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화
프레사는 아주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보이는 건 낯선 천장이었다.
‘아, 이사 왔지.’
여긴 소프 저택이 아니라 파로 마을이니까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의 새집은 이런 천장이 아니었다. 분명 포도주색의 고풍스러운 무늬였는데…….
‘여긴 밋밋한 흰색이잖아.’
프레사는 어지러운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때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사, 일어났어요?”
리카온이었다.
프레사는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았다. 리카온이 안락의자에 앉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이네요. 당신은 쓰러졌어요, 등대 앞에서.”
아.
프레사는 그제야 이 상황을 이해했다. 분명 푸른 밀밭과 등대를 구경하던 중이었는데 약의 부작용으로 의식을 잃었다.
그렇다고 해도 리카온 본인의 집으로 데려올 줄이야.
프레사는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왜…….”
“당신의 집이 아닌지 궁금하죠? 일단 물부터.”
리카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물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프레사는 얼떨결에 잔을 건네받았다. 미리 준비해 뒀는지 따뜻한 물이었다.
프레사는 그제야 갈증을 느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물은 까끌까끌하던 혀를 적시며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당신 집으로 갔었는데 문을 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저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리카온이 정중하게 사과했다.
분명 도와줬을 뿐인데도 프레사가 불쾌함을 느꼈을까 봐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프레사는 그를 인신매매범으로 오해했던 어제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오히려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할 일인걸요.”
리카온은 그제야 긴장했던 표정을 풀며 말했다.
“역시 몸이 좋지 않아 보이네요, 레사.”
“아, 일시적인 거예요.”
“일시적인 증상 때문에 그렇게 쓰러질 수 있습니까?”
리카온의 눈동자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다.
프레사는 굳이 설명을 더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설명하기 곤란했다. 죽은 척 위장하기 위해 심장을 멈추는 약을 먹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머리를 굴리던 프레사는 물잔을 돌려주며 미소 지었다.
“그냥 부작용이 조금…….”
“부작용?”
“먹는 약이 있거든요.”
뭐, 거짓말은 아니었다. 프레사는 당분간 해독제를 챙겨 먹어야 했다.
리카온은 그녀의 대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사뭇 심각한 표정이었다.
“부작용이 한 번 더 나타났다간 사람 잡겠군요. 괜찮은 약입니까?”
“아마도요?”
프레사가 직접 연구해 만든 약이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리카온은 그다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보라색 눈동자에는 의미 모를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 오지랖이 심하네.’
어느새 붉은 노을이 지는 중이었다.
프레사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리카온이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으나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
‘아픈 사람이 누굴 걱정하는 거야.’
리카온이 프레사를 어떻게 데려왔는지 모르겠다.
아마 스칼라의 도움을 받았겠지?
리카온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안색이 안 좋았다. 프레사는 속으로 혀를 차며 물었다.
“가이드는 돌아갔나요?”
“아, 네. 이걸 전해 달라고 하던데.”
리카온은 여러 번 접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프레사는 스칼라가 무슨 말을 적어 놨을지 덜컥 겁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받기를 거절하고 싶었지만, 리카온이 이상하게 여길까 봐 받았다.
다행히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상태는 괜찮은지,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다, 쾌유하시기를 바란다. 뭐 그런 상투적인 인사였다.
건강이 회복된 후에라도 언제든 스칼라 미치를 찾아 달라는 영업용 멘트도 쓰여 있었다.
‘다음에 다시 안 와도 되는데.’
프레사는 쪽지를 꼬깃꼬깃 접으며 리카온에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오늘 신세 많이 졌어요.”
“이웃끼리 돕고 살아야죠.”
리카온은 잘생긴 얼굴로 아련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노을이 지는 탓인지 금방이라도 툭 쓰러질 것 같았다.
프레사는 처음 배에서 마주쳤을 때 느꼈던 첫인상을 수정했다.
‘처연한 남자야, 처연한 남자.’
지금 보니 리카온은 처연한 병약 미남 그 자체였다.
게다가 이미 도움까지 받았으니 무시하기는 양심에 찔렸다.
어차피 이웃이 된 거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내면 도움을 받을 일이 분명 있을 터였다.
‘이웃이 생긴 것도 나쁘지만은 않네.’
분명 백작 가문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혼자가 편하다고 확신했는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역시 잘생긴 외모가 주는 신뢰감은 엄청나다니까.’
나름 이성적으로 살아온 프레사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걸 보면 리카온의 외모는 제법 특별했다.
‘홀리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프레사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리카온이 쿨럭쿨럭 기침했다. 저러다 피를 토하는 건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
리카온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쇳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배웅은 하지 못할 것 같네요.”
“아, 괜찮아요. 몸조리 잘하세요.”
프레사는 손을 내젓고서 서둘러 리카온의 집을 빠져나왔다.
‘무슨 병일까? 불치병이라면 아마 힘들겠지.’
집에 도착한 프레사는 화분에 숨겨 두었던 열쇠를 꺼내 문을 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열린 창문 너머로 리카온이 보였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돕고 싶은데…….’
리카온이 무슨 병인지 알려준다면 도움이 될 만한 약초를 길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불치병이라고만 짤막이 내뱉었을 뿐이니까.
‘모르겠다. 일단 내 미래부터 챙기고.’
프레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집으로 들어섰다.
챙겨온 보석은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처분할 예정이었다. 죽은 사람이 된 프레사가 가지고 있던 보석을 당장 팔기는 위험했다.
그러니 몇 년 동안 열심히 준비해온 일을 시작할 때였다.
‘돈 벌어야지, 돈.’
프레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지하로 내려가려다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배 속이 텅 빈 상태였다.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다.
프레사는 꼭 쥐었던 주먹을 사르르 풀며 주방으로 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