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8화
프레사는 리카온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황급히 약장 뒤로 몸을 숨겼다.
리카온과 제드도 덩달아 그녀를 따라 숨었다.
제드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레사 님, 왜 숨는 겁니까?”
“그럴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당신들까지 숨을 필요는 없잖아요.”
프레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꾸하더니 리카온에게 화살을 돌렸다.
“리카온 씨는 대체 왜 숨은 거예요?”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 뭐야.
프레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리카온과 제드의 행동이 아니었다.
곧 현관문을 통과해 들어올 원작의 주인공들이었다.
「저들이 누구길래 그렇게 놀라느냐?」
리스가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로완과 앨리샤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있어요, 영원히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들.’
리카온과 제드가 옆에 있어서 리스에게 대답하지 못했지만, 프레사의 속마음은 그랬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
“누구 계세요?”
앨리샤의 부드럽고 따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나갔다간 죽은 척 도망친 게 물거품이 될 것이다.
주인공들이야 어떻게 넘긴다고 쳐도, 소프 백작 가문까지 소문이 퍼질 테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그때 리카온이 제드를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제드, 나가서 상대해.”
“예? 제가요?”
제드가 깜짝 놀란 눈으로 리카온을 응시했다.
“전 약에 대해 하나도 모릅니다. 무식하다고요.”
“제가 뒤에서 어떤 약인지 알려줄 테니까 약병을 들어서 보여줘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프레사까지 리카온의 의견에 동조했다.
제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으나, 리카온이 턱 끝으로 약장 너머를 가리키자 곧장 나섰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약을 찾으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햇빛 알레르기에 좋은 약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제 피부가 좀 많이 약해서요.”
앨리샤가 한여름의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히 제드도 잘 아는 연고를 사러 온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왕국까지 연고 소식이 전해졌을 줄이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드는 연고가 보관된 뒤쪽의 약장으로 향했다. 프레사는 조심스럽게 그들을 훔쳐보았다.
하늘색 보닛을 쓴 앨리샤가 두 눈을 빛내며 로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로완은 무심한 표정을 짓고 선 채 오만한 눈으로 내부를 훑었다.
“제대로 된 허가는 받은 곳인가?”
“예? 아, 물론입니다. 바렛 영주님께서 직접 허가해 주셨습니다만.”
연고를 꺼내 돌아간 제드가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말투에 묘한 가시가 느껴졌다.
제드는 어엿한 약방의 모범 직원이었다. 약방의 존재를 의심하니 기분이 나쁜 듯했다.
프레사 또한 로완의 발언에 어이가 없었다.
‘약혼자를 두고 바람이나 핀 주제에 고결한 척하기는.’
솔직히 원작의 주인공이나 되면서 비겁하게 바람을 피운 것부터 이미 최악이었다.
‘버린 쓰레기는 줍지 말았어야지.’
속으로 혀를 쯧쯧 차는데, 로완이 특유의 재수 없는 말투로 재차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젊은 여자가 약방의 주인이라고 했다. 그쪽은 아무리 봐도 주인은 아니군. 사장은 어디 갔지?”
사전 조사까지 치밀하게도 했네.
고작 작은 마을의 약방에 들르면서 쓸데없이 꼼꼼할 일인가.
“사장님은 몸이 좋지 않아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제가 그분의 수제자로서 철저히 가르침을 받았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황해서 대충 얼버무릴 줄 알았는데 제드는 굉장히 침착했다.
로완이 짜증을 드러내며 제드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당신, 어디서 마주친 적이 있지 않나? 낯이 익는데.”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흔한 얼굴이라서. 더 필요한 게 없으시면 나가 주시겠습니까? 점심시간이라서 말입니다.”
제드와 로완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조마조마하게 그들을 지켜보던 프레사까지 긴장했다.
그러자 리카온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속살거렸다.
“긴장 풀어요. 제드는 어렸을 때 연극배우가 꿈이었으니까.”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제드가 연극배우라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로완, 그만 가요. 네? 오늘 일정도 바쁘잖아요.”
다행히 앨리샤가 로완의 팔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로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제드를 응시했지만, 순순히 앨리샤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다.
참 보기 좋은 부부였다.
물론 겉으로는.
프레사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제드가 곧장 다가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레사 님은 저 인간과 아는 사이입니까?”
프레사는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할지 잠깐 고민한 후 상큼하게 말했다.
“진상 손님이었거든요.”
그것도 아주 저질인.
리카온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네요.”
다행히 리카온과 제드는 더 캐묻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머무르는 거야.’
일정이 아주 바쁘다는 걸 보면, 프레사가 마을을 돌아다니지 않는 이상은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프레사는 리카온과 제드가 퇴근하자마자 대문 앞에 소금을 뿌리며 기도했다.
‘제발 다시는 오지 마라, 다시는.’
리스는 그녀의 행동이 재밌다는 듯 지켜보았다.
「소금을 왜 땅바닥에 버리느냐?」
“재수 없는 기운을 몰아내려고요.”
「참 신기한 행위로구나. 고작 그런 얄팍한 술수로 저들을 막을 수 있을까? 순진한 나의 계약자여.」
리스가 비웃거나 말거나 프레사는 소금을 팍팍 힘껏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