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5화
프레사는 며칠 동안 연구에만 매달렸다.
리카온과 리스는 훌륭한 보조 역할을 해 줬고,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약이 완성됐다.
이름하여 박하수와 자라라 머리털 연고였다.
박하수는 쉬웠지만, 탈모 치료제가 문제였다.
두피 외의 피부에 닿았을 때 쓸모없는 털이 자라면 곤란했기에 두피에만 반응하게 하느라 몇 번이나 조제법을 바꿔야 했다.
버린 재료가 커다란 쓰레기통에 가득했다.
「가엾은 탈모 환자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참 감명 깊구나.」
심지어 리스는 프레사의 노력에 감동까지 받았다며 선뜻 도움을 줬다.
「이 정도라면 내가 효과를 향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리스는 한여름의 수풀처럼 풍성한 머리털을 만들어 주겠다며 정령의 힘을 사용했다.
아주 작은 빛처럼 보이는 가루가 연고 위에 솔솔 뿌려졌다.
‘고작 이런 약에 정령의 힘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 효과가 좋을수록 프레사에게는 이득이었다.
“고마워요, 리스 님.”
프레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연두색 액체와 짙은 갈색의 연고를 응시했다.
당장에라도 머리숱이 늘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연고였다.
“일단 완성은 됐는데…….”
때마침 지하로 내려온 리카온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벌써 완성입니까? 대단한데요.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레사.”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리카온을 돌아본 프레사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실험할 대상이 필요해요. 검증되지 않은 약을 무작정 판매할 수는 없으니까요. 박하수는 리카온 씨와 제가 먹어 보면 된다지만, 둘 다 머리털이 부족하지는 않잖아요.”
“아, 확실히 그렇겠네요. 특히 난 머리숱이 많은 편이라서.”
리카온이 팔짱을 꼬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부터 자꾸 은근히 머리숱 자랑을 하는데, 그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프레사는 이 연고가 효과가 없으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뭐든 완벽한 건 없으니 사전에 실험을 여러 번 거치는 것이다.
프레사는 약제사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효능을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고 얼렁뚱땅 넘어갔다간 돌팔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효과가 있다는 걸 먼저 알려야 홍보 효과도 누릴 수 있어.’
프레사는 주변의 적당한 인물이 없는지 잠시 고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딱 한 명이 떠올랐다.
“알버트 던, 기억나세요?”
“아. 바렛 영주의 비서?”
어지러운 책상 위를 정리하던 리카온이 고개를 살짝 들고 되물었다.
프레사는 박하수를 컵에 덜어서 리카온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그 사람 분명 이마부터 탈모가 시작되고 있었어요.”
“그걸 알아봤습니까?”
“딱 봐도 보이지 않아요?”
“글쎄. 난 잘 모르겠던데. 잘 먹겠습니다.”
리카온이 어깨를 으쓱하곤 박하수를 들이켰다.
알버트 던은 예민해 보이고 까칠한 성격이었으나 그나마 안면을 익힌 유일한 탈모 진행자였다.
리카온에게 주고 남은 박하수는 프레사의 입으로 들어갔다.
새콤하면서도 시원한 맛이었다.
‘일단 맛은 합격.’
리카온도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맛이 괜찮네요. 좀 독특하기는 하지만.”
“이건 바로 판매해도 되겠어요. 일단 하루 한정 판매로 시작할 거예요. 조제법이 익숙하지 않아서 시간이 좀 걸리니까요.”
프레사는 구체적인 판매 계획을 종이에 메모했다.
그리고 자라라 머리털 연고를 어떻게 전해 줄지도 계획했다.
마침 내일 알버트가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드디어 완성된 내복용 햇빛 알레르기약을 받아 가기 위해서였다.
알레르기약은 만들기 까다로워서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사이에도 데이지가 여러 번 약을 먹어 봤지만, 이렇다 할 효과가 없어 몇 번이나 새로 만들어야 했다.
바렛 영주는 재료비를 충분히 지원해 줬지만, 약을 만드는 데에 들어가는 재료값이 만만치 않았다.
‘버리는 재료도 많았으니까.’
조제법을 한 번에 익히면 재료 손실도 적을 텐데.
프레사가 아직 그 정도의 실력은 아니라서 아쉬웠다.
‘이번에는 꼭 효과가 좋아야 할 텐데.’
프레사는 박하수를 약병에 담아 데이지의 약과 함께 포장했다.
데이지가 좋아하는 보라색 리본으로 마무리까지 했다.
“데이지의 약을 전달하면서, 연고를 은근슬쩍 끼워서 줘 보려고요. 저기요, 대공 전하. 과다복용은 좋지 않다고 했잖아요.”
프레사는 박하수를 한 병 더 챙기려는 리카온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리카온이 머쓱하게 손을 거두며 말했다.
“……아직 티가 많이 나지 않는데 대뜸 대머리라고 하면 기분 나빠 하지 않을까요.”
리카온은 마치 대머리의 심정을 이해하는 아련한 눈빛이었다.
제국에 대머리가 많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리카온 씨도 유전적으로 대머리라거나.’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저 풍성한 머리털을 보면 탈모는커녕 머리 감을 때 걸릴 시간을 더 걱정해야 할 것 같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줘야 해요. 대충 어떻게 할지 생각은 해 뒀어요.”
프레사는 머릿속의 계획을 되새김질하며 남은 박하수를 모조리 마셨다.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 알버트는 데이지에게 전달한 약과 연고를 가지러 왔다.
그의 이마는 프레사가 본 그대로였다.
‘아직은 본인만 알아차릴 수 있는 탈모야.’
프레사는 그의 이마에서 시선을 거두며 약이 담긴 작은 바구니를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알버트가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바구니를 받아 갔다.
그리고 약간의 보수가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다음에 만들 데이지의 약값과 약방 운영비였다.
프레사는 주머니를 소중하게 껴안고 알버트의 눈치를 살폈다.
알버트는 특별한 말 없이 그대로 돌아갈 것처럼 몸을 돌렸다.
프레사는 서둘러 그를 불러세웠다.
“알버트 씨, 혹시 새로운 약을 실험해 볼 사람을 모집해도 될까요? 부작용은 최소화했으니 문제는 없을 거예요. 다만 효과를 검증해야 해서요.”
“어떤 약입니까?”
알버트가 냉정한 시선으로 프레사를 훑어보았다.
프레사는 기다렸다는 듯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대머리 치료제예요. 탈모가 진행된 두피에 바르면, 튼튼한 머리카락이 자라게 도와주는 획기적인 약이랍니다. 영주님께 전해 주시겠어요?”
프레사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연고를 꺼내 보였다.
알버트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표정을 감추려는 노력이 가상했으나 그를 빤히 주시하던 프레사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탈모는 마법이나 신성력으로도 치료가 안 될 텐데요.”
“맞아요. 그래서 특별히! 만들어 봤어요.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딱 사흘이면 분명 효과가 있을 거예요. 그러니 허가를 받고 싶어서요.”
알버트는 연고가 담긴 통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차가운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다.
프레사는 긴장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잠시 후.
“알겠습니다.”
알버트가 연고 통을 가져갔다.
프레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부탁해요, 알버트 씨.”
“그럼 이만.”
“조심히 가세요.”
알버트 씨가 꼭 직접 써 봐야 할 텐데.
프레사는 벌써 마차를 타고 멀어지는 알버트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