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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9화 (9/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9화

“조심해요.”

리카온의 목소리에는 미미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프레사는 그의 팔을 꽉 붙잡은 채 몸을 지탱하다가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붙을 생각은 없었는데.

프레사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리카온이 대수롭지 않게 되받아치더니 곧장 덧붙였다.

“뜨겁네요, 체온이.”

은근히 떠보는 듯한 말에 프레사는 방긋 웃었다.

“아, 원래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랍니다.”

“꽤 뜨겁던데.”

“리카온 씨가 너무 차가워서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얼른 영주님 구경하러 갈까요?”

프레사는 철저히 벽을 치며 시선을 휙 돌렸다. 리카온이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꾹 깨물다가 그녀와 걸음을 맞추어 걸어갔다.

등대 앞에는 바렛 영주의 방문에 호기심을 품은 사람들로 복작였다.

“바렛 영주님께서 축제를 축하하시며 긴히 전할 말씀이 있습니다.”

프레사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알버트 던. 바렛 영주의 비서였다.

‘긴히 전할 말?’

단순히 축하하러 온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레사, 이쪽으로.”

리카온은 프레사가 앞으로 나가기 쉽도록 큰 체구로 길을 뚫어 주었다.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영주의 얼굴이 가까이에서 보일 만큼 앞자리였다.

바렛 영주는 예상외로 젊었다. 많아 봤자 30대 중반, 딱 그 정도의 외모였다.

위로 올린 갈색의 머리카락과 짙은 녹색 눈동자, 그리고 다소 차가운 인상이었다.

‘좀 익숙한 얼굴인데.’

프레사는 바렛 영주의 얼굴을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리카온이 그녀의 옆구리를 손으로 콕 찌르며 속삭였다.

“그러다 영주님 얼굴 뚫어지겠습니다, 레사.”

“……누굴 닮아서 그랬어요.”

“그렇습니까? 잘생겨서 쳐다본 건 아니고?”

프레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리카온을 올려다보았다. 리카온이 그제야 만족한 듯 씩 웃었다.

“이제야 날 봐 주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보여주기에는 지나치게 다정한 말투와 목소리, 표정.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매번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만 해 온 프레사에게는 신선하면서도 적응하기 힘든 상대였다.

잠시 할 말을 잃었던 프레사는 곧 고개를 절레 가로저었다.

“정말 할 말 없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칭찬 고맙습니다.”

“칭찬 아니라니까요.”

“재주라면서요.”

“아, 네. 편할 대로 생각하세요.”

리카온의 뻔뻔한 태도에 프레사는 결국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리카온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기만 했다.

때마침 영주가 말문을 열었다.

“내 딸 데이지 바렛이 행방불명되었다.”

잠깐.

데이지 바렛?

프레사의 머릿속으로 작은 소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영주의 얼굴이 낯설지 않더라니, 설마 데이지의 아버지일 줄이야.

프레사는 그제야 무슨 일인지 파악했다.

‘몰래 빠져나왔던 거구나. 그래서 숨어 있었고.’

피부병을 앓는 영주의 딸.

그렇다고 해도 행방불명이라니, 괜한 일에 엮인 건 아닌지 슬슬 걱정되었다. 프레사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괜찮아요? 안색이 나쁜데.”

리카온이 금세 눈치를 채고 물었다. 프레사는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영주의 말이 몇 마디 더 이어졌다. 데이지의 행방, 찾아 주는 사람에게 줄 보상 등등.

아이를 찾는 아버지의 간절함보다는 화가 잔뜩 담긴 말투였다.

프레사는 저런 부모의 표정에 제법 익숙했다. 그녀가 늘 겪어온 일이었으므로.

‘영주는 마치 이 마을에 데이지가 있다는 걸 아는 것 같아.’

데이지는 분명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한 후 사라졌다. 그 어린아이가 멀리까지 가지는 않았을 테니 분명히 이 마을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리카온 씨, 저는 할 일이 생각나서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오늘 즐거웠어요.”

“벌써 돌아간다고요?”

리카온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축제는 아직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돌아간다고 하니 황당한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다음에 꼭 보상할게요.”

프레사는 리카온에게 서둘러 인사를 남긴 후 붙잡기도 전에 축제장을 떠났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더니 예상대로 데이지가 대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영주가 밀밭 축제에 와 있으니 데이지에게는 당장 숨을 데가 여기뿐이었을 것이다.

프레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지.”

“아, 레사!”

데이지는 프레사를 보자마자 빠르게 달려오더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 연고 대체 뭐예요? 피부가 너무 편안해졌어요. 보세요!”

데이지가 장갑을 벗더니 대뜸 프레사의 눈앞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울긋불긋 열이 올랐던 피부가 꽤 깨끗해진 상태였다.

‘이렇게 약효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프레사는 제 실력에 감탄하다가 본론부터 꺼냈다.

“가출했어요?”

“네?”

데이지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프레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러운 말투로 재차 말했다.

“영주님께서 데이지를 찾고 있어요.”

“아…….”

데이지의 커다란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프레사는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데이지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더니 훌쩍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영주님이…… 제 아버지는 맞는데요. 피부병 때문에 축제 구경을 못 하게 하셨어요. 그래서 몰래…….”

데이지는 끝내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프레사는 이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데이지는 그저 1년에 한 번뿐인 밀밭 축제를 구경하고 싶은 아이였고, 영주는 그런 딸을 걱정해 외출 금지를 선언한 아버지였다.

학대를 의심해 부풀었던 마음이 단번에 사그라졌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 혼자 돌아다니도록 두는 건 너무 위험했다. 작은 마을이라고 무조건 안전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이런 곳에서 실종되면 찾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프레사는 데이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데이지는 훌쩍거리며 울다가 프레사의 눈치를 살폈다.

“영주님께서 지금 무척 걱정하고 있으니 돌아가요. 그리고 피부병 때문에 축제 구경을 못 하는 거라면, 제가 준 연고가 있잖아요.”

프레사는 데이지를 잘 달래서 영주와 만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아직은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였으니까.

게다가 데이지 또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데이지의 녹색 눈동자가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아마 온종일 영주와 그 기사들을 피해 다녀야 했으니 고민이 될 법도 했다.

데이지는 한참 고민하는 듯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프레사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잠자코 기다렸다.

마침내 데이지가 확신이 선 얼굴로 프레사를 응시했다.

“레사가 같이 가 줄 거예요? 그러면 돌아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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