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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1화 (21/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1화

제롬 소프는 어제 파로 마을에 밤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형편없는 여관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여관이며 예의 없는 주민들, 편의시설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이 마을이 끔찍했다.

게다가 이 마을은 짜증이 날 만큼 더웠다.

나름대로 검술 영재라 불리며 자란 제롬에게도 버거운 더위였다.

윤기가 나는 그의 붉은색 단발이 축 늘어졌다.

‘젠장, 그렇게 중요한 일이면 형이 직접 왔으면 됐잖아.’

제롬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파로 마을에 오기 전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길레스피 백작 부부는 이 마을 별장에 머무를 예정이었다.

‘별장 위치를 겨우 알아내기는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혼여행 중에 찾아와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관대할 수 있을까?

그 로완 길레스피가?

로완은 프레사를 쓰레기 취급하며 냉정하게 돌아섰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번 마음에서 멀어지면 다시 돌아보지 않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다.

제롬은 엘리아스의 말을 떠올렸다.

‘최대한 납작 엎드려라. 구질구질하게 굴란 말이다.’

정작 값비싼 본인의 무릎은 꿇을 생각조차 없으면서, 동생인 제롬에게는 그것이 아주 쉬운 일인 것처럼 내뱉다니.

제롬의 찌푸린 미간은 허름한 마차를 겨우 잡아타고 별장으로 향하는 내내 펴질 줄을 몰랐다.

지루한 창밖 풍경에 시선을 맡긴 채 흔들리는 마차의 불쾌함을 속으로 삭이는 그때.

‘……프레사?’

제롬의 눈동자가 커졌다.

죽은 그의 동생 프레사 소프와 너무 똑같이 생긴 여자가 낯선 집 정원에 서 있었다.

마차는 제롬의 요구대로 아주 빠르게 내달리는 중이었다.

프레사와 똑같은 외모의 여자가 이미 저만치 멀어졌다.

제롬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 계집애는 죽었는데.’

싸늘하게 식은 프레사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이러려고 미친 사람처럼 굴었느냐며 비웃은 기억이 생생했다.

‘닮은 사람인가?”

그렇다고 치기에는 과할 만큼 똑같았다.

프레사 소프가 다시 살아서 돌아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도대체 뭐야. 뭐냐고.”

한여름인데도 목덜미가 서늘했다.

소름이 끼쳤다.

‘피곤해서 눈에 헛것이 보이는 모양이야.’

제롬은 최대한 합리화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한참이 더 지나서야 길레스피 백작 부부가 머무르는 별장에 도착했다.

“어머, 제롬?”

하늘색의 얇은 여름 드레스를 입은 앨리샤가 놀란 얼굴로 제롬을 맞이했다.

언제 봐도 제롬의 이상형 그 자체였다.

‘로완 그 인간만 없었어도.’

속내를 숨긴 제롬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앨리샤, 잘 지냈어요?”

“물론이죠. 덕분에요.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제롬은 홀린 사람처럼 앨리샤를 쳐다보다가 황급히 용건을 밝혔다.

“길레스피 백작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아, 로완은 지금 잠깐 다른 용무가 있어서요. 중요한 일인가요?”

“그럼 별장에 안 계십니까?”

“곧 돌아오긴 할 거예요. 들어와서 기다릴래요? 차를 준비하라 이를게요.”

앨리샤가 미소 지으며 제롬을 별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얼떨떨하게 대꾸한 제롬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신혼여행 와서 아내를 혼자 두고 어디를 간 거야?’

제롬은 거실 소파에 앉아 별장 사용인이 가져다준 차를 홀짝였다.

재벌인 백작에게 딱 어울리는 별장이었다.

온통 흰색에 값비싼 장식물로 꾸민 내부 인테리어가 제롬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사치스럽기는.’

그때 맞은편에 앉은 앨리샤가 말을 걸었다.

“직접 찾아오시느라 힘드셨겠어요. 편지로는 전할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예요?”

“아, 예. 그게…….”

차라리 앨리샤에게 먼저 털어놓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제롬이 구구절절 소프 가문의 상황을 설명하려는 그 순간.

“소프 백작 영식?”

때마침 길레스피 백작이 돌아왔다.

제롬은 벌떡 일어나 억지로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길레스피 백작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급히 부탁할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뵙게 됐습니다.”

제롬은 힐끔 로완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로완은 굉장히 언짢은 눈치였다.

‘둘만의 신혼여행을 방해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래도 대놓고 저렇게 불편한 표정이라니 제롬도 기분이 상했다.

로완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무슨 급한 일이기에 여기까지 쫓아온 겁니까? 정도가 지나치군.”

