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7화
프레사는 약초 재배에 힘을 쏟느라 며칠 내내 바빴다.
그녀의 능력 덕분에 씨앗은 싹을 틔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성장했다. 텃밭은 며칠 사이에 그럴듯한 약초밭이 되었다.
이제는 다 자란 약초를 슬슬 약으로 만들 때였다.
‘무슨 약부터 만들지?’
프레사는 펜을 들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종이 위에 목록을 적어 나갔다.
일단 기본적인 해열제, 진통제, 소화제. 수요가 확실한 약들이었다.
‘하나쯤은 특별한 약이 필요하기는 해.’
번거롭긴 해도 파로 마을 외부로 나가면 약방이 꽤 있을 테니 이 마을에서만 살 수 있는 색다른 약을 만들고 싶었다.
‘연고를 만들어 볼까?’
프레사는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느릿느릿 흔들었다.
연고, 유용한, 다양한 나이.
그렇게 메모를 끝내는 순간.
똑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계십니까?”
뒤이어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프레사는 일어나려다 말고 잠시 비틀거렸다.
‘또 어지럽네.’
현기증은 점차 호전되는 중이었으나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다. 프레사의 예상보다 더 부작용이 길었다.
지난번처럼 갑작스럽게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눈앞이 아찔했다.
프레사는 흔들리는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가 현관문을 살짝 열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고개를 까딱였다.
“안녕하십니까, 바렛 영주님의 비서 알버트 던입니다.”
영주의 비서가 무슨 일이지?
“아, 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몇 가지 질문을 드리러 왔습니다.”
알버트는 다소 까탈스러운 인상이었다. 프레사는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알버트가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더니 레사를 힐끔 응시했다.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마을에 새로 정착한 분들께 간단한 안내를 드리고자 방문했을 뿐이니까요. 성함이?”
“레사예요. 어떤 안내죠?”
“확인 감사합니다, 레사. 이 마을은 바렛 영주님께서 소유하고 계십니다. 세금은 매달 마지막 날마다 전달해 주시면 됩니다. 분쟁은 영주님께서 재판으로 직접 해결하시니 문제가 생겼을 경우 성으로 찾아오십시오. 그리고…….”
간단한 안내라더니 설명이 꽤 길었다. 게다가 이미 길드를 통해 입주 전 충분히 안내받은 내용이었기에 지루했다.
그러나 마을 영주의 비서를 내쫓을 수는 없으니 잠자코 기다렸다.
마침내 긴 설명이 끝나고 알버트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궁금하신 점 있으십니까?”
“아뇨, 없어요.”
프레사는 미소 지으며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버트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으나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럼 모쪼록 새로운 곳에서 잘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알버트는 처음과 비슷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곧장 등을 돌렸다. 프레사는 그가 마차를 타고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문고리를 놓았다.
파로 마을의 장점 중 하나는 영주의 간섭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 이후로 영주와 마주칠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지만 않는다면.
“레사.”
깜짝이야.
프레사는 긴장을 풀고 있다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위를 바라보았다.
“안녕.”
리카온이 한 손으로 문을 붙잡은 채 서 있었다. 고양이도 아니면서 매번 소리도 없이 잘도 다가오는 남자였다.
“놀라게 하지 말아 주세요.”
“놀랐습니까? 표정은 전혀 아닌데.”
리카온의 말처럼 프레사는 그다지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물론 겉보기와 달리 심장이 콩콩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프레사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저만치 멀어진 마차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영주의 비서가 다녀갔어요.”
“저도 만났습니다. 깐깐해 보이던데요.”
리카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사람 눈은 다 비슷한 모양이었다. 하긴, 영주의 비서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테니 그 날카로운 표정이 이해가 갔다.
‘환경이 사람을 꽤 크게 좌우하는 법이지.’
그래도 미간에 주름이 깊던데, 주름에 효과적인 연고를 만들까?
프레사의 생각이 새로운 약 개발로 흘러가는 그때, 리카온이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이 마을 영주의 딸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에 시달린다던데.”
피부병? 프레사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뭐, 제가 발이 좀 넓습니다.”
리카온이 곧장 대답했다. 뿌듯한 표정을 감출 노력조차 하지 않는 뻔뻔한 사람.
프레사는 해사하게 웃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아, 네. 참 좋으시겠어요. 발이 넓으셔서요.”
“칭찬 고맙습니다.”
“칭찬 아니에요.”
“그래요?”
“네.”
프레사는 미소 지은 얼굴과 달리 단호했으나 리카온은 도리어 즐거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프레사는 그의 웃음이 그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카온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어쨌든 바렛 영주는 가족을 끔찍하게 여기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딸이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꽤 속이 쓰리겠죠.”
“그렇겠네요.”
프레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피부병이라.
‘어떤 상태인지,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프레사가 키우지 못한 식물은 아직 없었다. 그러니 무슨 병인지만 알아낸다면…….
“아, 레사. 제 용건은 따로 있습니다.”
리카온이 프레사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프레사는 생각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용건인가요?”
리카온은 어쩐지 말을 꺼내기 어려운 눈치였다.
심각한 이야기인가?
두 사람 사이에 그럴 일이 있었던가.
프레사가 의아해하는 그때 리카온이 대답했다.
“파로 마을의 밀밭 축제가 이틀 후부터 시작이라서요.”
“그렇군요.”
프레사는 그녀가 쓰러졌던 밀밭과 등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리카온이 찾아온 용건과 무슨 상관이지?
“같이 구경하러 가지 않을래요?”
상관이 있기는 했다.
축제, 축제라니.
필츠 왕국 수도에서는 축제가 자주 열렸다. 프레사는 로완 길레스피의 약혼자로서 그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녀야 했다.
앨리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번 축제는 아마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첫 번째 축제가 될 것이다. 게다가 지난번에 잠깐 다녀온 등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굳이 리카온과 가지 않아도 되겠지만, 뭐.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으니까.’
프레사는 잠깐 고민한 후 리카온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요. 같이 가요.”
리카온이 한여름의 햇살처럼 웃었다.
“기대되네요, 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