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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30화 (30/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30화

어둑한 저녁, 순백의 마차가 길레스피 백작 가문의 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잘 차려입은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자 훤칠한 미남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금실로 수놓은 새하얀 예복 차림이었는데, 큰 키와 그 분위기 탓에 묘한 위화감을 자아냈다.

막 길레스피 저택으로 들어서던 귀족들이 그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저런 귀족이 있었던가? 어쩌면 지금껏 본 적 없는 시골 출신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짐작이 오갔으나, 남자는 외딴 시골 출신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한 외모와 옷차림이었다.

한차례 옷매무새를 정돈한 남자가 마차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일행이 있나?

진작 저택에 들어서서 화려한 무도회를 즐겼어야 할 귀족들이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을 빼앗긴 채 우뚝 서 있었다.

단순한 외모나 화려한 마차 덕분은 아니었다.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독특한 분위기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귀족들이 남자가 에스코트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속으로 궁금해하는 그때, 마찬가지로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마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백색에 가까운 은빛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허리 아래까지 내려와 흔들렸다.

눈가를 가린 보라색 깃털 가면 탓에 얼굴은 전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가벼운 태도로 주변을 훑어본 그녀는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그제야 그들의 뒤를 따라 조급히 걸음을 옮겼다.

“칸체르 제국의 그레나딘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집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호명하자 귀족들이 재차 수군거렸다.

칸체르 제국의 대공이 왜 길레스피 백작 가문의 무도회에 참석한 걸까?

두 사람은 유명한 라이벌이 아니던가.

그 먼 제국에서 필츠 왕국에 방문한 이유는 또 무엇이고.

속닥거리는 목소리는 옆에서 옆으로, 앞에서 뒤로 전해졌으나 그레나딘 대공은 그리 신경 쓰는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무덤덤한 낯으로 연회장을 쭉 훑어볼 뿐이었다.

“이제 뭘 할까요, 레사.”

“……길레스피 백작이 안 보이네요.”

리카온의 옆에 바짝 붙어선 프레사는 익숙한 연회장 내부를 가볍게 확인한 후 대꾸했다.

머리카락 색까지 바꿨으니 들킬 염려는 아마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

‘앨리샤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두 사람이 다른 곳에 있는 건가?’

프레사는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손으로 꾹 눌러 잡으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오늘 위험을 무릅쓰고 이 저택에 찾아온 이유는, 소프 백작 가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길레스피와 소프는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였으니 이곳에서 얻는 정보가 가장 정확해.’

귀족들 사이의 소문은 귀족들이 누구보다 가장 먼저 듣고 전하는 법.

무엇보다 불필요한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어야 했다.

‘로완 길레스피는 눈치가 빨라.’

왕국 전체에 그의 영향력이 퍼져 있으니 자칫하다간 들키기에 십상이었다.

프레사는 로완이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프레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들킨 지금, 누군가 정보를 캐고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도로 덜미를 잡힐지도 몰랐다.

사자를 잡으려면 그 영토로 들어와야 한다던가.

‘하필 이 시기에 열리는 무도회가 여기뿐이었으니 선택지는 없었지만.’

어쨌든 프레사는 오늘 이곳에서 소프 백작 가문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어떠한 문제에 놓였는지 확인 후 계획을 세울 것이다.

로완 길레스피가 어떻게 행동하기로 했는지까지도.

‘여기에서 로완 길레스피에게 최악으로 차였었지.’

새삼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로완에게 밀쳐져 바닥에 나뒹구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프레사 소프.

로완과 팔짱을 낀 채 프레사를 동정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앨리샤.

그리고 주변에 서서 프레사를 비웃으며 가문의 망신이라며 떠들던 에이미와 제롬.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엘리아스.

그리 오래된 기억이 아닌 탓인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당시에는 소설 속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프레사 소프는 악녀 프레사 소프로 살아가야만 존재할 수 있었으니까.

끔찍한 고통에 허덕이며 바닥을 기는 비참함을 겪지 않으려면 극본대로 움직여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들은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프레사를 비웃고, 비난하고, 궁지에 몰리게 한 것 모두 그들의 의지였다.

지금도 의문인 점은 왜, 그들이 가족이었고 친구이자 연인인 프레사에게 그토록 가혹했느냐는 것이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지만.’

