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4화
등대 입구를 지키는 젊은 남자 관리인이 리카온을 보자마자 문을 열어주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프레사는 리카온과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자 소란스럽던 풍경과 자연스럽게 단절됐다.
두 사람은 둥글게 이어진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벽에 걸린 은은한 등불이 길을 밝혀 주었다.
리카온은 먼저 앞서 걸었고 프레사는 그의 소매를 붙잡은 채 뒤따랐다.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두근거렸다.
‘꼭 밀회라도 하는 기분이네.’
바깥에서는 폭죽이 연달아 터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 퍼지는 등대 내부는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계단을 몇 바퀴쯤 돌았을 때, 마침내 등대의 가장 꼭대기에 다다랐다.
“다 왔습니다.”
리카온이 프레사의 손을 꽉 잡아당겨 올라오기 쉽도록 도왔다.
프레사는 난간을 붙잡고 서서 폭죽이 터지는 하늘을 응시했다.
“와.”
짧은 감탄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어두운 하늘, 반짝이는 별, 그곳을 물들이는 색색의 마법 폭죽.
아마 소프 백작 가문에 계속 속해 있었다면 영원히 구경조차 하지 못할 값진 경험이었다.
그동안의 비참함과 슬픔이 조금이나마 사라지는 듯했다.
“예쁘네요.”
리카온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프레사는 문득 그 말이 그녀를 향한 표현이라고 착각했다.
분명 폭죽을 보면서 한 말일 텐데, 그 눈동자가 프레사에게 고정된 탓이었다.
‘하마터면 착각할 뻔했네.’
프레사는 잠깐 리카온을 쳐다보다가 폭죽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네요. 폭죽이 참 예뻐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팍, 팡, 슈욱.
폭죽 터지는 소리가 쉬지 않고 이어졌다.
“폭죽 말고……. 당…….”
리카온이 무슨 말을 내뱉었으나 프레사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끊어져서였다.
“뭐라고 하셨나요?”
프레사는 목소리를 조금 크게 높여 물었다.
그러자 리카온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프레사가 계속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리카온이 두 팔을 교차시키며 아니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프레사는 그제야 별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싶어 마법 폭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커다란 나무를 그린 폭죽이 활짝 피었다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프레사는 작게 아쉬움이 남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제 끝인가 봐요.”
“순식간이죠. 그렇기에 특별한 거고.”
리카온이 나직이 내뱉었다.
그답지 않게 진지한 말이었다.
프레사는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리카온이 씩 웃고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내려갈 시간입니다, 레사. 집으로 데려다줄게요.”
프레사는 그의 탄탄한 손을 잠시 쳐다보다가 가볍게 맞잡았다.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등대 아래로 내려오니 모든 순간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하나둘 밀밭을 떠나는 중이었다.
시장은 아직 열린 가게가 제법 남아 있었다.
폭죽을 구경하느라 저녁을 먹지 못한 사람들이 가판대 앞에 멈추어 섰다.
닭고기꼬치나 찐 감자, 옥수수 같은 간단한 먹거리가 후각을 자극했다.
“배고프지 않아요?”
프레사의 마음을 어떻게 읽었는지 리카온이 불쑥 말을 걸었다.
프레사는 습관처럼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버터로 익힌 통감자를 가리켰다.
“전 저거요.”
“마음이 통했네요. 저도 감자 좋아하는데.”
시원하게 미소 지은 리카온이 금세 통감자를 사 왔다.
프레사는 꼬치로 감자를 콕콕 집어서 먹었다.
너도나도 다 아는 익숙한 맛이었다.
그래서 더 맛있는 거겠지만.
‘맛있어.’
포슬포슬한 감자와 버터의 조합은 언제나 옳았다.
프레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잊고 시장 구석에 멈추어 서서 감자를 먹는 데에 집중했다.
그런데 정작 감자를 좋아한다던 리카온은 프레사가 먹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프레사는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리카온 씨도 배고프다면서요. 왜 안 드세요?”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서요. 잘 먹네요. 누가 감자를 빼앗으러 오는 줄 알았습니다.”
