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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7화 (27/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7화

“그 이상한 길드 마스터와 만나겠다고요?”

식탁 맞은편에 앉은 리카온은 프레사의 계획을 듣더니 잠시 멈칫했다.

프레사는 삶은 달걀을 반으로 가르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 규모를 조금 늘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음.”

리카온의 표정은 평소와 비슷했으나 어딘가 묘하게 달랐다.

기분이 별로인가? 아니면 역시 아직 용독 후유증이 남아 있을지도.

프레사가 걱정스럽게 리카온을 쳐다보자, 리카온이 흐트러졌던 표정을 갈무리했다.

“먼저 믿을 만한 사람인지부터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레사.”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프레사는 방긋 미소 지었다.

길드 마스터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바로 프레사였다.

물론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프레사가 기억하는 내 집 마련 길드 마스터는 이 제안을 절대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프레사와의 거래에서 실수를 저지른 건 둘째로 친다 해도, 욕심 많고 철저히 자본주의인 길드 마스터에게는 솔깃한 거래가 분명했다.

게다가 프레사가 만드는 약들은 이미 파로 마을에서 입소문이 단단히 난 상황이었다.

또 스칼라 미치에게 선물이랍시고 약 몇 개를 쥐여 줬으니 프레사가 할 일은 다 끝났다.

이제 약속이 잡히기 전까지 바쁘게 약을 만들면 될 것이다.

하지만 리카온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프레사가 아는 원작을 전혀 모르니까.

‘이걸 설명할 수도 없고.’

책 속에 빙의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미친 사람이라고 떠들어 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을 당할지도 몰랐다.

리카온이라면 불을 부르는 마법 정도야 쉬울 테니 조심해야지.

“그런데 제드 씨는요?”

프레사는 리카온이 다시 질문하기 전에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분명 제드와 함께 오라고 했는데, 약속 시간에 나타난 사람은 리카온 혼자였다.

프레사의 질문에 리카온이 슬그머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몸이 안 좋아서 쉰다던데요.”

프레사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리카온을 응시했다.

“퇴근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잖아요.”

“무리를 좀 했나 봅니다.”

“그럼 약을 좀 가져가야겠어요.”

“그 정도는 아니고 쉬면 나을 겁니다. 신경 쓰지 마시죠.”

리카온이 주절주절 늘어놓는 변명을 듣다 못한 프레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리카온 씨가 오지 말라고 하셨죠?”

척하면 척이었다. 리카온이 눈을 못 마주치는 것만 봐도 뻔했다.

하지만 리카온은 야채수프를 떠먹으며 딴소리했다.

“사업 규모를 키우고 싶다면, 그레나딘 상단은 어때요.”

“그레나딘 상단이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프레사가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입을 도로 다물었다.

리카온이 재밌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소유의 상단이니까.”

“아직도 리카온 씨가 대공이라는 사실이 낯설어서 그래요.”

프레사는 머쓱해져서 포크를 들어 볶은 당근을 콕 찍었다.

“어쨌든…… 리카온 씨의 상단이라면 환영이지만, 그전에 실험 삼아서 해보고 싶어요.”

확실히 리카온에게 기대면 편할 것이다. 분명 리카온은 은혜를 갚는다는 핑계로 프레사를 도와줄 테니까.

하지만 본래 사업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과 거래할 때 더 조심스러워야 하는 법이었다.

“이 마을은 작으니까 괜찮지만, 제국 규모까지는 아직 감당이 안 돼요. 그만큼 일손도 필요할 테고요.”

게다가 칸체르 제국은 필츠 왕국보다 몇 배는 더 큰 나라였다.

리카온과 제드 그리고 프레사 셋이서는 그 물량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제국 규모의 상단에 찔끔 몇 개만 가져다줄 수는…….

“그럼 일단 왕국의 길드를 통해 유통한 다음, 성공을 거두고 나서 내 상단을 통해 제국으로 진출하는 건 어때요. 그 정도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그전에 소량만 가져가서 상단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줄게요. 효과를 보면 그들도 별말 없을 겁니다.”

리카온이 넌지시 해결안을 제시했다.

즉 왕국에서 먼저 판매를 시작하고, 이후에 제국으로 샘플을 가져가 반응을 먼저 확인하자는 계획이었다.

아무리 리카온이 소유한 그레나딘 상단이라고 해도 혼자 독점으로 계약을 체결할 수는 없을 터였다.

프레사는 리카온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미처 읽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리카온 씨에게 수요조사를 부탁해도 될까요? 지금 당장은 아니고요.”

“물론이죠. 맡겨줘요. 실망하는 일 없을 겁니다, 사장님.”

리카온이 씩 웃더니 제법 믿음직스럽게 대꾸했다.

프레사는 든든한 동업자가 생긴 듯해 마음이 조금 놓였다.

리카온의 속내는 까맣게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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