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32화
“어, 어떻게? 당신은 죽…… 죽었잖아요!”
앨리샤가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을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채 소리쳤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던 연회장이 단번에 그녀의 말을 신호 삼아 소란스러워졌다.
주변의 시선을 알아차린 로완이 침착한 척 말문을 열었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프레사가 차분한 어조로 로완의 말을 잘랐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요. 아, 앨리샤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나 봐요?”
“이게 무슨 소리예요, 로완?”
앨리샤가 로완의 팔을 거세게 흔들었다.
역시 앨리샤는 프레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소프 가문도 조용했으니 로완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거야.’
왜일까? 원래의 로완 길레스피라면 앨리샤에게 곧장 말했을 텐데.
파로 마을에서 로완과 재회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했던 헛소리가 진심인가?’
그럴 리가. 로완의 진정한 사랑은 앨리샤 루미스였다.
아니라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프레사는 원작과 달리 로완을 사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앨리샤 진정해. 나중에 설명할게.”
“하지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 전 모르겠어요!”
로완이 달랬으나 앨리샤는 울먹이며 프레사를 한번 쳐다보더니 순식간에 연회장 밖으로 사라졌다.
로완은 따라가려는 듯 잠시 그쪽으로 몸을 돌렸으나 마음을 바꿨는지 다시 프레사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리카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프레사를 반쯤 가리고 섰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약혼자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까지는 연회에 참석할 적당한 명분이 필요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리카온은 연극치고는 너무 완벽하게 굴고 있었다.
좋은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해 줄 줄이야.
“인사는 적당히 끝낸 듯하니,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제 약혼자가 몸이 좀 약해서.”
리카온이 낯간지러운 말을 뻔뻔하게 내뱉는 바람에 프레사는 하마터면 그의 옆구리를 찌를 뻔했다.
마차 안에서 여러 번 호칭 연습을 했으나 여전히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약혼자라고 사기를 치자는 건 전부 리카온의 생각이었다.
프레사는 그 사실을 제국에서 알게 되면 곤란하지 않을지 걱정했으나, 리카온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어차피 제국에서 내놓은 대공이라나, 뭐라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리카온은 프레사가 죽은 척 위장했다는 사실보다, 더 자극적인 소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거짓말로 모두를 속이고 떠난 것이 어느 정도 무마될 테니까.
죽은 프레사가 그냥 살아 돌아온 것보다 칸체르 제국 대공의 약혼자로 돌아오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는 의미였다.
“대공 전하의 약혼자, 군요.”
분명 대화하는 상대는 리카온이었는데 로완은 시선을 프레사에게 고정한 채였다.
리카온이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나직이 대꾸했다.
“그렇죠. 약혼자.”
“언제 약혼까지 하셨습니까? 소식을 듣지 못했…….”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백작에게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로완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순순히 사과했다.
프레사는 그 뻔뻔하고 재수까지 없는 낯짝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리카온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할 일이 대충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자는 신호였다.
리카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프레사를 에스코트해 로완을 스쳐 지나갔다.
프레사는 로완을 쳐다볼 필요가 없어지자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귀족들은 어느새 양쪽으로 갈라져서 두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수군거렸다.
프레사는 여유로운 척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수는 여전히 경악한 표정이었고, 몇 명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들이 무슨 말을 속삭이는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듯했다.
몇 걸음이나 더 갔을까.
우두커니 서 있던 로완이 어느새 프레사 쪽으로 완전히 돌아선 채 그녀를 불러 세웠다.
“프레사.”
프레사는 아주 살짝 몸을 틀어 그를 응시했다.
로완의 표정은 딱딱했으나 입매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웃어?’
당장 머리채를 붙잡아 탈탈 흔들어 탈모로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프레사는 더 큰 계획을 이루기 위해 꾹 눌러 참았다.
그녀는 보란 듯이 리카온의 팔에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세우곤 망설임 없이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으나 꽤 긴장했었던 건지, 마차로 돌아오자마자 모든 기력이 다 사라졌다.
프레사는 그대로 주르륵 흘러내릴 것처럼 간신히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해.’
로완과 앨리샤 사이를 뒤흔들었고, 프레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수많은 사람에게 알렸다.
아마 소프 가문까지 하루도 안 되어서 전해지겠지.
‘제롬이 정말 약속을 지켰다는 건 여전히 의외야.’
원래부터 겁쟁이긴 했지만.
“피곤해 보입니다, 레사.”
옆자리에 앉은 리카온이 걱정이 담긴 어투로 말했다.
프레사는 쿵쿵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피곤한 건 사실이에요. 아무래도 이런 건 영 어려워서요.”
“어려웠다는 사람치고는 꽤 잘하던데요.”
“다 리카온 씨 덕분이에요. 여러 모로 고마워요.”
프레사는 리카온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심지어 리카온은 용독을 치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직 허약한 상태일 텐데 기꺼이 나서 주다니.
프레사의 인사에 리카온이 말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려는 찰나, 리카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제 부탁이나 들어줘요.”
“이상한 부탁은 아니죠?”
“설마 내가 그러겠습니까?”
장난스레 되받아친 리카온이 겉옷을 벗어 프레사의 어깨에 얹었다.
“한숨 자요. 내일 새벽에 파로 마을로 돌아가야 할 테니 쉴 틈이 없을 겁니다.”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레사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파로 마을로 떠나기 전에 들를 곳이 있어요.”
로렌과 연락할 방법을 드디어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