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2화
얼마나 흘렀을까.
프레사는 조심스럽게 리카온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 보았다.
‘열이 내렸어.’
활활 타오르는 용암 같던 체온이 어느새 미열로 떨어졌다.
효과가 있다는 증거였다.
제드는 자꾸만 마른침을 삼키며 리카온이 왜 깨어나지 않는지 의문스러워했다.
그때마다 프레사는 조용히 기다리자고 말할 뿐이었다.
긴장되기는 프레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른 아침, 새소리가 들려왔고 리카온은 여전히 얕은 숨 쉬기만 반복했다.
푸르스름한 빛이 방으로 스며들었다.
‘왜 의식을 찾지 못하는 걸까?’
프레사는 슬슬 불안해졌다.
피곤함이 몰려왔으나 잠을 잘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눈 좀 붙이십시오.”
제드가 피곤한 눈으로 프레사를 바라보았다.
프레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건 제드 씨도 마찬가지예요.”
건조한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가 도로 붙었다.
제드는 리카온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전 이런 일에 익숙해서 말입니다.”
리카온이 앓는 일이?
아니면 다른 이야기일까.
프레사는 머리가 무거운 탓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마실 물을 가져올게요.”
멍하니 리카온을 바라보던 프레사는 찬물이라도 마시면 정신이 깰까 싶어 서둘러 침실을 나섰다.
깨끗한 컵에 차가운 물을 가득 따르는데, 갑자기 제드가 소리쳤다.
“레사 님! 깨어나셨습니다!”
프레사는 물이 담긴 컵을 챙기지도 못하고 황급히 침실로 돌아갔다.
제드가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저는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제드는 프레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빠르게 침실을 떠났다.
프레사는 그제야 리카온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침대 머리에 상체를 기대고 앉은 리카온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안녕.”
힘없이 늘어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여전히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괜찮아요?”
프레사는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물었다.
“머리가 조금 무겁네요. 들어 있는 게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실없는 소리를 할 기력이 남은 걸 보면 괜찮은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몸이 안 좋으면 말하지 그랬어요. 숲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미안합니다. 갑작스러워서 놀랐을 텐데…… 쿨럭…….”
리카온이 말을 하다 말고 잘게 기침했다.
프레사는 미리 준비해 뒀던 차를 건넸다.
“마셔요. 기력 회복에 도움을 주는 약차예요.”
리카온은 군말 없이 약차를 마시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쓴데요.”
“몸에 좋은 건 원래 써요. 남기지 말고 다 마셔요.”
프레사는 얼른 마시라는 의미로 찻잔을 톡톡 두드렸다.
리카온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순순히 차를 다 마셨다.
프레사는 그가 다 마신 빈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리카온의 지친 눈동자가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제드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이 해독제를 만들었다고.”
“맞아요. 효과가 있었던 것 같네요.”
“……효과가 있을 줄 몰랐던 겁니까?”
“사실 처음 만들어 봤어요.”
담백하기만 한 프레사의 대답에 리카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그 자신감 덕분에 당신을 살렸으니까요.”
프레사는 입술을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드디어 긴장이 풀렸다.
리카온은 푸르스름한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유명한 약제사들도, 의사도 해독제를 만들지 못했는데.”
그의 시선이 다시 프레사에게 돌아왔다.
묘한 감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어떻게 한 겁니까?”
“책을 보고 만들었어요. 마침 재료도 다 있었고요.”
프레사는 사실대로 말했다.
물론 식물을 단숨에 성장시키는 그녀의 능력은 쏙 빼고.
리카온은 그다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거짓말. 말했잖아요, 레사. 내로라하는 사람들도 해독제를 만들지 못했다고.”
“그 사람들이 저만큼의 실력이 없었나 보죠.”
프레사는 대수롭지 않게 되받아치고 바닥에 두었던 대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물수건을 꾹 짜낸 후 리카온에게로 내밀었다.
“밤새 땀을 흘려서 찝찝할 테니 일단 닦으세요. 씻는 건 아직 무리일 거예요.”
리카온이 두 눈을 느릿느릿 깜빡였다.
프레사가 얼른 받으라며 물수건을 가볍게 흔들었으나 리카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요. 닦아 줘요.”
“……진심이에요?”
“진심입니다. 아직 환자잖아요.”
리카온이 눈매를 아래로 늘어트리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프레사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하는 수 없이 손을 움직였다.
이마와 볼을 닦고 나서는 눈가를 닦아야 했는데, 리카온이 너무 뚫어질 듯 쳐다보는 바람에 곤란했다.
프레사는 물수건을 살짝 떨어트리며 말했다.
“눈 감아 보세요.”
“뭘 하려고요?”
리카온이 또 특유의 웃음기를 머금고 물었다.
프레사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눈두덩도 닦아야 해서요. 눈을 찌를 수는 없잖아요.”
“아, 네.”
미미한 실망감을 드러낸 리카온의 두 눈이 감겼다.
프레사는 부드럽게 눈가를 닦은 뒤 깨끗한 물수건을 새로 준비했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리카온의 옆구리를 응시했다.
“상처 다시 확인해도 될까요? 거기에도 약을 발랐거든요.”
리카온의 눈썹이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갔다.
“상처를…… 봤습니까?”
“원인을 알아야 치료제를 만들 테니까요.”
“그러니까 벗은 제 몸을 봤다는…….”
리카온이 또 이상한 소리를 내뱉으려고 했다.
미묘한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그 사실을 눈치챈 프레사는 재빨리 그의 말을 잘랐다.
“다 벗기지도 않았고요. 상처만 확인했을 뿐이에요.”
“이번에는 다 벗어 볼까요? 그럼 살펴보기 더 쉬울 테니까.”
리카온은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다.
밤새 앓았던 사람치고는 의욕이 넘치기까지 했다.
평소였다면 굳이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리카온은 환자였다.
프레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감기 걸려요. 지금은 옆구리면 충분해요.”
리카온이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럼 다음에는 옆구리 말고도…….”
프레사는 리카온이 말이 끝내기 전에 이불을 휙 걷었다.
그리고 리카온의 상의를 살짝 올려서 상처를 살펴보았다.
벌어졌던 틈이 조금은 줄어들었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여전히 미약한 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독이라고 부르기에는 모호한, 검은색 연기가.
‘약을 더 만들어야겠어.’
아무래도 당분간은 꾸준히 약을 발라야 할 듯했다.
“약을 더 만들어 볼 테니까, 일단 남은 걸 가져가시고요. 하루 한 번 발라 주고 상처는 늘 청결하게 유지하세요.”
차분하게 설명을 끝낸 프레사는 미련 없이 상의를 덮었다.
이불을 도로 덮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리카온은 어딘가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프레사가 대답하라는 듯 눈꼬리를 치켜세우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사는 이제야 할 일이 끝난 기분이었다.
약방 개장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일을 겪은 탓인지 온몸이 무거웠다.
‘일단 잠부터 좀 자야겠어.’
벌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제드 씨가 돌아오면 집으로 가셔도 돼요. 전 눈 좀 붙일게요.”
프레사는 두 팔을 위로 쭉 올리며 작게 하품했다.
거실 소파에서 잠깐이라도 잠을 잘 생각이었다.
대야를 챙겨서 침실 문을 여는데, 리카온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레사.”
“네?”
프레사는 등을 살짝 돌려 리카온을 쳐다보았다.
리카온이 전에 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 준 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상하리만치 간지러운 인사였다.
평생 잊지 않겠다니.
프레사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려 서둘러 침실을 빠져나왔다.
이런 식의 인사는 처음이었다.
하여튼 이상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