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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화 (1/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화

번쩍.

이른 아침부터 저절로 눈이 떠졌다. 마침 날씨는 화창한 여름이었다.

소프 백작 가문의 프레사는 바로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녀가 환생한 소설 <앨리샤>의 주인공들이 결혼하는 오늘을.

프레사 소프는 유치하고 하찮은 악역이었다.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멍청한 짓을 일삼았다.

하필 다시 태어나도 이런 멍청한 악녀라니.

다시 생각해도 억울했지만, 어쨌든 프레사는 열심히 살아왔다. 원작이 무사히 완결을 향해 달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원작을 바꾸고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 물론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그녀가 원작에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크게 앓거나 다쳤고, 죽을 뻔하기도 했다.

‘저택에서 탈출하려다가 계단에서 구른 건 정말 끔찍했지.’

단순히 우연이라고 여기기에는 비슷한 일이 너무 많았다.

원작 여주와 남주가 순조롭게 데이트하도록 내버려 뒀더니 갑자기 배탈이 나서 이틀을 앓았다.

사용인들에게 잘해 준 날은 멀쩡하던 천장이 와르르 무너지기도 했다.

결국 프레사는 일탈을 포기하고 이 원작이 무사히 결말을 맞이할 때까지 그녀의 역할에 충실했다.

프레사는 남자 주인공인 로완 길레스피의 약혼자였다. 그러니 갑자기 나타난 여자 주인공, 앨리샤 루미스를 질투하는 건 당연했다.

<앨리샤>는 잘생기고 까칠한 로완이 아름답고 다정한 하녀 앨리샤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젊은 백작과 평민 출신 하녀의 사랑이라니. 참 비현실적이었다.

다행히 프레사는 그들의 사랑을 위한 수많은 장애물 중 하나였을 뿐, 그다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최종 악역은 따로 있었으니 프레사는 잊힐 만하면 등장해 두 사람 사이를 돈독히 만드는 역할만 하면 충분했다.

로완과 앨리샤가 만나지 못하도록 로완의 발목을 붙잡아 늘어졌고, 앨리샤에게는 하루 내에 끝내지 못할 만큼의 일을 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대부분 하찮고 어처구니없는 유치한 악행이었다.

‘그래도 앨리샤는 무척 힘들었겠지만.’

그때마다 프레사가 느낀 죄책감을 책으로 쓰라고 하면 수천 권은 될 것이다.

어쨌든 그것도 이제 끝이다.

바로 오늘, 두 사람이 무사히 결혼해 해피 엔딩을 맞이하면 프레사 소프는 자유가 될 예정이었다.

자유!

이 지긋지긋한 배역에서 벗어나게 된다니, 상상만으로도 기뻐 온몸이 떨렸다.

프레사는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나 유행 지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화장대 앞에 앉아 밤새 헝클어진 연보라색 머리칼을 빗질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참 예의도 없는 등장이었다.

프레사는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불청객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

빈정거리는 말이 뚝 끊어졌다.

프레사는 거울을 통해 그를 쳐다보았다.

제롬 소프. 프레사의 둘째 오빠이자 소프 가문의 망나니였다.

그녀는 매일 늦잠을 잔다는 설정의 프레사를 연기하기 위해 지금껏 정오까지 퍼질러 잤다.

즉 이렇게 일찍 혼자 일어난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제롬은 눈에 훤히 보일 만큼 당황한 얼굴이었다.

프레사는 제롬 쪽으로 몸을 돌려 앉으며 상큼하게 웃어 주었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잖아요, 오라버니.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답니다.”

“너…….”

제롬은 소프 가문 특유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찌나 관리를 잘하는지 그의 단발은 윤이 너무 나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 예쁜 머리털을 잡아서 벗겨질 때까지 흔들고 싶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프레사는 벌떡 일어나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제롬 오라버니.”

“또 무슨 멍청한 짓을 벌일 심산이냐? 웃음이 나올 리가 없을 텐데? 오늘은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길레스피 백작의 결혼식이라고!”

