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2화
프레사는 로완 길레스피가 돌아간 걸 확인하고 나서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피곤하다, 피곤해.’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이런저런 일로 시달렸더니 몸 상태가 영 별로였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레사.」
리스가 프레사의 얼굴 위를 둥둥 떠다니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프레사는 두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냥 좀 피곤해서요.”
「이럴 때는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나아진다던데, 인간들은.」
리스가 제법 사람처럼 조언했다.
프레사는 작게 웃었다.
확실히 리카온이 종종 요리해 줄 때가 그립기는 했다.
소박하고 간단한 요리들이었지만, 그래도 맛은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한다는 것이 그토록 따스하다는 것을 그제야 기억해냈다.
‘아, 또 무의식적으로 떠올렸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컸기에 되도록 정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도 리카온의 빈자리는 벌써 이만큼이나 커졌다.
「그 인간이 그리운 모양이구나.」
리스가 측은하다는 듯 프레사를 바라보았다.
프레사는 굳이 반박하고 싶지 않아 침묵했다.
리카온이 떠나고 나서 이 주변은 너무 고요해졌다.
처음에 이사 왔을 때는 주위에 아무도 살지 않기를 바랐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쓸쓸하다니,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계약자가 기운이 없으니 나까지 축 늘어진다, 레사.」
리스가 한숨을 폭 내쉬며 프레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아야, 아파요.”
「기운 좀 차려라, 레사.」
“그냥 좀 지친 것뿐이라니까요.”
물론 로완 길레스피의 등장에 화가 나고 어이가 없기는 했다.
이제야 겨우 원작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 앞에 나타나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너야’라니.
‘미친 인간.’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앨리샤는 그걸 알고 있을까?
알고 있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사람들은 전부 앨리샤가 아름답고 선량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레사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악독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연회에 입고 갈 내 드레스를 홀랑 찢어 놔서 곤란했었지.’
그 드레스,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앨리샤 덕분에 누더기가 됐다.
물론 프레사는 그때도 알면서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또 원작이 나를 아프게 했을 테니까.’
어쨌든 지금 로완 길레스피가 프레사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소프 백작의 귀에 들어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마 소프의 사람들이라면 분명 부정할 거야.’
백작과 엘리아스는 특히나 더.
그들은 가문의 명예를 프레사의 존재보다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프레사가 죽은 척 도망쳤고, 본인들이 텅 빈 관을 묻으며 슬퍼하는 척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울 것이다.
애초에 프레사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고, 쓸모없는 딸이자 형제였으니 갑자기 이곳에 들이닥칠 걱정은 없었다.
그들은 지금도 프레사에게 아무 능력이 없다고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별문제는 아니야. 하지만…….’
로완의 뒤바뀐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사람 마음이 어떻게 그러지?’
앨리샤를 사랑한다고 해서 열심히 이어 줬더니 무슨 헛소리람.
「레사, 누가 찾아왔다.」
리스가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동시에 누군가 현관문을 쾅쾅 거세게 두드렸다.
‘누구지? 오늘은 휴일이라고 써 붙였는데.’
또 누군가가 대문에 붙인 안내문을 읽지 않고 왔나 보다.
프레사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정돈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제롬?’
프레사의 둘째 오빠, 제롬 소프였다.
어쩌다 프레사를 찾았는지 몰라도 로완만큼이나 보고 싶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프레사는 현관문을 도로 닫을지, 제롬의 머리털을 쥐어뜯어서 대머리로 만들지 잠깐 고민했다.
제롬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쩍 벌리며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너, 너 이 미친…….”
아무래도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으면 놀라기는 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제롬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러나 프레사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는 좀 불쾌했다.
「오늘따라 보잘것없는 손님이 많구나. 내가 처리해 주랴?」
리스가 제롬의 눈앞에 몸통을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그 작고 하찮은 몸뚱이로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프레사는 그냥 현관문을 닫고 돌아서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리고 근사한 검은색 예복을 차려입은 리카온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제롬을 땅바닥처럼 편안하게 짓밟고 선 리카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사까지 했다.
“어떻게 갑자기 돌아온 거예요?”
프레사는 얼떨떨했다.
리카온이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다.
물론 그는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믿음이 가지 않았으니까.
리카온은 제롬의 등을 정확히 두 번, 카펫처럼 밟고 내려오며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레사.”
정식 행사에서나 입을 법한 차림새인 것도 어색한데, 말투나 표정까지 전부 리카온 같지 않았다.
