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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0화 (20/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0화

하루아침에 직원들을 모두 잃은 프레사는 호미를 거칠게 휘둘렀다.

오늘은 약방을 운영하지 않는 휴일로 지정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얌전히 약초나 심을 계획이었다.

호미질이 거칠어질수록 프레사의 마음도 들쑥날쑥했다.

‘밥이라도 한 끼 제대로 해 먹이고 보낼걸.’

요리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지키지도 못하게 됐다.

물론 리카온은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프레사는 그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정말 빨리 돌아올 예정이었다면 얼굴을 보고 인사했겠지.

만약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영영 못 보는 걸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정을 너무 많이 줬다.

언제든 쉽게 떠날 수 있는 사람인 줄 모르고서.

「잡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레사. 땅을 아예 뒤엎을 생각이냐?」

따스한 햇볕을 쬐며 열심히 광합성 중이던 리스가 말을 걸었다.

프레사는 그제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짝 말랐던 흙이 완전히 파헤쳐져서 축축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프레사의 손가락 길이보다 더 깊게 구덩이가 생겼다.

리카온과 제드에 대한 배신감을 억누르다 보니 같은 자리만 계속 파고 있었다.

프레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허리를 세웠다.

“물 좀 마셔야겠어요. 날씨가 너무 덥네요.”

「그대의 정신이 없는 게 날씨 탓만은 아닌 것 같다만.」

리스가 얄궂게 되받아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프레사는 호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냈다.

이래저래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깐의 휴식이 필요했다.

깊이 파헤친 땅을 발로 대충 쓱쓱 문질러 덮는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사.”

프레사는 고개를 숙인 그대로 멈췄다.

로완이 기어코 그녀를 찾아낸 것이다.

원래부터 집요한 성격이라는 건 알았지만, 어제 토마토로 얻어맞고도 찾아올 생각을 하다니.

정말 뻔뻔하고 어이없는 인간이었다.

프레사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도 로완이 줄줄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살아 있었군. 죽은 게 아니었어.”

프레사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로완을 응시했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치기는 글렀으니, 무슨 헛소리를 어떻게 하는지 들어나 보자.

토마토로 맞은 얼굴 위에 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기특해, 내 토마토들.’

토마토 생각을 하니 리카온이 두고 간 토마토 바구니가 떠올라 다시 억울해졌다.

떠나겠다고 말을 먼저 했다면 해독제를 더 챙겨 줬을 텐데.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배짱이람.

“프레사, 아무 말이라도 해줘.”

로완이 눈치 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프레사의 생각이 끊어졌다.

아무 말이라.

언제는 제발 그만 떠들라면서 화를 내더니 이제는 아무 말이라도 해 달란다.

프레사는 무심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냥 못 본 척하면 되지 않았나요? 어차피 당신은 나를 경멸했잖아. 사랑하는 앨리샤와의 관계를 훼방한다면서.”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로완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먹먹한 눈으로 프레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난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도대체 뭘?

프레사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틀어졌다.

로완이 금방이라도 프레사를 끌어안을 듯 두 손을 위로 올렸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야, 프레사.”

프레사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호미로 로완의 머리통을 후려칠 뻔했다.

아니, 그냥 칠 걸 그랬나?

프레사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리스가 혀를 찼다.

「미친놈이로구나.」

맞는 말이었다.

로완 길레스피는 지금 미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앨리샤는 어쩌고요? 운명적인 사랑이라며 그렇게 애절하게 굴더니.”

프레사는 위협적으로 호미를 휙휙 흔들었다.

로완이 뾰족한 호미 끝으로 시선을 힐끔 던지며 대답했다.

“그건…… 내 착각이었어, 프레사.”

“착각 한번 대단하게 했네요. 그리고 멍청하기도 하고.”

프레사는 어떻게 하면 호미로 로완의 반질반질한 이마를 시원하게 찍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어떻게 착각이었다는 뻔한 변명을 할까?

프레사에게는 매일이 가시밭길이었는데.

로완이 간절한 말투로 애원했다.

“당신도 나를 사랑하잖아.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진작 찾으러 왔을 거야. 왜 죽었다고 오해하도록 만들었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내가 그쪽을 사랑한다고요?”

“그래. 내 결혼식을 보자마자 독약을 삼켰다고 들었어. 아닌가?”

로완은 프레사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었다.

앨리샤 또한 프레사 앞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로완을 사랑한다면 그가 행복하기를 빌어 달라고.

‘하여튼 주인공들이란.’

머릿속에 꽃밭이 가득하다니까.

프레사는 순진무구한 어린양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다 연기였어요, 길레스피 백작님.”

“……뭐?”

로완의 표정이 단번에 싸늘하게 식었다.

마치 지금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하긴.

믿을 수가 없겠지.

프레사는 그만큼 철저했고 완벽하게 모두를 속였다.

죽은 척 그들 곁을 떠난 것은 프레사의 배려이기도 했다.

로완 길레스피라는 남자를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죽었으니 로완은 평생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 만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프레사는 싱긋 웃으며 재차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을 사랑하는 척했던 거라고요. 이제 이해가 돼요?”

“프레사 소프.”

로완이 입술을 꽉 깨문 채 프레사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의미조차 없는 가문의 이름이 프레사의 전부라도 되는 듯.

「이거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가 맞나?」

리스가 로완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중얼거렸다.

이 원작의 인간들 때문에 리스에게 가짜 이름을 알려줘야 했던 프레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정오가 지난 탓에 햇볕이 그새 따가워졌다.

가뜩이나 리카온과 제드의 일로 싱숭생숭한데 로완까지 그녀를 괴롭히니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저기요, 길레스피 백작님.”

프레사는 호미를 집어 던졌다.

“헛소리는 충분히 들어준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돌아가 줄래요?”

호미를 피해 한 걸음 물러선 로완의 눈동자가 한여름의 폭풍우처럼 거세게 요동쳤다.

“나를 떨쳐내기 위해 거짓말하는 거 다 알아, 프레사.”

로완 길레스피는 역시 오만하고 이기적인 남자답게 진실을 말해 줘도 제대로 들어 먹지를 않았다.

프레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다음에는 발치에 던지는 걸로 안 끝날 테니까 행동 잘해요. 난 어차피 죽은 사람이고, 죽은 사람은 뭐든 할 수 있거든요.”

로완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프레사는 그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준 후 등을 돌렸다.

어차피 로완이 돌아가서 프레사 소프가 살아 있다고 말한다고 한들, 누가 믿어줄까.

지금 로완의 태도를 보면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다른 선택지를 준비는 해 둬야 했다.

이제 겨우 꿈을 펼쳤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방해하다니, 로완은 끝까지 프레사의 인생을 놓아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깟 원작과 주인공이 대체 뭐길래.

‘아, 정말 최악의 날이야.’

프레사는 현관문을 꽉 걸어 잠그며 두 눈을 감았다.

리카온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기다리마.」

프레사의 눈치를 살피던 리스가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프레사는 그의 보드라운 솜털을 쓰다듬어 준 후 웃었다.

“고마워요. 이걸로 충분해요.”

다음번에는 진짜 호미로 미간을 찍어 버릴지도 모르거든요.

프레사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상냥한 말투와 다른 내용에 리스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어쨌든 당분간은 약방 운영을 쉬면서 연구에 집중해야겠어요. 손님들이 있는데 찾아오면 곤란하니까요.”

이참에 새로운 약과 약초나 실컷 연구해야겠다.

프레사는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힐끔 창밖을 내다보니 로완 길레스피가 허수아비처럼 아직도 정원에 서 있었다.

프레사는 소리 나게 커튼을 휙 닫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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