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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119화 (119/119)

〈 119화 〉 119화. 탈주닌자 질풍전 (3)

* * *

세계를 파괴한다. 베아트릭스는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멍청한 부단장은 네 성물을 얻자 말했을 때부터 고귀하고 영웅적인 행위를 위한 것이라 해석했고, 같은 용병들에게 전파했지만 말이다.

용병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곧이곧대로 믿었다. 베아트릭스의 말이면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는 자들이었으니까.

용병들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용병왕이라는 칭호와 초인적인 강함 때문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건 아니었다.

수많은 전장을 거치면서 사선을 넘어온 그들이다. 가족보다 곁에 있는 동료를 더 신뢰했고, 언제나 승리를 안겨 주는 단장 베아트릭스를 신보다 더 숭배했다.

단장이 명령만 하면 갓 구운 빵을 안고 지나가는 아이도 ‘다 이유가 있을 거야’ 생각하면서 죽일 수 있는 자들이었다.

베아트릭스는 부단장과 용병들의 오해를 풀지 않았다. 어차피 성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속았다는 걸 알아도 바깥에서 멍하니 볼 수밖에 없을 터.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음에도 탈주닌자와 그의 제자가 따라붙었지만, 결국 성역에 들어오는 것에 성공한 베아트릭스였다.

‘이제 곧 소원이 이루어지겠지. 전부 끝나는 거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누나?”

“...뭐?”

너무나도 그리운, 그러나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베아트릭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이, 탤릭?”

하나뿐인, 더 이상 세상에 없는 남동생이 죽기 전 모습 그대로 누나를 보고 있었다.

성역은 모습을 바꿔 한 부족의 촌락으로 변했다. 푸른절벽 부족이었다.

아직 어린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 넌 곧 부족 최고의 전사가 될 거야. 정령들께서도 그렇게 속삭이고 있단다.

그녀는 푸른절벽 부족의 제사장이자 베아트릭스의 어머니였다.

­ 헬베티카, 네가 우리들의 미래이자, 희망이다. 축복을 내릴 테니, 이리 오렴.

제사장의 축복.

부족 최고의 전사나 영웅, 부족을 구원한 자들에게만 내리는 강력한 주술이다.

정확히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지금의 베아트릭스도 몰랐다. 성역에 들어오게 해줬으니 쓸모가 아예 없진 않다 정도?

베아트릭스가 눈을 잠시 깜빡이는 사이, 다시 풍경이 변했다.

푸른절벽 부족이 불타올랐고, 왕국의 기마병들이 부족원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한 천막에서 이탤릭을 끌어안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베아트릭스의 어깨를 잡았다.

­ 이탤릭을 잘 돌봐줘. 어린아이까지는 죽이지 않을 거야.

아직 헬베티카로 불리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요. 제가 지킬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멀리서 어린 자신을 지켜보던 베아트릭스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냥 저기서 죽는 게 나았을 텐데.”

그러고는 반응을 기대하듯 소년 이탤릭을 바라봤지만, 그는 생기 없는 얼굴로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직 아이였던 자기 자신, 이탤릭을 말이다.

풍경은 투기장으로 변했다. 여러 이유로 이 지옥 같은 곳에 끌려온 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혈투를 벌이는 곳.

­ 간다! 간다! 보어루사가 간다!

­ 야인족 꼬맹이 따위 죽여 버려!

­ 들이받아! 죽여!

관객들은 벌건 눈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경기를 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베아트릭스는 얼굴을 구겼다. 경기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꿰엑!

보기 힘들었다. 괴성을 지르며 돌진해오는 몬스터의 앞에 있는 남자가 이탤릭이었으니까.

­ 으, 으아아…!

남동생은 투기장 관리자가 무기랍시고 던져 준 작은 단검을 두 손으로 쥔 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 헬베티카는 검투사들에게 붙들린 채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이탤릭!”

보다 못한 베아트릭스가 몬스터를 향해 달려갔다.

긴 뿔이 난 돼지처럼 생긴 이 몬스터의 이름은 보어루사,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닥 강한 존재가 아니었다.

보어루사를 죽이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 괴물은 베아트릭스를 통과하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제서야 베아트릭스는 자신이 간섭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 오오오!

구경꾼들의 환호성이 갑자기 커졌다. 보어루사의 엄니가 동생의 몸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베아트릭스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왜 나에게 이런 걸 보여주는 거야.”

