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29화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긴장했습니까?”
리카온이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프레사를 응시했다.
프레사는 침을 꿀꺽 삼킨 후에야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제 이름이 프레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제롬이 다녀갔을 때부터.”
리카온은 그제야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감정을 내비쳤다.
프레사가 가벼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저는…… 소프 가문의 프레사였어요. 죽었다고 위장하고 도망치기 전까지는요. 그래서 제롬이 저를 보고 놀란 거고요. 죽은 줄 알았던 골칫덩이 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요.”
방은 고요했다. 프레사는 긴장한 손을 꼼질대며 리카온의 반응을 살폈다.
의외로 리카온은 그다지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프레사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사실대로 말할게요. 저는 복수하고 싶어요. 저를 학대하고 쓰레기 취급했던 가족이라는 이름의 그들에게요.”
이미 왕국의 땅을 밟기도 전부터 결심한 일이었다. 복수.
단순히 죽은 척 위장해서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마음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예상치 못하게 로완을 만나고 제롬까지 마주쳤으니, 단순한 입막음으로는 프레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로완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포부까지 밝히고 떠나지 않았던가.
로완 길레스피는 타고난 재력과 머리 탓에 제롬보다 다루기가 몇 배는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그들에게 프레사가 이전처럼 당하기만 하는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원작을 무사히 끝낸 데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듯, 소프 가문은 빠르게 몰락 중이었고 프레사는 이 기회를 잡기로 했다.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그 무엇도 해결하지 못했다.
물론 리카온 그레나딘이라는 인물을 만났으니 영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는 숨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도와주실래요?”
프레사는 악수를 청하며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리카온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표정 없이 그녀를 마주 보던 리카온이 이윽고 씩 웃었다.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당신이 걷고자 하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해도 될까요?”
리카온은 망설임 없이 프레사의 손을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프레사, 나는 당신의 복수를 완벽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리카온이 느긋한 어조로 덧붙였다.
프레사는 그 잘생기고 완벽한 얼굴을 꽉 붙잡아 마구 문질러 버리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대신, 그녀는 리카온에게 부탁하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
“그럼 저와 글레스피 백작의 연회에 가주세요, 리카온 씨.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데이트 신청입니까?”
“그렇다고 쳐요.”
건성으로 얼버무린 프레사의 답변에도 리카온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프레사가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럴 때 보면 리카온은 속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해 주는 건지 알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프레사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리카온의 표정을 살피는데 리카온이 재차 질문했다.
“레사, 연회는 언젠데요?”
프레사는 길드 응접실에서 본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소프 백작 가문의 기사에 묻혀 옆으로 밀려난 모양이지만, 왕국의 인기인인 길레스피 백작의 연회 기사도 제법 크게 쓰여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호화롭고 아름다운 파티가 될 거라는 기대가 담긴 기사였다.
그렇든 말든 프레사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내일이요.”
프레사의 말에 리카온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
“내일.”
프레사는 씩 웃었다.
그래, 바로 내일.
프레사는 내일, 몇 개월 전까지 지긋지긋하게 드나들어야 했던 길레스피 백작 가문으로 다시 들어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좀 필요해요.”
프레사의 말에 리카온은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 저녁 식사부터 하면서 찬찬히 얘기하죠.”
리카온이 느긋한 어조로 내뱉으며 슬쩍 팔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에스코트하려는 행동에 프레사는 작게 웃은 후 사뿐 손을 얹었다.
“얼마든지요, 그레나딘 대공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