“당연히 알고 있죠.”

“그런데 왜…….”

“웃을 수 있냐고요? 전 오늘부터 길레스피 백작님과 앨리샤 양을 진심으로 축복해 줄 생각이거든요.”

프레사는 검지를 펼쳐 제롬의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제롬의 붉은 눈동자가 반사적으로 그 손가락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추, 축복? 네가 두 사람을 축복한다고?”

“그럼요! 어찌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인지. 저 같은 건 진작 물러났어야 한다니까요.”

프레사는 두 눈을 촉촉하게 적시며 소매로 눈가를 콕콕 닦아냈다.

주인공들의 결혼식이 당일에 엎어지지는 않을 테니, 오늘부터는 ‘악녀 프레사’가 아니라 진짜 프레사로 살아갈 차례였다.

프레사는 지금껏 가문에서 냉대를 받았다.

완벽한 후계자 엘리아스와 사랑스럽고 영특한 막내딸 에이미, 그리고 성격이 불같아도 검술의 천재인 제롬. 장점이 뚜렷한 세 명에 비해 프레사는 너무 부족했다.

특출난 재능도, 뛰어난 외모도 그렇다고 매력적인 성격도 아닌 프레사가 완벽한 가족 사이에서 외면당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붉은색이 상징인 소프 가문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채 태어났다.

게다가 잘하는 거라고는 남자 주인공을 쫓아다니며 여자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뿐인 설정이었으니 명예를 중시하는 소프 가문의 눈엣가시일 수밖에.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환생한 지금의 프레사는 달랐다. 이제는 원작의 프레사를 연기할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예전부터 꼭 말하고 싶었는데요, 제롬 오라버니.”

프레사는 한 걸음 더 제롬에게 다가섰다. 제롬이 갑작스레 다가온 그녀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 목을 뒤로 빼냈다.

“뭐, 뭐야?”

프레사는 활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검 대신 이걸 좀 단련해 보는 건 어때요? 무식하게 검만 휘두르다가는 금세 밑천이 드러나 버리거든요. 머리도 좀 쓰세요. 아셨죠? 책 한 문장이라도 읽고 좀.”

“뭐? 지금 뭐라고?”

제롬의 얼굴이 머리카락보다 더 새빨갛게 익었다.

‘하긴, 지금껏 가족들 앞에서 주눅 들어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으니 놀랄 만도 하지.’

프레사 소프가 악녀가 된 이유는 사실 가족들의 무시와 핍박 탓이 컸다.

완벽한 가족들은 프레사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기에 그녀는 만만한 사용인들에게 화풀이를 반복했다. 그 탓에 왕국 내에서는 아마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혀를 차는 사람뿐일 것이다.

어차피 오늘 이곳을 떠날 테니 더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프레사는 미소를 유지한 채 턱 끝으로 열린 문을 가리켰다.

“그럼 결혼식에 갈 준비를 해야 해서, 이만 나가 주실래요? 언제까지 다 큰 여동생의 잠옷 차림을 보고 있을 거예요?”

“뭐, 뭐? 뭐?”

“잠옷이요, 잠옷. 이 얇고 속이 비칠 듯 말 듯 불편한 거요.”

제롬이 뻣뻣한 고개를 살짝 숙여 프레사의 옷차림을 확인하더니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듯 방을 떠났다.

“가, 간다! 지금 네가 저지른 무례는 결혼식 이후에 처벌하도록 하지!”

하여튼 허세는 누구를 닮았는지 대단하다니까. 목덜미까지 벌겋게 익은 걸 보니 지금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지.

평생 우습게 여기던 상대가 돌변하면 놀라 자지러진다니까, 참.

프레사는 두 손을 탁탁 털며 코웃음 쳤다.

아, 속이 다 시원하네. 몇 시간 후면 완결이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다행히 패널티로 늘 오던 끔찍한 고통이나 구역질은 없었다.

‘역시 완결은 최고야.’

프레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준비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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