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4화
“마법사라니 놀랐어요. 하지만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마법 사용은 자제하셔야 해요.”
“마법을 사용하지 말라는 겁니까?”
리카온은 프레사의 새로운 처방이 영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프레사는 그 사실을 눈치챘음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특히 무리한 마법은 금지예요. 남은 용독이 마력을 타고 전신에 퍼지니까요. 조금은 괜찮겠지만, 그래도 되도록 쓰지 않는 편이 좋겠죠. 빠른 완치를 바라신다면요.”
“뭐, 우리 천재 약사님 말씀이시니 들어야죠.”
리카온이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바람에 프레사는 그가 조금 미심쩍어졌으나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프레사가 경험한 바, 이런 잔소리는 반복해 봤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그 난리가 있었는데도 리카온은 프레사에 대해서 전혀 묻지 않았다.
‘내가 곤란할까 봐 묻지 않는 건가?’
그 배려가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했다.
‘분명 도망쳤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거야.’
그런데도 리카온은 프레사의 과거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리카온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설명하기에 급급했다.
“당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사실 삶은 거의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때마침 리카온의 말이 끝났다.
프레사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드래곤을 처치하고 나서 독에 중독된 거군요.”
“황제를 견제하려는 귀족들이 내 병을 약점으로 잡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여기까지 왔고.”
리카온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프레사는 그제야 그의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됐다.
처음부터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일 줄은 또 몰랐는데.
프레사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따뜻한 약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제국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리카온은 의미 모를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이제 어느 정도 회복됐으니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글쎄요.”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프레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호한 리카온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러자 리카온이 상체를 앞으로 바짝 기울였다.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의 거리가 훅 좁아졌다.
리카온은 눈을 깊숙이 휘어 웃으며 되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네?”
“내가 돌아가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이곳에 머무르기를 바라는지.”
왜 그걸 프레사에게 묻는지 모르겠다.
프레사는 리카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리카온은 여우처럼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은 있었다.
‘원작에서 묘사된 그레나딘 대공과 너무 달라.’
로완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그레나딘 대공을 ‘하얀 악마’라고 불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칸체르 황제의 개.
그런데 프레사가 지금껏 지켜본 리카온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용독에 중독돼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유약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물론 가끔 속을 알 수 없기야 하지만.
‘원작과 실제가 이렇게 다를 수도 있나?’
어쩌면 소설에 나오지 않은 부분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인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 리카온 또한 그런 게 아닐까?
‘그래도 차이가 너무 심한데.’
하얀 악마.
하얀 건 맞지만, 악마라는 말은 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왕국은 제국을 견제하고 있으니 잘못된 소문이 퍼졌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지금 프레사의 눈앞에 앉아 턱받침을 한 채 웃고 있는 남자는 악마와 거리가 멀었다.
“레사, 대답 안 해줄 거예요?”
리카온의 나직한 목소리가 프레사의 생각을 끊었다.
프레사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그제야 눈을 깜빡였다.
“아, 미안해요.”
“대답은?”
“사실대로 말하자면, 약방에 직원이 없어서 좀 힘들었거든요. 그렇다고 새로 고용하자니 아무래도 지금은 누군가를 믿기 힘들어서…….”
“안 갈게요.”
리카온이 프레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불쑥 내뱉었다.
프레사는 구구절절 몇 마디를 덧붙이려다 말고 입을 살짝 벌렸다.
“네?”
“나처럼 유능한 직원은 또 없다면서요. 그러니까 계속 일하겠다고.”
“아, 네. 네?”
프레사는 얼떨떨했다.
이렇게 쉽게 결정한다고?
리카온은 여전히 두 손으로 잘난 제 얼굴을 꽃처럼 받치고 있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프레사는 의문스럽게 재차 물었다.
“그래도 돼요?”
“물론입니다.”
확고한 말투였다.
프레사는 다소 피곤해 보이는 리카온의 눈을 쳐다보았다.
“굳이 왜…….”
“글쎄요. 이유를 붙여야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덜컹, 끼익.
나무 의자가 뒤로 밀렸다.
리카온은 프레사 옆까지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프레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리카온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프레사는 탁자 아래에 내린 손가락을 꼼질 거리며 할 말을 찾았다.
그러나 떠오르는 문장이라고는.
“리카온 씨가 두고 가신 토마토.”
리카온이 프레사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프레사는 빙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맛있더라고요.”
전혀 뜬금없이 내뱉은 말에 리카온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제국산 토마토니까요. 그것도 최고급.”
“어쩐지 시장에서 산 그 토마토 맛이 아니더라.”
나름 주제와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노력이었으나 리카온이 더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웃는 얼굴 그대로 조용히 프레사를 불렀다.
“레사.”
리카온은 아직도 프레사 옆에 몸을 낮춰 앉은 그대로였다.
프레사는 머쓱해서 깨끗한 찻잔만 문질러 닦았다.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 제국으로 함께 가 줬으면 좋겠습니다.”
“제국이라니. 너무 갑작스럽네요. 무슨 이유로요?”
리카온은 미리 다 준비해 온 것처럼 곧장 대답했다.
“당신의 실력은 이곳에만 머무르기에 너무 아까우니까.”
프레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리카온을 바라보았다.
칸체르 제국.
단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낯선 나라.
프레사는 지금의 삶에 나름대로 만족했다.
갑자기 날벌레들이 꼬여서 조금 곤란해지기는 했지만.
제롬은 대충 해결했으니 이제 로완만 신혼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프레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여기에서 이제 막 새 삶을 시작했는걸요. 아직 영주님과 약속한 데이지의 약도 완성하지 못했고요.”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에요. 마음 바뀌면 언제든 말해요.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까.”
리카온의 표정은 제법 진중했다.
프레사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보험이라고 생각할게요.”
“당신의 보험이 되다니 기쁘군요.”
제발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 좀 안 했으면 좋겠다.
프레사는 두 손으로 리카온의 어깨를 살짝 붙잡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리카온 씨, 혹시 하얀 악마가 아니라 하얀 여우 아니에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리카온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부드러운 흰색 머리칼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프레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제드 씨는요?”
“아, 제드.”
리카온은 그제야 제드의 존재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아마 배를 타고 열심히 오는 중일 겁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리카온 씨는 마법으로 편하게 날아오고, 제드 씨는 배를 타고 온다고요?”
“어쩔 수 없죠. 마법을 못 쓰면 발로 뛰는 수밖에요.”
리카온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일어나 섰다.
프레사는 그 뻔뻔하고 당연한 태도에 혀를 찼다.
‘불쌍한 제드.’
제국에서 파로 마을까지 오려면 오랜 시간 배를 타야 할 텐데.
부디 뱃멀미가 없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