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화
“아가씨,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로렌은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되는 눈치였다.
프레사는 맛없어 보이는 녹색 액체가 담긴 약병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괜찮지. 이미 여러 번 실험도 했었잖아, 로렌.”
“그렇지만…….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양을 드신 적은 없으시잖아요.”
로렌의 말도 일리가 있다.
몇 년 동안 이 약을 직접 먹어 보기는 했지만, 소량씩만 섭취한 것이 전부였다.
큰 부작용은 없었으나 적은 양이라도 며칠에서 길게는 몇 개월 동안 현기증을 겪었다.
소프 가문의 사람들은 프레사가 어지러움을 느끼며 쓰러질 때마다 비웃었다.
‘이제는 나약한 척까지 하는구나.’
물론 ‘척’은 아니었지만, 프레사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분명 같은 피가 섞였는데 어째서 프레사만 이방인 취급을 받았어야 했을까.
막상 거짓 죽음을 앞두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이럴 때는 빨리 일을 진행하는 편이 나았다.
“로렌, 이거 가족들에게 전해줄래? 이왕이면 어머니께 부탁할게.”
프레사는 침대 옆 탁자 서랍에서 새하얀 봉투를 꺼냈다.
“이건…….”
“유서야.”
로렌의 갈색 눈동자 가득 눈물이 고였다. 유서라는 말을 들으니 드디어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어젯밤 잠들기 전 유서를 완성하느라 한참 시간을 보냈다.
사실 쓰고 싶은 말은 없었다. 그래서 짧은 문장 몇 줄만 적고 말았다.
그냥 뭐 지금껏 고마웠다, 잘 살아라. 이런 뻔한 내용이었다.
진심은 담지 않았다. 그럴 만큼의 감정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그럼 마지막까지 잘 부탁해, 로렌.”
“흐, 흑……. 프레사 아가씨…….”
프레사는 침대에 앉은 채 말간 하늘색 눈동자로 로렌을 올려다보았다. 로렌의 코끝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하여튼 마음이 약하다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무덤덤하고 즐겁기만 했는데, 로렌의 눈물을 보니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가 어디로 갈지 말이라도 해 줄까? 그럼 마음이 좀 놓이겠어?”
비밀 유지를 위해 로렌에게도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렌이라면 비밀을 충분히 지켜줄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충동적으로 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혹시 제가 실수로 발설하면 큰일이니까요.”
로렌은 잠깐 고민하더니 야무지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눈물을 꾹꾹 눌러 닦으며 활짝 미소 지었다.
“아가씨는 분명 깨어나실 거예요. 그러리라 믿으니까요.”
“……고마워, 로렌.”
어라. 이러다 프레사까지 울어 버릴 것 같았다.
프레사는 재빨리 약병 뚜껑을 열고 단숨에 전부 들이켰다.
쌉싸름하고 역한 맛이 느껴졌다. 여러 번 먹어 본 맛이었으나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프레사는 두 눈을 꽉 감고 약을 삼킨 후 바른 자세로 누웠다.
“이제 난 잠들 거야. 심장이 멈춘 것처럼 보이겠지만, 딱 24시간 후면 약효가 끝나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네, 아가씨. 좋은 꿈 꾸세요. 꼭 다시 만나요.”
로렌의 다정한 인사와 함께 프레사의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마치 허공에 붕 뜬 기분이었다.
정말 죽는 건 아니겠지?
불현듯 괜한 걱정이 치고 올라왔다.
몇 년 내내 이 약을 개발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부디 효과가 확실해야 할 텐데.
“프레사! 당장 나오지 못하겠니?”
소프 백작 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그토록 찾아대는 프레사는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문이 쾅, 거칠게 열리고 달갑지 않은 인물들이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얕은 호흡만 반복했다.
슬슬 때가 됐다.
빠르게 요동치던 심장은 느릿느릿 기어가기 시작했고, 몇 분 후면 완전히 멈출 것이다.
“아가씨!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미리 연습해 뒀던 로렌의 비명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민망하다며 번번이 실패하더니 이제는 꼭 실제 상황 같잖아.
“이게 무슨……. 프레사? 로렌, 무슨 일이지? 왜 프레사가 숨을…….”
아, 이 재수 없는 목소리는 분명 엘리아스네.
프레사의 첫째 오빠이자 잘난 후계자였다. 프레사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엘리아스의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한 걸 보니 제법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충격이라니, 그럴 리가 없지.
“언니? 프레사 언니? 정말 죽은 거예요?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죽었다고요?”
이번에는 에이미였다.
나이도 어린 게 방실방실 웃으며 프레사를 대놓고 무시했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소용이 없을 만큼 얄미운 여동생이었다.
“무슨 헛소리야. 아직 숨 쉬잖아. 분명 또 관심을 끌기 위해 가짜 약을 먹은 게 분명하다고.”
오, 멍청한 제롬이 어떻게 알았지? 바로 정답이야. 물론 심장이 멈추면 그때는 가짜 약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할 테지만.
프레사는 그 반응을 마저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슬슬 한계였다.
가족들의 목소리가 이리저리 뒤엉키더니 완전히 멀어졌다.
프레사는 끔찍한 적막 속에 갇힌 채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