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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9화 (19/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9화

프레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특별한 관계.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첫 만남부터 독특한 시작이었으니까.

프레사가 아무런 말 없이 머쓱한 표정만 짓자 리카온이 덧붙였다.

“당신은 내 목숨을 구했어요, 레사. 그러니까…….”

그러나 그 말은 채 끝나지 못했다.

“쿨럭……. 큿…….”

리카온이 기침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프레사는 그의 등을 두드려 주고 장바구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리카온 씨, 괜찮아요?”

리카온은 손수건을 받아 입가를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손수건이 살짝 붉게 물들었는데, 토마토 과즙인지 피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매끈하게 뻗은 코와 날카로운 눈매가 전부였다.

‘드래곤 독이 무섭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낫지 않는다니.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프레사가 걱정스럽게 리카온을 바라보는 그때.

“프레사?”

익숙하지만 전혀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로완 길레스피, 프레사의 전 약혼자이자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그의 아내 앨리샤는 곁에 없었다.

프레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려 얼굴을 감추었다.

‘역시 소금을 더 뿌렸어야 했어. 아예 가지고 나올걸. 아니, 시장에 오지 말걸.’

프레사가 후회를 삼키는 그때 리카온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쪽으로 당기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리카온의 큰 체구 덕분에 프레사는 거의 가려졌지만, 로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프레사에게 꽂힌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재차 내뱉었다.

“아는 사람인 것 같아서 그러는데.”

죽은 사람이 살아 있으리라 의심하는 것부터 어딘가 이상했다.

프레사가 아는 로완 길레스피는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오만하며 본인밖에 모르는 남자였으므로.

“실례지만 잠시 확인 좀 하겠습니다.”

로완이 예의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프레사의 후드를 벗기려는 듯했다.

프레사가 토마토 두 알이 담긴 장바구니로 그를 후려치려고 하는 순간, 탁.

“그만두시죠.”

리카온이 로완의 손목을 잡아 멈췄다. 다른 한 손으로는 입가의 손수건을 꾹 누른 채였다.

프레사는 안도하면서도 걱정이 됐다.

리카온은 낫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환자였다.

저러다 괜히 싸움에 휘말려 다치면 큰일이었다.

프레사는 그냥 지나가자는 의미로 리카온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어느덧 노을마저 사라진 거리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떨어진 거리에서는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어져 그나마 다행이었다.

“손목 잘리고 싶지 않으면 치워.”

로완이 리카온을 향해 차갑게 경고했다.

어찌나 섬뜩한지 프레사는 당장 장바구니를 휘둘러 그를 기절시키고 싶었다.

“글쎄. 내 손목이 먼저 날아갈까, 당신 목이 먼저 날아갈까?”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리카온의 목소리였다.

낮고 무거운, 진짜 당장 로완의 목을 날려 버릴 듯한 차가운 음성.

이러다가 정말 유혈 사태가 일어날 것 같았다.

‘아마 리카온이 지지 않을까?’

로완은 왕국의 검이라 불리는 사람이었으니, 병약한 리카온은 한주먹거리일 것이다.

잠깐 망설이던 프레사는 리카온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최대한 본래의 목소리를 감추려고 쥐어짜듯 내뱉었다.

“저리 꺼져, 이 변태 자식.”

휙!

장바구니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더니 로완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윽!”

로완의 신음과 함께 토마토 두 알이 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잘 익은 토마토 과즙이 마치 피처럼 흘러나왔다.

프레사는 리카온의 소매를 잡은 채 집 쪽으로 힘껏 내달렸다.

리카온이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놓치는 바람에 얼굴이 전부 드러났다.

얼핏 확인한 로완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프레사는 거기에 대고 침이라도 뱉고 싶었으나, 리카온을 무사히 빼내야 하니 도망치는 게 우선이었다.

‘아까운 내 토마토.”

내일 아침으로 먹을 생각이었는데.

구겨진 장바구니에서는 으깨진 토마토 향기가 폴폴 풍겼다.

얼마나 달렸을까.

“레사, 레사. 잠깐 멈춰 봐요.”

리카온이 숨을 몰아쉬며 프레사를 불러 세웠다.

프레사는 그제야 달리기를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숨을 못 쉬겠어요? 아니면 어지러우세요?”

프레사는 장바구니를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리카온의 얼굴을 감싸듯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까 기침하면서 튀어나온 게 피는 아니었나 보다.

옅은 주홍색의 토마토즙이 입술에 살짝 묻어 있었다.

안도하며 손을 내리려는 순간, 리카온이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살짝 누르듯 붙잡았다.

“하아, 하아. 그렇게 약골은 아닙니다. 당신이야말로, 괜찮습니까?”

“전 당신 등 뒤에 숨어 있기만 했잖아요. 당연히 멀쩡하죠.”

프레사는 얼떨결에 리카온의 손에 붙잡힌 채 눈을 깜빡였다.

리카온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었다.

‘열이 나나?’

프레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리카온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그걸로 후려 팰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손에 든 게 장바구니뿐이었어요.”

프레사는 멋쩍어하며 시선을 피했다.

리카온은 웃음을 멈추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잘했습니다. 용감한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그런데, 레사.”

“네?”

리카온이 돌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어딘가 초췌해 보이는 리카온의 미모에 흠칫 놀랐다.

이렇게 보니 입가에 흐르는 토마토즙이 다시 피처럼 보이기도 했다.

‘깜짝이야.’

갑자기 훅 들어오는 건 여러 의미로 반칙이었다.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요.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당신이 다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덩치 큰 내가 다치는 편이 보기에도 나은 그림이거든.”

다정하게 내뱉은 리카온의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분명 평소에는 건조하고 메마른 입술이었는데, 오늘은 달빛 탓인지 유난히 촉촉해 보였다.

프레사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리카온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럼 잘 자요, 레사.”

프레사의 손을 붙잡고 있던 리카온의 손이 떨어졌다.

프레사는 평소처럼 태연히 인사하지 못했다.

환한 달빛 아래의 리카온이 너무 청초했다.

꼭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리카온 씨, 괜찮은 거죠?”

프레사의 물음에 리카온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리고 다음 날, 리카온은 제드와 함께 어디론가 훌쩍 사라졌다.

남은 거라고는 프레사에게 남긴 편지 한 장이 전부였다.

금방 다녀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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