투기장 위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소년 이탤릭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자기 자신이 죽는 모습에도 태연할 뿐이었다.

베아트릭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전부 다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어?”

침묵으로 일관하던 이탤릭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왜 세계를 파괴하고 싶은 건데?”

“뭐라고?”

“들었잖아.”

“...우리가 겪은 일들을 떠올려 봐.”

숨을 크게 들이킨 베아트릭스가 말을 이었다.

“아직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또 다른 너와 내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지. 언젠가는 끝날 거 같아? 아니, 계속될 거야. 인간의 광기와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서로를 죽고 죽이게 설계된 생물이라서,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래서?”

“누군가는 이 연쇄를 끊어야 해. …세상이 끝나면 비극이 반복될 일도, 힘없는 어른을 부모로 둔 아이들이 고통받을 일도 없어지겠지. 내가 이 모든 것을 끝내겠­”

“거짓말.”

이탤릭은 숨 가쁘게 말을 토해내던 베아트릭스를 단 한 마디로 조용하게 만들었다.

“거짓말이라니?”

“누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아니야. 난­”

“고통받을 아이들을 위해서 세상을 파괴하려는 게 아니잖아.”

“...”

“날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베아트릭스는 입을 닫았다.

“난 이유를 알고 있어.”

이탤릭은 말을 이었다.

“누나의 세상은 이미 예전에 끝났으니까, 맞지?”

알쏭달쏭한 말과 함께 풍경이 바뀐다.

갑옷을 입은 전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여자가 누더기를 입은 헬베티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내 이름은 빌헬미나. 버마재비 용병단의 단장이다.

빌헬미나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가 말에서 내렸다.

­ 내가 널 샀다. 검투사로 죽기에는 아까운 실력이더군. 내 밑에서 용병으로 일하게 될 거다.

­ ….

헬베티카는 죽은 눈으로 빌헬미나를 올려다봤다.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빌헬미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 오늘부터 네 이름은 베아트릭스다. 버마재비 용병단의 베아트릭스. 우리 식구란 뜻이지.

빌헬미나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이 끔찍한 세상에 남은 건 고통뿐이라고 생각했겠지.”

헬베티카가 빌헬미나의 손을 잡자마자, 이탤릭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풍경이 계속 바뀐다.

“더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울려퍼지는 이탤릭의 목소리와 함께.

­ 사람들에게 들었다. 남동생이 투기장에서…

첫 전투를 끝내고 난 후 빌헬미나와 같이 술을 마시고 있을 때다.

“과연 그럴까?”

­ 원한다면, 날 언니라 불러도 좋아.

이건 여러 전투를 거치고 숙련된 용병이 되어 빌헬미나의 신뢰를 얻게 됐을 때.

“아니, 그렇지 않아.”

­ 베, 베아트릭스님. 평생 따르겠습니다!

이건 암살자들에게 쫓기던 한 용병의 가족을 구해주고, 그 용병의 충성을 얻었을 때다.

철퇴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이 용병은 나중에 부단장이 됐다.

“행복해질 기회는 언제든지 있었어.”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베아트릭스의 인생을 보던 이탤릭이 눈길을 돌렸다.

자신의 누나에게로 말이다.

“누나가 거부한 것뿐이야.”

­ 베, 베아트릭스. 어째서.

베아트릭스가 빌헬미나를 죽이고 버마재비 용병단의 단장이 됐을 때의 모습이 지나간다.

­ …단장은 내가 되어야 해. 그동안 고마웠어.

얇은 실로 빌헬미나의 목을 조른 풍경 속 베아트릭스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풍경은 투기장으로 바뀌었다.

­ 살인마들이다. 애어른 가리지 말고 다 죽여.

단장이 된 베아트릭스의 명령에 용병들이 움직였다. 투기장에 있던 노예주와 상인들, 그들의 아이들이 그들의 손에 하나둘 쓰러진다.

지켜보던 베아트릭스가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

“...”

“그만해.”

베아트릭스가 이탤릭을 노려봤다.

“너는 환상일 뿐이야.”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베아트릭스는 투기장의 야인족 노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성역을 관리하는 정령은 소원을 비는 자에게 있어 한 가지 시련을 내린다고 했다. 가장 중요했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의사를 재확인한다고…

그 사실을 잠시 잊었던 건 비스빅이라는 정령도우미가 어떤 수작을 부렸기 때문이 분명했다.