리카온이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바람에 프레사는 민망했다.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당신이 잘 먹었으면 됐습니다. 사실 별로 입맛이 없어서요. 남은 건 가져가요.”
리카온은 감자가 담긴 종이를 잘 감싸서 프레사에게 내밀었다.
프레사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지금 보니 리카온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또 지난번처럼 갑자기 쓰러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리카온 씨, 괜찮아요?”
“조금 피곤하긴 하네요.”
리카온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역시 오늘도 무리한 거야.’
리카온은 왜 이렇게 본인의 상태에 무관심한 걸까?
프레사는 한바탕 잔소리를 쏟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아픈 사람에게 괜히 감정을 퍼붓고 싶지 않았다. 대신 얼른 집으로 돌아가 쉬게 해주는 편이 나았다.
“빨리 가서 쉬세요. 내일은 출근 안 하셔도 괜찮아요. 제드 씨만 계셔도 충분하니까요.”
제드는 프레사의 능력을 보고 난 후부터 태도가 달라졌다.
리카온이 이상하게 여길 만큼 프레사에게 호의적이었다.
아직은 비밀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지만, 될 수 있으면 조심해 줬으면 좋겠다.
어쨌든 지금은 리카온을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었다.
이왕이면 내일도 푹 쉬기를 바랐으나 리카온은 아니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고.”
“그래도 무리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레사.”
리카온이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프레사는 그가 이럴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평소와는 어딘가 다른 사람 같았다.
리카온은 프레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제드와 당신 둘만 두는 게 싫어서요.”
“리카온 씨, 그래도…….”
프레사가 다시 한번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그때, 다시는 듣지 못하리라 여겼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꽃놀이 너무 낭만적이었어요, 로완!”
“그러게. 당신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좋아, 리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로완 길레스피와 이제는 길레스피 백작 부인이 된 앨리샤였다.
‘저 인간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불청객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바로 등 뒤였다.
이대로 서 있다간 마주치게 될 것이다.
‘들키면 곤란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특히나 저 두 사람에게는 더욱.
프레사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데 리카온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손에 들고 있던 감자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프레사는 얼떨결에 리카온과 함께 바로 옆의 좁은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리카온의 품에 바짝 안긴 상태였다.
쿵, 쿵.
리카온의 심장 소리가 프레사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리카온 씨?”
“쉿.”
리카온이 눈매를 휘어 웃으며 검지로 제 입술을 꾹 눌렀다.
길레스피 백작 부부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덩달아 프레사의 심장도 빠르게 날뛰었다.
“하필 축제가 끝나는 날 도착하다니 아쉬워요!”
“축제 말고도 다른 걸 즐기면 돼, 리샤.”
“그래도……. 아, 다른 데도 가 볼까요?”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고민하자. 오늘은 너무 늦었어.”
로완과 앨리샤가 다정한 대화를 나누며 멀어졌다.
다행히 골목에 숨은 프레사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리카온이 프레사를 놓아주었다.
“레사, 괜찮습니까?”
“아, 고마워요.”
프레사는 시선을 아내로 늘어트렸다.
리카온이 무엇을 알고 도와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곤란해 보이길래.”
프레사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읽었는지 리카온이 차분히 말했다.
프레사가 당황했다는 걸 그 짧은 시간 동안 알아차리다니.
역시 리카온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로완과 앨리샤가 왜 이곳에 온 거지?’
딱히 일 관련해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시기상으로 보면 신혼여행인가?
하필이면 파로 마을을 여행지로 삼다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신혼여행이라면 꽤 오랜 시간 머무를 텐데, 이 좁은 마을에서 무사히 그들의 시선을 피해 다닐 수 있을까.
“그럼 이제 집으로 가죠. 꽤 늦었네요.”
리카온이 골목 밖으로 프레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프레사는 고민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온의 표정이 낯설 만큼 싸늘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