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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3화 (13/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3화

파로 마을 최초의 약방이 개장한 지 사흘이 지났다.

영주의 허가까지 받은 실력자라는 소문이 그새 퍼진 탓에 수입이 나쁘지 않았다.

간단한 약을 사기 위해 도시까지 나가야 했던 마을 사람들은 약방을 크게 반겼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에 시달렸던 영주의 딸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화제성이 불러온 결과가 나쁘지 않았으나 프레사는 조금 지친 상태였다.

프레사는 리카온의 일 이후로 부쩍 피곤해졌다.

매일 이른 새벽부터 약방에서 판매할 약을 만들어야 했고, 영주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데이지의 연고와 약도 준비했다.

리카온의 상처도 살펴야 했으며 그 복잡한 해독제를 몇 번이나 만들었다.

그래도 이왕 도와주기로 한 거 끝까지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리카온은 사례를 충분히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레사는 그가 약방 일을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게다가 리카온은 아직 완치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잦게 기침했고 상처 또한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안색도 창백했으며 쉽게 피곤해했다.

또 쓰러질까 봐 걱정돼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했으나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오랜 기간 중독된 상태였으니 회복에도 시간이 걸리겠지.’

그게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완전히 치료할 수 있는지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프레사는 의사는커녕 진짜 약사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전생의 기억과 이곳의 책으로 익힌 지식이 전부였다.

아카데미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리카온이 불쑥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프레사의 생각이 뚝 끊어졌다.

프레사는 약장에 새로 만든 약을 채워 넣으며 대답했다.

“오늘도 바쁘구나, 같은 생각이요. 먼지는 다 터셨나요?”

리카온이 씩 웃으며 먼지떨이를 휙휙 흔들었다.

“물론이죠. 먼지 한 톨 없을 겁니다.”

“잘하셨어요. 그럼 제드 씨를 도와주실래요?”

프레사는 열린 문 너머를 눈짓했다.

얼떨결에 리카온과 함께 약방의 일을 돕게 된 제드가 심각한 얼굴로 정원에 서 있었다.

그는 프레사가 요구한 약초를 따는 중이었다. 나무로 엮어 만든 바구니를 든 모습이 제법 잘 어울렸다.

그러나 리카온은 제드를 도울 생각이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제드는 혼자서도 잘할 겁니다. 전 여기서 당신을 돕고 싶은데.”

“정 그러시다면…….”

프레사는 손을 뻗어 의자를 가리켰다.

“저기 얌전히 앉아 계세요.”

“그건 일이 아니잖아요, 레사.”

리카온이 어깨를 으쓱하며 되받아쳤다.

그러나 프레사의 의지는 확고했다.

“당신은 앉아 있기만 해도 충분해요, 리카온 씨.”

거짓 하나 없는 진심이었다.

리카온의 잘생긴 얼굴 덕분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홀린 듯 들어와 약을 사 가는 있었으니까.

아직 아픈 사람에게 험한 일을 시킬 수야 없었다.

그러나 리카온은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냥 먼지나 마저 털겠습니다.”

“한 톨도 없이 다 치우셨다면서요.”

“숨만 쉬어도 쌓이는 게 먼지니까요.”

리카온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프레사 앞의 약장을 툭툭 두드렸다.

보송보송한 먼지떨이가 프레사의 눈앞을 휙휙 스쳐 지나갔다.

걷어 올린 소매 탓에 의외로 탄탄한 그의 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푸른 핏줄이 툭 불거져 있었다.

‘손목도 가늘 줄 알았는데.’

기다란 손가락과 커다란 손이 프레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 집중하자. 집중.’

프레사는 다시 바구니에서 약병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순간 손이 미끄러져 약병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당황해서 손을 뻗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데, 탁.

“조심해야죠, 레사.”

리카온이 프레사의 어깨를 뒤로 잡아당기더니 빠른 속도로 약병을 받았다.

그 덕분에 약병이 깨지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프레사는 안도하며 리카온을 돌아보았다.

아.

또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리카온은 아직 프레사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듯 붙잡고 있었다.

오묘한 자색 눈동자가 사뭇 다정하게 프레사를 응시했다.

“괜찮아요?”

프레사는 나직한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조금 빠르게 그의 품을 벗어났다.

하여튼 사람 홀리는 데에는 최상인 얼굴이었다. 분명 아픈 사람인데도 독특한 분위기 탓인지 도리어 매혹적이었다.

“손이 미끄러졌어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유리병이 깨졌으면 다쳤을 겁니다. 역시 당신 옆에 제가 있어야겠네요.”

리카온이 능글맞게 대꾸하더니 약병을 약장에 올려놓았다.

작은 약병 속에 담긴 녹색 액체가 살짝 흔들렸다가 가라앉았다.

리카온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물었다.

“이제 또 시키실 일은?”

잠시 리카온의 눈을 마주 본 프레사는 말없이 의자를 가리켰다.

리카온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사양하겠습니다.”

“아쉽네요.”

손님을 더 끌 기회인데.

프레사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때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사! 레사 언니!”

데이지가 드레스를 힘껏 움켜쥐고 빠르게 달려왔다.

사람들이 우렁찬 목소리에 깜짝 놀라 그녀를 힐끔거렸으나 신경조차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햇볕을 가리기 위한 보닛과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상처투성이였던 피부가 제법 많이 아물었다.

레사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데이지를 맞이했다.

“데이지, 뛰지 말라니까요.”

“그치만 약방이 문 닫는 시간에 딱 맞춰서 오느라 어쩔 수 없었어요! 아, 리카온 아저씨 안녕하세요.”

리카온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데이지는 이미 그를 아저씨로 지칭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아저씨 아니라니까.”

“저한테는 아저씨 맞는데요?”

“네, 네.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요.”

결국 이번에도 리카온이 먼저 물러섰다.

어린아이와 말싸움을 해봤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을 테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오늘도 승리자가 된 데이지는 금세 작은 새처럼 발랄하게 재잘거렸다.

“오늘 밀밭 축제가 마지막 날이래요. 꼭! 언니랑 구경하고 싶어서요.”

데이지의 두 볼이 수줍게 물들었다.

프레사는 두 눈을 깜빡였다.

벌써 축제가 마지막 날이라니.

이런저런 일 때문에 제대로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만들어야 할 약이 산더미인데…….’

약방은 폐장 시간이었지만, 프레사는 퇴근 후에도 할 일이 많았다.

“오늘은 제국산 마법 폭죽을 터트릴 거래요. 같이 가요, 네?”

데이지가 프레사의 손을 꼭 붙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제국산 마법 폭죽?

프레사의 호기심이 흔들거렸다.

마법사라는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이곳이 소설 속이기는 해도, 마법사는 아직 만난 적이 없으니까.’

프레사가 쉽게 결정하지 못하자 리카온이 슬쩍 끼어들었다.

“꽤 근사할 겁니다. 제가 구경하기에 좋은 위치를 알고 있는데.”

“아저씨도 가려고요? 전 언니랑 둘만 가고 싶었는데…….”

데이지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리카온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리카온은 그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잖아요, 레사.”

“맞아요! 언니, 오늘 하루만! 네? 네? 아버지께 허락도 받았단 말이에요!”

데이지까지 재빨리 거들고 나섰다.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서 보던 프레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조금만이에요.”

“야호!”

데이지가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프레사는 꼭 새로운 여동생이 생긴 것 같은 묘한 기분으로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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