리카온의 짙은 남색 망토가 미지근한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흔들렸다.
“칸체르의 대공, 리카온 그레나딘입니다.”
그 인사가 어찌나 우아하고 이상했는지, 프레사는 마치 한 편의 짧은 연극을 보는 듯했다.
“……네?”
프레사는 뜬금없는 자기소개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병약한 이웃사촌이 알고 보니 제국의 대공이었다, 뭐 그런 건가?
프레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레나딘 대공이라면 드래곤을 제압한…….”
“아무래도 그렇게 더 많이 알려지긴 했죠.”
리카온은 태연하게 웃으며 프레사를 빤히 응시했다.
“말하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에요.”
“아, 네.”
프레사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거짓말을 한 건 프레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카온은 묘한 눈길로 프레사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만큼 뜻밖이었다.
이제야 모든 게 딱 들어맞았다.
이미 멸종된 드래곤의 독에 중독된 것, 딱 봐도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굳이 이 시골까지 요양을 온 것, 리스가 리카온에게서 날뛰는 마력을 느낀 것까지 전부.
‘원작에서도 몇 번 언급이 되긴 했어. 그레나딘 대공은 로완 길레스피의 내적 라이벌로 묘사됐었지.’
원작에서 리카온은 로완이 자격지심을 느끼는 대상이었다.
다만 직접 등장하지 않고 가끔 로완의 대사 몇 줄로 언급되는 게 전부였기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이름도 늘 그레나딘 대공으로 지칭됐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진실을 알게 됐음에도 프레사는 그보다 더 중요한 할 일이 있었다.
“리카온 씨, 몸은 괜찮으신가요?”
바로 리카온의 현 상태였다.
그가 대단한 마탑주라는 사실보다 독이 얼마나 사라졌는지 중요했다.
리카온이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묻고 싶은 게 그것뿐입니까?”
“네. 다른 건 다 얘기했잖아요. 마탑주고, 제국의 유명한 대공이고. 하지만 저에게 당신은 그냥 제 약이 필요한 환자이자 이웃이에요.”
그리고 친구이기도 하고.
그 말까지는 굳이 내뱉지 않았다.
어딘가 민망해서였다.
리카온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큰 키 덕분에 산등성이 위에 걸린 태양이 조금 가려졌다.
“그 환자이자 이웃은 지금 이렇게 멀쩡합니다. 물론 당신의 약은 아직 더 필요하지만.”
“다행이에요.”
프레사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확실히 리카온의 안색은 떠나기 전보다 많이 나아 보였다.
그래도 신경 쓰이는 게 있었으나 제롬이 듣는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었기에 당장 궁금한 질문부터 꺼냈다.
“그나저나 제 오빠는 왜 저렇게 된 건가요?”
“아, 미리 말하지 못했는데.”
리카온이 등을 돌려 바닥에 엎어진 제롬을 응시했다.
프레사를 바라볼 때와 달리 서늘한 눈빛이었다.
“떠나기 전, 당신이 위험을 느끼면 제가 소환되도록 술식을 걸었습니다.”
프레사는 곧게 뻗은 리카온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뒀다는 사실에 고마워야 할지, 술식을 걸었다고 미리 말해 주지 않은 데에서 불쾌함을 느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리카온의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이니 전자에 조금 더 가까운 감정이었다.
프레사는 조금 뜨거워진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제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예상하신 건가요?”
아마 시장에서 로완과 마주친 탓일 것이다.
리카온은 로완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러나 프레사는 로완 길레스피가 두렵지 않았다.
그저 껄끄럽고, 불쾌할 뿐.
“당신과 먼저 상의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고 싶었어요. 당연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리카온이 프레사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사과했다.
보호.
프레사에게는 너무 낯선 단어였다.
지금껏 그 누구도 그녀를 지키고자 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레사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독을 마셨고, 이곳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만난 지 얼마 안 된 리카온에게는 그녀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고 하니 이상할 수밖에.
프레사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감정에 취하지 않으려고 주제를 바꿨다.
“일단…… 다른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인간은 어쩌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죠. 나에게는 결정권이 없으니.”
리카온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프레사는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제롬을 잠깐 주시했다.
‘제롬이 두 눈으로 내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곤란하기는 해.’
하지만 겨우 얻게 된 새 거처를 포기하기는 싫었다.
언제까지 도망만 칠 수는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부딪치는 수밖에.
꽤 긴 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프레사는 제롬 소프의 처분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