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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118화 (118/119)

〈 118화 〉 118화. 탈주닌자 질풍전 (2)

* * *

화르륵­!

베아트릭스의 검 ‘불의 춤’이 불꽃을 뿜어냈다. 폭발적인 속도로 오르페를 향해 달려가는 불꽃.

오르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패를 든 채 나아갔다.

곧이어 불꽃이 방패와 오르페를 집어삼켰지만, 한순간뿐이었다. 불은 고대용사의 갑옷에 아무런 피해도 끼칠 수 없었으니까.

슝!

불길을 뚫고 나온 오르페가 창을 집어던졌다. 정확하게 베아트릭스의 가슴을 향해 쇄도하는 창.

베아트릭스는 침착하게 갑옷 ‘야생마의 질주’를 사용해 가속했다. 간발의 차로 창을 피해 높이 뛰어오른 베아트릭스가 발을 움직였다.

텅!

창 중앙을 걷어차 멀리 보낸 베아트릭스는 접근해오는 오르페를 확인했다.

오르페에게 자동으로 돌아오는 창을 머리를 슬쩍 움직여 피하는 걸 잊지 않은 채 말이다.

“하앗!”

기합과 함께 창을 찔러오는 오르페. 베아트릭스도 그에 맞서 검을 휘둘렀다.

쇠가 부딪히면서 불꽃이 일었고, 두 마나가 부딪히면서 파동을 만든다.

멀리서는 탈주닌자와 하이디, 루녹스가 지축을 뒤흔들며 다가오는 사원 수호자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가까이에서는 용주골의 닌자들과 버마재비 용병단이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그런 싸움에 뒤지지 않게 치열했다.

계속해서 베아트릭스와 공방을 주고받던 오르페는 생각했다.

‘역시, 내가 좀 부족해.’

베아트릭스의 솜씨 하나만큼은 로빈 못지않게 뛰어났다.

승기를 잡을 줄 알며, 빠르고 경쾌한 동작으로 여러 선을 만들어 움직이며 상대방에게 혼란을 안기고, 약점을 날카롭게 찌르고 빠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마나량을 떠나서 전사로서 최정점에 있는 자다운 솜씨였다.

‘갑옷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겠어.’

다행인 건 쌍검을 사용했던 베아트릭스가 이제는 한손검밖에 쓰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얼음의 춤’이 파괴됐으니 새로운 검을 임시로 사용할 줄 알았는데, 무기에 대한 나름의 고집이 있던 모양이다.

챙! 챙! 챙!

오르페가 생각하는 와중에도 베아트릭스는 맹공을 퍼부었다.

텅!

베아트릭스의 검이 오르페의 갑옷을 때렸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무려 다섯 번째 공격이었다.

유효타는 없었지만, 갈수록 밀리는 게 체감되는 느낌.

방패를 들어 올리고 도망치듯 천천히 물러서던 오르페가 눈을 빛냈다.

밀어붙이는 척하면서 뒤로 빠져 성역으로 향할 궁리를 하던 베아트릭스는 살기를 감지하고 몸을 움찔였다.

고대용사의 황금창이 베아트릭스의 갑옷을 찌른 건 그때였다.

퍼걱!

‘야생마의 질주’의 가슴 부분이 부서졌다. 완전히 꿰뚫은 건 아닌지라 피가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창이 더 침입하기 전에 빠르게 물러나는 베아트릭스.

“...”

위기감을 느낀 용병왕이 조용히 오르페를 노려봤다.

솜씨는 베아트릭스가 한 수 앞서 있었지만, 장비는 오르페가 두 수 앞서 있었다.

첫 전투 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승리를 위해 ‘얼음의 춤’을 바친 그녀였다.

성역에 눈이 팔려 오르페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이다.

노련함을 되찾은 베아트릭스가 위협적인 동작으로 ‘불의 춤’을 휘두르며 다시 접근을 시도했다.

