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4화 (4/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4화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프레사는 스칼라와 리카온을 양옆에 끼고 좁은 길을 걷고 있었다.

이게 전부 리카온, 저 남자 때문이었다. 갑자기 그가 끼어드는 바람에 거절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스칼라는 울기 직전이었고, 리카온은 순순히 사라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프레사는 잠도 덜 깬 상태로 파로 마을 투어에 나섰다.

‘돌아가는 대로 길드 마스터에게 연락해야겠어.’

분명 당장은 근처에 이사 올 사람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프레사는 여유로운 표정의 리카온을 곁눈질했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시장이랍니다. 도토리…….”

스칼라는 언제 울상이었느냐는 듯 발랄한 목소리로 설명 중이었다. 프레사는 그녀가 또 습관처럼 고객명을 언급하려고 하는 순간 우뚝 멈추어 섰다.

“제발!”

스칼라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프레사를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란 얼굴이었다. 리카온 또한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다 말고 프레사를 주시했다.

프레사는 온화하게 웃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레사라고 불러 주세요, 미치 씨.”

“앗, 알겠습니다! 그럼 레사 님이라고 부를게요.”

“고마워요.”

“제가 더 감사하죠!”

스칼라는 두 눈을 반짝이며 발랄하게 대답했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게 돼서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반면 프레사는 피곤해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약 기운이 아직 몸에 남은 것 같았다.

프레사는 여름 햇볕이 내리쬐는 시장 거리를 걸어가며 리카온을 힐끔 보았다.

“그런데 그쪽은 언제까지 따라올 거예요?”

스칼라야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이 남자는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걸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리카온은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말고 프레사를 내려다보았다. 잘생겼지만 어딘가 묘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글쎄. 재밌을 것 같아서?”

평온한 말투로 대답한 리카온이 눈매를 깊숙이 휘어 웃었다.

‘또 저 수상한 미소.’

프레사는 속내와 달리 아무렇지 않은 듯 마주 웃어 준 후 고개를 돌렸다.

도망치는 배에서 만난 것부터 같은 마을로 오게 된 것까지,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만약 가족 중 누군가 프레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 곤란했다.

‘아니지,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네.’

눈엣가시였던 프레사가 사라졌으니 오히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할 텐데.

가문의 수치.

사용인들까지 프레사를 그렇게 표현했다.

고작 조금 부족하다는 이유로, 특출 난 재능이 없다는 것만으로 무시당해야 한다니. 프레사도 어린 시절에는 그저 작고 여린 아이였을 뿐인데.

불어오는 바람이 미지근했다.

프레사는 또 습관처럼 지나간 기억을 되새김질하다 말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녀는 프레사 소프였다. 그저 조금 긴 연극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지만, 상처까지 무뎌진 것은 아니었다.

“저쪽에 새하얀 등대를 보셨나요? 그 근처에는 넓은 밀밭이 푸르게 펼쳐져 있답니다!”

스칼라의 손끝이 시장 거리에서 먼 곳을 가리켰다. 프레사는 생각을 멈추고 등대를 응시했다.

푸르른 밀밭과 하얀 등대, 내리쬐는 햇볕.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왕 이렇게 나오게 됐으니 뭐라도 마음에 드는 일이 있었으면 했다.

“등대에 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당장 안내해 드릴게요!”

스칼라는 프레사가 드디어 흥미를 보이자 두 눈을 빛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리카온을 향해 물었다.

“리카온 님도 동행하시겠어요?”

안 가겠다고 했으면 좋겠다.

프레사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빙긋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리카온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럼 등대로 출발!”

스칼라가 오른쪽 주먹을 번쩍 들어 올리며 힘차게 소리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방인 세 명을 힐끔거렸다. 부끄러움은 프레사의 몫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프레사는 얼굴 가죽이 수백 겹은 돼서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었다.

지금껏 가짜 악녀를 연기하며 살아온 덕분이었다.

‘이 정도쯤이야 뭐.’

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등대에 도착했다.

스칼라의 말처럼 등대 근처에는 밀밭이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우뚝 선 아름다운 백색 등대는 마치 그림 속의 풍경 같았다.

라일락을 닮은 프레사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흩날렸다.

스칼라는 어느새 등대 옆에 붙어서 이 등대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설명하는 중이었다.

“당신도 요양 왔습니까?”

멍하니 밀밭을 쳐다보던 프레사는 갑자기 들려온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리카온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프레사는 못 본 척 다시 앞을 응시하며 대꾸했다.

“그렇게 묻는 걸 보니 그쪽은 요양하러 온 건가요?”

“아, 그렇게 되는 건가? 뭐……. 사실이기는 하죠. 딱 봐도 병자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리카온이 태연히 되받아쳤다.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확실히 처음부터 안색이 영 나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지금도 그랬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걸어왔음에도 리카온은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간간이 작게 기침까지 내뱉었다.

그 모습에 프레사는 미미한 동정심을 느꼈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데요?”

“지병이라고 해 두죠. 치료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그리 큰 기대는 안 하지만요.”

“불치병인가요?”

“아마도?”

프레사는 다시 리카온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불치병이라니.

‘조금 안됐네.’

프레사가 위로의 말을 고르는데, 리카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멀미약은 효과가 있었습니까? 나름 비싸게 구한 약인데.”

뜨끔.

프레사는 바다 아래로 가라앉던 약병을 떠올렸다. 차마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의심스러워서 버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리카온은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프레사는 오랜만에 양심이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리며 시선을 피했다.

“네, 뭐. 효과가 아주 좋던데요?”

“그래요?”

“네.”

“다행이군요.”

리카온이 해사하게 웃는 그 순간, 프레사의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하필 이럴 때 부작용이 나타나다니.

프레사는 구역질이 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레사?”

물속에 빠진 것처럼 리카온의 목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프레사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밀밭을 향해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레사, 괜찮아요?”

리카온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잡아당기는 듯하더니 의식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손이 차갑네.’

프레사의 머릿속으로 스쳐 간 마지막 생각이었다.

* *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