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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3화 (23/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3화

“마음 같아서는 땅에 파묻고 싶지만…… 그냥 보내 주려고요.”

“이대로 보내겠다고요?”

리카온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 물론 순순히는 아니고요.”

프레사는 제롬을 온전한 상태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아무리 저를 괴롭힌 가족이라고 해도, 깨끗한 손을 굳이 더럽힐 필요는 없었으니까.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원작이 끝나니 세상 살기 진짜 편하네.’

프레사는 엎어진 제롬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저기요, 제 말 들려요?”

제롬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꾹 눌렀다.

분명 들린다는 표현이거나 욕이거나 그렇겠지.

작은 벼락을 얻어맞은 탓에 아직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마탑주는 다르구나.’

프레사는 리카온을 힐끔 쳐다보았다.

제국이면 여기서 꽤 먼 거리일 텐데 단숨에 날아온 걸 보면.

“리카온 씨, 이 마법 풀어 줄 수 있나요?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어서요.”

“……내키지는 않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리카온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목석처럼 굳어 있던 제롬의 몸이 풀어졌다.

그는 술식이 사라지자마자 앉은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너,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아직 술식의 후유증이 남았는지 더듬더듬 말이 끊어졌다.

아주 끔찍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프레사는 일어나서 제롬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제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프레사를 비웃으며 괴롭히던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죽은 동생이 버젓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믿기 힘든 듯했다.

“당신이 전에 그랬잖아요. 나처럼 당하는 애도 참 대단하다고. 멍청하니 당하고만 산다고.”

제롬은 프레사에게 악담을 퍼붓는 즐거움으로 살아왔다.

아버지나 형에게 무시당하고 나면 화풀이 상대는 늘 프레사였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쓰레기.

프레사는 오늘 제롬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줄 것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저는 다 알아요. 작년에 무슨 짓을 했는지도요.”

프레사는 이 원작의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건 곧 이들의 약점까지 전부 잡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르는 척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뭐, 뭘? 무슨 헛소리야?”

제롬이 발끈하며 쏘아붙였다.

찔리는 게 있으니까 저렇게 반응하는 거다.

프레사는 방긋 미소 지었다.

“당신이 가문의 가보를 저당 잡혔다는 사실요. 고작 도박 빚을 갚으려고 그런 짓까지 할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요?”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제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실제로 그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 그 비밀을 철저히 숨겼다.

제롬 소프는 검술에 그나마 재능이 있지만, 머리가 나쁘고 단순해 유혹에 약한 성격이었다.

그는 형과 비교당하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도박에 빠졌다.

푼돈으로 시작했던 것이 점점 더 커져서 끝내는 가문의 보석에 야금야금 손을 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하나뿐인 가보, 겨울의 검을 내다 팔기까지 했다.

그리고 제롬은 그 검과 똑같은 모양의 가짜를 만들었다.

그 덕분에 원작이 완결 날 때까지 그 누구도 가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프레사는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진작 눈치를 챘다.

원작은 그녀의 눈물 나는 노력 덕에 완결까지 어떠한 설정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제롬은 프레사가 아는 그대로 행동했을 터였다.

“난 당신 몸에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비밀을 지키고 싶지 않나요? 아버지와 엘리아스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까.”

프레사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여유로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제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증거…… 증거 있냐? 어디서 증거도 없이 헛소리야?”

“그럼 당장 가문으로 연락해서 벽에 걸려 있는 그 보검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까요? 아, 마침 바로 쓸 수 있는 수정구도 있거든요.”

프레사는 태연하게 되받아쳤다.

당연히 수정구가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제롬이 당황한 듯 입을 크게 벌렸다.

분명 프레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프레사는 제롬이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엘리아스는 관심도 없던 여동생이 살아 있다는 것보다 가보가 진짜인지 아닌지 더 궁금해할 거 같은데.”

리카온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프레사를 지켜보았다.

제롬의 안색이 단번에 새하얗게 질렸다.

프레사의 예상을 전혀 벗어나지 않는 반응이었다.

“이, 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게, 프레사! 그러니까 제발 형에게는 알리지 말아줘. 내가 다 잘못했어, 응? 내가 미친놈이었어!”

제롬이 아버지인 백작보다 더 무서워하는 사람은 엘리아스였다.

엘리아스는 소프 백작도 혀를 내두를 만큼 잔인한 인간이었다.

가보를 도박 빚 갚는 데에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제롬은 아마 손가락 하나? 아니 둘 정도는 잃어버리지 않을까.

“이제 와 사과할 필요는 없고요.”

“미, 미안…….”

제롬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프레사 따위에게 당하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일부러 시간을 두고 그 망가진 얼굴을 감상했다.

‘아. 중요한 걸 잊어버릴 뻔했네.’

프레사는 제롬이 왜 파로 마을에 왔는지 알아내야 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파로 마을에는 왜 온 거예요? 당신은 시골을 싫어하면서.”

제롬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라.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분명했다.

아마 가문과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더 알고 싶어지는 법.

“오라버니, 대답 안 할 거예요? 진짜?”

“말, 말할게!”

그러자 제롬이 기겁하며 바싹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얼마 전 가문의 금광 투자 사업이…… 사기를 당해서…….”

프레사는 그 문장만 듣고도 상황 파악이 끝났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사기까지 당하지?

프레사가 그 가문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그녀를 돈 많은 귀족에게 팔아치워서라도 빚을 갚으려고 했을 것이다.

프레사는 작게 혀를 찼다.

‘신혼여행 중인 길레스피 백작을 찾아온 거네. 돈을 빌리려고.’

원작이 끝나자마자 보기 좋게 망하고 있다니, 사람은 이래서 착하게 살아야 하나 보다.

프레사는 제롬의 등장으로 잊고 있었던 또 하나의 골칫거리를 떠올렸다.

로완 길레스피.

‘그 인간은 어떻게 처리하지.’

제롬이야 협박해서 입을 다물게 했다지만, 로완은 뻔한 술수에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저기, 프레사……. 설마 날 또 벼락으로 때릴 건 아니지?”

제롬이 프레사와 리카온의 눈치를 살피며 비굴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일단 지금은 이 쓸모없는 인간을 돌려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 반지르르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불쾌함이 몰려왔다.

“잘 가요, 제롬. 손가락 잘 지키고 싶으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요.”

프레사는 제롬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으, 응.”

겨우 고개를 한번 끄덕인 제롬이 몇 번이나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벼락을 맞은 탓인지 계속 헛손질만 했다.

프레사는 한 걸음 물러서서 팔짱을 꼰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 의미 없이 두 손으로 허공을 휘젓던 제롬이 간신히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타고 온 마차로 내달렸다.

그는 꼭 술에 취한 사람처럼 엉망으로 비틀거렸다.

제롬이 올라타자마자 마차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졌다.

프레사는 마차를 향해 손까지 흔들어 줬다.

“정말 그걸로 충분합니까?”

리카온이 옆에 바짝 붙어 서며 물었다.

프레사는 그제야 그를 돌아보았다.

“제롬은 제가 가장 잘 알아요. 절대 말 못 할 거예요. 그 가문에서 가장 멍청한 인간이거든요.”

산뜻한 바람이 불어와 리카온의 새하얀 머리칼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고작 며칠 안 봤을 뿐인데도 벌써 신선한 외모였다.

프레사는 리카온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려서 그를 직시했다.

“그럼 우리는 할 얘기가 많잖아요. 리카온 씨, 아니 그레나딘 대공 전하.”

리카온은 달라진 호칭에 머쓱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원하시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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