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0화
바렛 영주의 앞에 도착하자 그 옆에 선 데이지가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냉담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도 영주의 두 눈가가 붉었다.
‘어떡해. 울었나 봐.’
딸의 가출에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반면 데이지는 아버지와 화해를 했는지 그 나이대 소녀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프레사가 데이지를 향해 마주 미소 짓는 순간 영주가 입술을 열었다.
“내 딸을 찾아 주어서 고맙다. 그런데.”
보통 ‘그런데’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문장은 늘 별로였다.
“그대가 내 딸을 만나 이상한 연고를 주었다고 들었다.”
“네, 맞아요.”
‘이상한 연고’라는 표현에 기분이 살짝 상했으나 영주에게 반박할 수는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바렛 영주가 프레사를 위아래로 훑더니 알버트에게 귓속말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귓속말이라니.
프레사가 찜찜한 기분을 느끼는데, 알버트가 영주의 말을 전했다.
“무슨 연고인지 궁금하다고 하십니다. 허가를 받지 않았을 텐데 위험한 재료가 들어간 것은 아닌지도요.”
아, 그 얘기였구나.
하긴. 본인의 소중한 딸이 남이 준 약을 덕지덕지 발랐는데 의심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
“특별한 약초가 들어가진 않았습니다, 영주님. 이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를 사용했어요. 저도 지금 바르고 있고요.”
프레사는 소매를 뒤적여 연고 통을 꺼내 보이며 솔직하게 설명했다. 그런데도 알버트와 바렛 영주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프레사는 연고 통을 열어 연고를 듬뿍 떴다. 그리고 햇볕에 뜨거워진 손등과 팔 위에 문질러 발랐다.
영주와 알버트, 그리고 기사들의 시선이 죄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로 고정됐다.
프레사는 톡톡 두드려서 흡수되도록 마무리한 다음 말했다.
“따님의 피부병 원인은 바로 햇볕입니다. 지금처럼 햇볕이 뜨거울 때 증상이 심해지고요. 이 연고는 피부의 열을 내려서 증상을 완화해 주는 역할을 해요.”
“햇볕이라니.”
영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사계절 내내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는 파로 마을에서 햇볕을 쬐면 안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앞으로도 햇빛을 보면 안 되는 거예요?”
데이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되도록 자제하는 편이 낫겠지만, 영영 그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요. 바르는 약뿐만 아니라 먹는 약도 개발할 예정이에요. 물론…….”
프레사는 또렷한 눈으로 바렛 영주를 응시했다. 영주는 계속 말하라는 듯 턱 끝을 살짝 세운 채 그녀를 마주 보았다.
프레사는 미소 지으며 이어 말했다.
“영주님께서 허가해 주신다면요.”
기회가 찾아왔으니 붙잡는다.
프레사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우연히 만난 영주의 딸 데이지.
가벼운 호의로 내민 연고.
직접 영주의 앞에 서서 본인이 개발한 약을 설명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모두 프레사가 이곳에 와서 이룬 것이다.
프레사는 날카로운 바렛 영주와 한참 동안 시선을 교환했다. 영주는 잠시 고민하더니 나직이 질문했다.
“정말 직접 만든 연고인가?”
“그렇습니다, 영주님. 제 텃밭에서 약초를 기르고 있습니다. 종류도 꽤 많고요. 이미 만들어진 기본적인 약도 있어요.”
프레사가 대답하자마자 영주는 데이지를 힐끔 바라보았다.
데이지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그 눈동자 가득 간절한 바람이 느껴졌다.
영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다가 다시 프레사를 응시했다.
“확실히 그 연고를 바르고 나서 내 딸의 피부가 몰라보게 나아졌네.”
다행히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프레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주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대도 알겠지만, 이 마을에는 약방이나 약제사가 없네. 그래서 간단한 약을 사더라도 인근 도시를 방문해야 하지.”
프레사는 영주의 말을 끊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영주는 알버트와 눈빛을 주고받더니 마침내 프레사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그대가 정말 자신한다면, 이 마을에서 약방을 운영해 줄 수 있겠는가? 내 딸의 병을 치료할 약도 개발해 줬으면 하는데. 지원은 충분히 하겠네.”
“감사합니다, 영주님.”
프레사는 활짝 미소 지으며 흔쾌히 영주의 부탁을 수락했다.
데이지가 입 모양으로 ‘고마워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