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5화
“길레스피 백작이 말입니까?”
제드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리카온은 무감정한 얼굴로 불빛이 꺼진 맞은편 집을 내다보았다.
로완 길레스피와 마주쳤을 때 프레사의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놀라고 당황한, 리카온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설마 아직도 마음이 남아 있는 건가?’
프레사와 로완이 한때 약혼한 사이였다는 사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리카온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그래.”
“왕국의 검이 왜 파로 마을에…….”
“신혼여행인 것 같던데.”
일행과 나눈 대화 내용으로 보면 그랬다.
그 일행은 아마도 프레사 소프를 버리고 새로 얻은 아내겠지.
리카온의 마른 입술 틈새로 비소가 흘러나왔다.
왕국을 수호하는 자의 마음이 그렇게 깃털처럼 가벼워서야.
“그렇다면 전하께서도 조심하셔야겠군요.”
제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필츠 왕국까지 소문이 퍼져 황제 폐하께서 신경을 쓰고 계십니다.”
“우리 형님께서는 늘 걱정이 많으시지.”
리카온은 다정한 형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아직 황제에게 해독제를 찾았다는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
황제가 그 누구보다 그의 귀환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지금 이곳에서의 생활이 나름 즐거운 탓이었다.
“이제 돌아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처도 많이 아무셨는데요.”
제드가 마치 리카온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제로 리카온은 프레사의 해독제 덕분에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끊어졌던 마력이 다시 꿈틀거렸고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됐다.
프레사가 이루어낸 기적이었다.
제국의 마법사들, 신관 심지어 대신관까지 리카온의 독을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프레사는 홀로 그 일을 해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 프레사 소프가 그 정도 능력을 지녔을 줄은.’
분명 소프 백작 가문의 무능력한 딸이라며 손가락질당하지 않았던가.
바로 코앞에 두고도 그녀의 능력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소프 백작의 수준도 알 만했다.
‘리카온 씨.’
돌연 프레사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쓸모없는 감정이 자꾸만 리카온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게다가 불쾌하기만 한 로완 길레스피의 등장으로 그 마음은 더 어수선해졌다.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리카온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아직 때가 아니야, 제드.”
적어도 벌레 하나쯤은 해결하고 가야지.
뒷말이 혀끝에서 뭉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