“넌 죽었어. 이 자리에 없다고.”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이탤릭이 슬픈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도 세상에 아름다운 게 남아 있다는 걸 알잖아.”

풍경은 한 남자아이와 성인 남녀의 모습을 비췄다.

행복한 얼굴로 소풍을 즐기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는 건 과거의 베아트릭스였다. 질투가 가득 담긴 얼굴로, 가족을 노려보고 있다.

현재의 베아트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이 맞아. 내 세상은 예전에 진작 끝났어.”

진심으로 사랑했던 푸른절벽 부족 사람들과 어머니, 이탤릭은 이 세상에 없다.

난 선택받은 전사였을 텐데, 부족의 미래이자 희망이었는데, 왜 전부 잃은 걸까.

소중한 건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렇기에 베아트릭스에게 세상은 가치가 없었다.

“내가 느낀 고통을, 온 세상 사람들이 느꼈으면 좋겠어.”

“...”

“그래. 그게 내 진심이야. 그러니까…소원을 들어줘.”

이탤릭의 모습이 이윽고 정령도우미인 비스빅으로 변했다.

­ 알겠습니다. 이것 또한 정령님들의 뜻이겠죠. 성물을 넘겨주세요.

베아트릭스는 말없이 성물을 비스빅에게 넘겼다.

­ 이제부터 ‘세계파괴자’를 가동할 겁니다. 성물을 일깨우는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성물을 이리저리 만지는 비스빅을 지켜보던 베아트릭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보호막을 두들기다 지친 오르페의 뒤에서, 왼발을 절뚝거리면서 다가오는 탈주닌자의 모습이 보였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검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베아트릭스는 몰랐지만, 신노빈의 탈주닌자도는 사원 수호자의 공격으로 부러진 지 오래였고, 그 몸은 사원 수호자의 주먹에 두 번이나 직격당한 상태였다.

결국 부수는 데 성공해 이곳까지 왔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탈주닌자는 성역에 들어올 수 없을 터. 베아트릭스는 비스빅이 내린 시련 때문에 찝찝해진 기분을 풀고 싶었다.

그게 성역을 향해 다가오는 탈주닌자에게 말을 건 이유였다.

“기분이 어떤가요?”

탈주닌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림자 속에서 뭘 무찌르면서 백성을 수호해?”

베아트릭스는 코웃음을 쳤다.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그게 탈주닌자의 의무라서? 그걸 위해서는 목숨도 바칠 수 있다?”

애들이나 보는 동화책에서 나올법한 환상. 입만 산 남자라고 처음부터 생각했다.

“수호니, 평화니, 의무니…같잖은 것들이나 말하면서.”

이 세상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값싼 정의감과 도덕심. 그게 이 남자를 움직이는 원동력일 터. 본인을 아주 대단한 영웅이라고 생각하겠지.

베아트릭스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이었다.

“쓸데없는 짓이나 하면서 돌아다니더니, 꼴 좋네요. 뭐, 거기서 조용히 구경이나…”

그 순간, 탈주닌자가 보호막을 통과하고 성역 안으로 들어왔다.

충격적인 상황에 굳어버린 베아트릭스는 산세리프와 한 대화를 떠올렸다.

탈주닌자가 부족을 구한 적이 있다고 했었다. 그때 예전에 제사장의 축복을 받은 게 아닐까?

­ 부족의 아이, 그 아이의 아이. 네 이름 계속해서 전해질 거다. 대가 없이 싸워준 영웅으로.

­ 그것참 고맙네.

­ 그들이 널 추앙할 거다. 나 또한 널 축복할 거다. 진심이 담긴 축복, 강력한 힘 가지고 있다.

­ 계속 말할 생각이야?

­ 지금 내가 한 말들. 가볍지 않다. 제사장의 말, 초자연적인 힘 가지고 있다.

탈주닌자 본인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용병왕 베아트릭스.”

굵고 나직한 목소리. 베아트릭스 앞까지 다가온 탈주닌자가 온몸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윽.”

당황한 용병왕은 탈주닌자의 눈을 들여다봤다. 심연과도 같은 검은 눈동자에 그녀가 담겨 있었다.

“­지랄은 거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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