프레사는 작게 심호흡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일단 춤이라도 한 곡 추면서 상황부터 좀 보는 건 어떻습니까? 사교계란 으레 그런 곳이잖아요.”

리카온이 프레사의 눈을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하긴, 굳이 길레스피 백작과 마주칠 필요는 없었다.

이곳에는 수많은 입과 귀, 그리고 눈이 있었으니.

“좋아요, 그렇게 해요.”

프레사는 자그맣게 대답하고 리카온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때마침 경쾌한 음악이 차분한 음악으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회장 중앙까지 이동했다.

화려한 조명 아래의 두 사람은 온통 하얗게 빛났다.

프레사는 여전히 바뀐 제 머리카락 색이 어색했다.

리카온이 추천해 준 색이었고, 그의 마법으로 염색했으니 사실 리카온이 결정했다고 해도 무방했다.

‘뻔한 사람이네, 리카온 씨도.’

프레사는 속으로 생각하며 리카온과 호흡을 맞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로완 길레스피와 수없이 춘 춤이었기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리카온은 이 세상에 프레사만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프레사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부드럽게 프레사를 당기고, 손을 맞잡았으며 잠시 떨어지는 순간에는 아쉬운 듯 미간을 좁혔다.

부담스러울 만큼 직설적인 리카온의 눈길에 프레사가 조금 당황하는 그 순간, 뒤쪽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프 저택이 경매에 넘어갔다는데, 진짜예요?”

역시나 귀족들의 입은 고고하고 무거운 척하면서 그 누구보다 가벼웠다.

프레사는 리카온의 품으로 돌아가 그에게 기대는 척 귀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리카온의 몸이 잠깐 뻣뻣해지는 듯했으나 그리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길레스피 백작님께서 소프 가문을 외면했다던데요?”

“저런. 둘도 없는 벗 아니었던가요?”

“돈 앞에는 아무래도 장사 없는 거죠, 뭐. 몰락하기 직전인 가문을 도와서 뭐가 남겠어요.”

“이래서 투자는 늘 조심해야 한다니까요.”

“그나저나 오늘 무도회의 주인공들은 어딜 갔죠?”

“아까 못 보셨어요? 백작 부인께서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던걸요. 아마 백작님께서 진한 애정으로 다독여 주러 가셨나 봅니다.”

“이래서 평민 출신이란. 그나저나, 그레나딘 대공이 왔다는 사실을 아직 듣지 못하셨을까요?”

이야기의 주제가 리카온으로 바뀌자 연주 또한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프레사는 뒷말은 대충 흘려들으며 그들의 말을 곱씹었다.

소프 가문이 막대한 빚은 졌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 가문의 자랑거리였던 그 아름다운 저택까지 경매에 넘어갈 줄이야.

저도 모르게 리카온의 손을 꽉 붙잡은 프레사는 로렌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돈 나갈 구멍을 막을 테니 사용인들을 해고했거나, 돈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용인들이 달아났을 거야.’

로렌은 괜찮은 걸까?

로렌이 아니었다면 프레사는 이 삶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로렌에게 보석 몇 개를 남겨주고 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어렸을 때부터 일해 온 곳을 떠나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로렌은 백작 가문을 싫어했으나 그녀의 직업에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프레사는 어느새 춤을 추는 것도 잊고 로렌 걱정에 사로잡혔다.

그런 그녀를 깨운 것은 리카온의 낮은 목소리였다.

“레사, 음악이 끝났습니다. 자리로 돌아가죠.”

“아.”

프레사는 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리카온을 바라보았다.

리카온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서 음식이 쌓인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프레사는 그의 넓은 어깨와 등, 단정한 목덜미를 응시하며 생각을 갈무리했다.

‘로렌과 만나야겠어.’

소프 저택에 다짜고짜 찾아갈 수는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편지는 너무 위험해. 가뜩이나 저택 상황이 안 좋으니 중간에 가로채 검열할 수도 있고. 하지만 로렌 외의 사람은 믿을 수 없어.’

프레사는 리카온이 건넨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시며 고민했다.

그때 익숙하지만 듣기 싫은 음성이 프레사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레나딘 대공 전하.”

프레사는 어깨를 움찔 떨며 정면을 응시했다.

로완 길레스피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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