌자는 멀리 있고…너도 들어올래? 내가 잘 말해주면 될걸.”

“베아트릭스가 어떤 짓을 할건지 아나?”

“아니? 모르지. 단장은 별말 없고, 부단장은 세계평화니 뭐니 지껄이는데, 믿지는 않아.”

“붉은고래 마탑주보다 더한 괴물이 탄생할 수도 있다.”

“상관없어. 그 괴물이 내 상관일 테니까.”

“...권력을 얻고 싶었나?”

막시무스의 말에 사티엘라가 픽 웃었다.

“그냥 일이니까 하는 것뿐이야. 돈을 두둑히 받았으니까 따라야 하지 않겠어?”

이르갈 내전 때도 돈을 벌기 위해 참여했던 사티엘라였다. 돈을 주는 자라면 선악을 가리지 않고 따랐다.

그야말로 모범적인 용병의 자세랄까. 막시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

긴 한숨 소리에 미간을 찌푸린 사티엘라가 억지로 웃었다.

“새끼가 한숨은. 넌 뭐 지금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베아트릭스가 죽으면 탈주닌자가 성물을 꿀꺽하겠지.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할 거야. ‘세계평화를 위해서 이 성물을 사용하겠다.’... 웃기지도 않아. 사람은 결국 다 제 욕심 채우려고 사는 거야. 그걸 ‘평화’니, ‘정의’니, 그럴싸한 말을 붙여서 꾸밀 뿐이지. 넌 그냥 그 듣기 좋은 말에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고.”

고개를 저은 막시무스가 도끼를 고쳐 잡았다.

그분은 다르다, 네 생각은 틀렸다 등의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야사요에게 죽음을.”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괴물에게 할 말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