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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8화 (8/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8화

밀밭 축제 하루 전.

프레사는 그새 다 자란 약초를 수확해 연고로 만드는 작업 중이었다.

소프 저택에서 지낼 때 가족들 몰래 여러 번 약을 만든 적이 있었다. 미래를 위한 준비였다.

덕분에 지금은 어려운 배합의 약도 어느 정도 손쉽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기본적인 약은 몇 가지 완성했고, 이제는 피부에 직접 바를 수 있는 연고를 개발할 차례였다.

프레사는 조명을 켠 지하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집중했다.

약초를 몇 번이나 빻아 즙을 짜냈더니 손목이며 허리, 눈까지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아, 힘들어.”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아야야.”

프레사는 허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눈꺼풀을 깜빡였다. 벌써 노안이 올 것처럼 눈이 침침했다.

‘어디서 안경이라도 구해야겠어.’

이러다가 시력이 나빠지면 눈앞의 사람까지 구별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

프레사는 두어 번 심호흡한 후 막 만들어진 연고를 꺼냈다. 사실 아직 연고라고 부르기는 모호했다. 꾸덕꾸덕하지 않고 묽은 로션에 가까웠다.

프레사는 연고를 푹 떠서 손등에 문질러 보았다.

‘시원하네.’

피부의 열을 내리고 염증을 잡아 주는 효과가 있도록 배합했다. 마침 계절이 여름이니까 활용도가 높을 것 같아서였다.

‘대충 완성됐으니 이제 약초를 돌봐야겠어.’

프레사는 연고를 드러난 팔과 목덜미에 골고루 바르고 텃밭으로 향했다. 파릇파릇한 약초가 침침했던 시야를 환하게 했다.

“얘들아 잘 있었니? 덥지? 물 좀 줘야겠네.”

프레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물뿌리개를 집어 들었다. 물방울이 맺힌 푸른 식물들은 생기가 넘쳐 보였다.

약초를 어느 정도 다 키운 다음에는 꽃나무를 심어 볼까.

그렇게 고민하는 그때, 바스락.

‘무슨 소리지?’

정원 구석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사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인가?’

정원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이 몇 마리 드나들었다.

“나비니?”

그중에는 프레사가 벌써 정을 붙여 이름까지 지어 준 까만 고양이가 있었다. 몇 번 밥을 챙겨 줬더니 제집처럼 오고 갔다.

프레사는 나비가 목이 마를까 봐 고양이용 접시에 물을 담아 들고 다가갔다.

그런데 수풀 뒤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는 것은 작은 고양이가 아니라 낯선 소녀였다.

‘도둑?’

프레사는 접시를 무기로 휘두를 각오까지 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순간 소녀가 두 손을 위로 높이 올리며 다급히 외쳤다.

“도, 도둑 아니에요!”

남의 집에 무단침입한 주제에 도둑이 아니라니. 프레사는 접시를 쥔 손에 힘을 꽉 쥐었다.

그러자 소녀가 다시 한번 말했다.

“잠깐……. 숨은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숨바꼭질을…….”

숨바꼭질?

프레사의 미간이 좁아지는 순간 대문 쪽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계십니까?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우렁차고 사나운 남자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소녀가 다시 수풀 뒤로 후다닥 숨었다.

프레사는 몸을 살짝 틀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남자는 인상을 한껏 찡그리며 대답했다.

“혹시 어린 아가씨를 못 보셨습니까? 나이는 열셋쯤 됩니다. 키는 작고 머리는 갈색입니다.”

열세 살쯤 되는 소녀, 작은 키, 갈색 머리. 방금 수풀 뒤로 숨어 버린 소녀와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손가락을 들어 그쪽을 가리키려는데 소녀가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건가?’

프레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남자를 향해 말했다.

“저쪽으로 가는 것 같았어요.”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반대쪽을 가리켰다.

남자는 꾸벅 인사하고 서둘러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키가 큰 탓인지 넓은 보폭으로 단숨에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소녀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수풀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뭇잎이 마치 장신구처럼 드레스와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있었다.

프레사는 그것을 하나씩 떼어 주며 물었다.

“쫓기는 건가요?”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보닛을 쓴 소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얼굴을 가리는 보닛, 그리고 한여름에도 긴 소매와 장갑.

‘더위를 안 타는 걸까?’

그렇다고 치기에는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프레사의 침착한 눈길이 소녀를 쭉 훑어보았다.

‘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울긋불긋, 소녀의 피부가 뒤집힌 상태였다.

햇볕 알레르기.

프레사는 이 증상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과하게 몸을 가린 복장과 간지러워 긁은 흔적을 보니 거의 확실했다.

‘귀족 아가씨처럼 보이는데.’

그래도 한껏 치장한 걸 보면 몰래 나들이라도 나온 모양새였다.

프레사는 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했으나 모르는 척했다. 대신 앞치마 주머니에서 연고를 꺼내 건넸다.

“이거 발라요. 피부의 열을 좀 내려줄 거예요.”

“네?”

소녀가 갑작스러운 호의에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프레사는 방긋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어차피 실험용으로 만든 거라 돈은 필요 없어요. 대신 효과가 좋으면 알려줘요. 아, 너무 수상한가?”

프레사는 연고 통을 열어 제 손등에 쭉 짜서 발랐다.

“아무 문제는 없는 약이에요. 자, 괜찮죠?”

“아.”

소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연고 통을 냉큼 가져갔다.

“가, 감사합니다.”

소녀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프레사는 이 땡볕 아래에 아이를 계속 세워두고 싶지 않았다.

연고를 바르면 좀 나아지겠지만, 치료제는 될 수 없었다. 알레르기 치료제는 그녀의 전생에서도 특별히 없었으니까.

프레사는 대문을 손수 열어 주며 인사를 건넸다.

“다음번에는 대문으로 찾아오면 좋겠네요. 도둑으로 착각해 접시를 집어 던질 뻔했거든요.”

소녀는 두 손으로 연고 통을 소중히 감싸 쥐고 대문 밖을 향해 나섰다. 프레사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데이지예요! 꼭 다시 찾아올게요, 꼭.”

두어 걸음 걸어가던 소녀가 프레사를 돌아보더니 수줍게 웃었다.

프레사는 작은 아가씨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레사예요. 잘 가요, 데이지.”

데이지가 감격한 눈으로 프레사를 한참 쳐다보다가 이내 사라졌다. 프레사는 그 자그마한 뒤통수가 멀어질 때까지 응시했다.

만든 지 고작 몇 시간 안 된 약을 홀랑 줘 버렸으니 아깝기는 했다.

‘뭐, 다시 만들면 되니까.’

재료는 많았으니 새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데이지에게 연고가 잘 들어서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덜길 바랐다.

집으로 들어가려던 프레사는 문득 맞은편 집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번에는 좀 넉넉하게 만들어서 리카온에게도 줘야겠다.

그나저나 데이지는 어디 사는 아이일까? 무슨 이유로 숨어 있었던 걸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프레사는 잔뜩 긴장한 어린아이에게 이것저것 캐물을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겠지.’

프레사는 갑작스러운 소란으로 한참 동안 끊어졌던 콧노래를 다시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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