공격이 먹힌다는 것을 확인한 오르페는 붉은고래 마탑에서 벌어졌던 벨더가드와의 싸움을 상기해냈다.

­ 꼬맹이! 가족의 원수를 갚고 싶었나!

늑대인간으로 변한 이후 말투마저 바뀌어 버린 벨더가드는 길쭉하고 털이 숭숭 난 두 팔을 앞세워 우세를 점했다.

고대용사의 갑옷과 무기는 있되 투구가 없으니, 억센 두 팔로 오르페를 붙잡은 후 머리를 먹어치우려는 속셈이었다.

늑대인간이 가장 강해지는 때라고 전해지는 보름달이 뜬 밤이 아니었음에도 벨더가드는 빠르고 거대했다.

­ 보인다! 갑옷 안에서 울고 있는 작은 아이가! 잔뜩 겁에 질렸구나!

신경을 긁는 헛소리도 성가셨지만, 무엇보다 골치 아픈 건 재생능력이었다.

창으로 팔을 베고 다리를 찔러도 벨더가드는 몇 초도 안되서 재생해냈다.

그런 벨더가드를 죽일 수 있던 건, 오르페가 한순간에 승기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벨더가드의 목이 아래로 떨어졌을 때의 쾌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오르페는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베아트릭스는 아까보다 더 위협적인 공세를 퍼부으며 말을 걸었다.

“왜 그러지? 지쳤어?”

대화를 하고 싶어서 걸은 게 아니라, 상대의 평정심을 깨기 위해 건 것이었다.

조롱과 무시는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인간이 아니라면 언제나 효과가 좋았으니까.

“날 죽이겠다고 말했잖아. 이걸로 되겠어?”

오르페는 베아트릭스의 말을 무시하고 방어에 집중했다.

한층 강렬해진 베아트릭스의 공격은 오르페의 얼굴을 노리고 있었다.

벨더가드와 똑같이, 유일하게 무장이 되어 있지 않은 부위를 노리는 것이다.

얼마나 합을 겨뤘을까.

베아트릭스의 검이 황금 방패를 든 손을 쳐 내고 오르페의 얼굴을 향해 움직였다.

오르페는 건틀릿으로 ‘불꽃의 춤’을 잡아낸 후 역공을 가했다.

갑옷, 그것도 가슴 부위가 뚫린 곳을 향해 창을 찔러넣은 것이었다.

“흣.”

검에 마나를 불어넣어 불꽃을 쏘아 내려던 베아트릭스 또한 능숙한 동작으로 창을 잡아냈다.

오르페가 계속 가슴만 노렸기에 곧바로 반응할 수 있었다.

두 전사 모두 양손이 봉인된 상황. 이변은 갑자기 일어났다.

베아트릭스가 붙잡고 있던 황금창의 촉 부분이 분리되더니 공중으로 치솟았다. 향하는 부분은 베아트릭스의 목.

샥­!

반사적으로 목을 움직인 베아트릭스였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촉이 지나간 후, 용병왕의 목에서 피가 치솟았다.

“커, 헉.”

더 빨리 움직인 촉이 베아트릭스의 목 절반을 가르고 지나간 것이었다.

오르페가 숨기고 있던 비장의 한 수가 성공했다.

창의 주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반 잘린 목을 두 손으로 막은 베아트릭스를 바라봤다.

“말했잖아. 벨더가드처럼 해주겠다고.”

벨더가드 또한 이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네 머리통을 장식해 놓는 건 별로인 것 같아. 청소하시는 분이 싫어하실 거 같거든. 인간 머리는 아무래도 흉하지. 그냥 길가에 버리려고.”

‘불의 춤’을 등 뒤로 던진 오르페가 촉 없는 창을 들어 올렸다. 자석에 이끌리듯이 돌아온 촉이 창 위에 붙는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창을 바라보던 오르페가 서늘하게 웃었다.

“어때, 괜찮지?”

“컥.”

무릎을 꿇은 베아트릭스가 핏발 선 눈으로 오르페를 올려다봤다. 두 손으로 눌러도 계속 새어나오는 피가 바닥을 적신다.