“로완, 중요한 일인가 봐요. 진정하고 제롬의 얘기를 들어주세요.”

앨리샤가 로완의 팔을 붙잡으며 소곤거렸다.

그러자 로완이 그녀의 손을 피하듯 팔을 슬쩍 빼냈다.

앨리샤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마치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는 듯.

당황스럽기는 제롬도 마찬가지였다.

‘왜 저래?’

프레사와 오랜 약혼을 깨면서까지 앨리샤를 선택했으면서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어쨌든 지금 제롬에게 중요한 것은 앨리샤가 아니었다.

그는 최대한 로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제 형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소프 가문의 존속이 걸린 문제이니 부디 긍정적인 검토 부탁합니다.”

제롬은 엘리아스가 신중하게 작성한 편지를 내밀었다.

로완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편지를 확인했다.

제롬은 잔뜩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로완이 헛웃음을 흘리며 제롬을 응시했다.

“결국 돈을 빌리러 온 겁니까? 황당하군요. 난 지금 신혼여행 중입니다. 그 사실을 뻔히 알 텐데.”

“죄송합니다, 백작님. 말씀드렸다시피 소프 가문의 존속이 걸린 일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합니다.”

제롬은 불쑥 치솟은 자존심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그의 눈썹이 한껏 찌푸려졌다.

엘리아스의 명령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자존심이 상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로완, 소프 가문은 가족과 다름없잖아요. 네?”

앨리샤가 그새 표정을 다잡고서 로완을 향해 부탁했다.

가족.

앨리샤와 소프만큼 그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관계가 또 있을까.

앨리샤의 동정을 샀으니 제롬에게야 잘된 일이었지만, 로완까지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아. 가신들과 상의한 후 연락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세요.”

다행히 로완은 앨리샤의 말을 듣기로 한 모양이었다.

제롬은 그제야 반으로 접을 것처럼 깊숙이 숙였던 허리를 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럼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고개를 짧게 끄덕인 로완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앨리샤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제롬에게 가볍게 윙크했다.

잠시 그 얼굴에 홀릴 뻔한 제롬은 서둘러 별장을 빠져나왔다.

다시 그 싸구려 여관으로 돌아가느니 지금이라도 배를 잡아타고 수도로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

제롬은 마차를 타고 항구로 향했다.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프레사로 착각했던 여자의 집이 보였다.

“잠깐 멈춰 봐.”

제롬은 순간적으로 마차를 세웠다.

마부가 문을 열어 주었다.

제롬은 속으로 여러 번 되뇌며 그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확인만 하는 거다, 확인만.’

그래.

프레사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러고 나면 이 찝찝한 마음이 편안해질 테니까.

당당한 걸음으로 빠르게 현관까지 다가갔던 제롬이 돌연 멈췄다.

‘아니, 이건 미친 짓이야.’

제롬의 동생이자 소프 가문의 골칫덩이 프레사 소프는 죽었다.

죽어서 묻힌 지가 언젠데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뿐이야. 아니면 단순히 닮은 여자일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머릿속에 박힌 프레사와 똑같이 생긴 여자의 얼굴을 지워내려고 애썼다.

제롬은 다시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차에 한 발 올렸다가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마음을 바꾸었다.

‘젠장,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해.’

만약 프레사가 살아 있다면, 정말 죽은 척 도망친 거라면 분명 빈손일 리 없었으니까.

‘분명 무언가 있을 거다. 프레사가 가지고 있던 보석이 한둘이었어야지.’

제롬은 결국 마음을 돌려 현관문을 쾅쾅 거세게 두드렸다.

나무 간판이 좌우로 흔들렸다.

‘약방?’

제롬의 날카로운 눈이 간판을 훑었다.

그저 평범한 집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영업을 하는 곳이었다.

더욱 프레사가 아니라는 확신이 커졌다.

그냥 항구로 돌아가자고 생각하는 순간,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집주인이 나타났다.

“누구세요?”

프레사를 닮은 여자가 문을 열다 말고 흠칫 놀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는 듯한 그 얼굴이 또렷했다.

이 여자는 프레사 소프, 제롬의 동생이 확실했다.

제롬은 입을 크게 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 너 이 미친…….”

제롬이 프레사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여자의 어깨에 닿는 바로 그때.

번쩍!

우르릉, 쾅!

대낮의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더니 제롬을 내리쳤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제롬이 꼴사납게 엎어진 채 신음했다.

누군가 온몸을 둔기로 후려친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으, 으윽…….”

전신이 말을 듣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이 애처롭게 바닥을 긁었다.

그때 위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레사. 딱 맞춰서 온 것 같군요.”

제롬의 등을 지그시 밟고선 채 남자가 프레사와 닮은 여자를 향해 상냥하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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