“벨더가드한테 안부 좀 전해줘.”

창을 베아트릭스한테 겨눴을 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철퇴가 오르페의 방패를 때렸다.

방패를 향해 날아온 공격은 아니었고, 도중에 눈치챈 오르페가 방패를 들어서 막은 거였다.

“단장님!”

철퇴의 주인은 앞을 가로막던 빅빵댕이를 밀친 버마재비 용병단의 부단장이었다.

“가십시오, 성역으로!”

몸통에 수리검 몇 개가 꽂혀 있는 부단장이 오르페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장미 넘치게 돌진한 그였지만, 힘의 차이가 명백했기에 오르페의 창에 심장이 관통당하는 건 금방이었다.

그렇다 해도 충성을 바친 대상이 성역으로 움직일 시간은 벌었지만 말이다.

“허억, 허억.”

기어코 스톤헨지같이 생긴 성역 안에 도착한 베아트릭스가 주저앉았다.

일반인이라면 벌써 날아갔을 목숨줄을 붙잡고 있는 건 초인의 육체와 정신력이었다.

“읏!”

부단장을 처리하고 성역을 향해 달려가던 오르페는 성역에 들어올 수 없었다. 성역을 감싸는 보호막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튕겨냈기 때문이었다.

오르페는 결국 성역에 창을 겨눌 수밖에 없었다.

텅! 텅!

하지만 상대는 복잡하고 강력한 고대의 정령 마법으로 만들어진 보호막. 다른 세계의 초월자가 만든 고대용사의 무기도 거뜬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어째서!”

오르페는 몰랐지만, 베아트릭스는 들어올 수 있고, 그녀는 들어올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성역은 정령들을 숭배하는 야인족, 그중에서도 제사장만이 내릴 수 있는 축복을 받아야 들어올 수 있는 장소다.

어린 시절, 본인의 부족인 푸른절벽 부족의 제사장에게 축복을 받은 베아트릭스였기에 들어올 수 있던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눈앞에서 상대를 놓친 오르페가 분노를 토해냈다. 다 잡은 적을 놓친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고함이었다.

찢어낸 옷을 목에 칭칭 감아 지혈을 마친 베아트릭스는 주머니에서 검은 통을 꺼냈다.

통에 담겨 있는 액체는 죽음에 이를 정도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영약이었다.

“커흑…”

베아트릭스는 액체를 전부 목에 들이부었다. 빨간 액체가 스며든 그녀의 목이 은은하게 빛난다.

반쯤 잘린 목이 다시 붙는 건 순식간이었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베아트릭스 뒤로 한 인영이 다가왔다. 온몸이 투명하게 빛나는 소년이었다.

­ 안녕하세요. 사원도우미 정령인 비스빅입니다. 고위 정령들께서 인공적으로 만든 정령이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베아트릭스의 얼굴이 한결 풀렸다.

“네 가지 성물을 모두 모아왔다. 소원을 빌고 싶다.”

하나로 융합된 성물이 비스빅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정령님들은 자비롭죠. 창조한 세계가 감시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걸 원치 않으셨음에도, 마지막 결단은 인류를 대표하는 자가 내리기를 바라셨으니까요. 그들을 사랑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이 세계의 주인이 그들이라 봐서 그런 걸까요.

알쏭달쏭한 말을 한 비스빅이 씩 웃었다.

­ 성물을 확인했습니다. 어떤 소원인지 말씀해 주세요.

베아트릭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고대 정령의 사원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그녀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생각을 마치고 다시 눈을 뜬 베아트릭스는 비스빅을 보고 말했다.

투기장에서 만난 늙은 야인족에게 네 성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생각했던 소원을.

그건 부단장이 생각했던 전쟁 억제력 따위가 아니었다.

“네 원소를 폭주시켜, 세계를 파괴하고 싶다. 재생할 수 없게 영원히.”

버마재비 용병단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진짜 소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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