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33화
로렌과 처음부터 가까웠던 건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프레사의 기억은 꽤 단편적이었다.
환생 후의 어린 시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새로 태어났으니 평범하게 자라면서 아주 오래전의 일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지금도 종종 미심쩍은 기억 몇 가지는 있었다.
간혹 어렸을 때 분명 소프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있었다거나.
어쩌면 전생의 기억일지도 모르겠지만, 프레사는 가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지만 애써도 그 기억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아 달리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어쨌든 그런 프레사가 기억하는 로렌은 분명 처음부터 다정한 사람이었다.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학대받아 만신창이가 된 프레사의 상처를 소독해 줬다.
‘나한테 잘해 주지 마.’
프레사는 당연히 로렌에게 벽을 쳤다.
로렌은 원작에서 한 줄조차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원작에서 벗어나 끔찍한 일을 겪지 않으려면 그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서는 안 되니까.
‘어째서요? 아가씨는 아직 어린 분이세요. 어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로렌은 차갑게 밀치는 프레사의 손을 붙잡으며 다정히 웃어줬다.
그저 프레사가 아직 어리고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사용인과 고용주의 관계임에도 로렌은 한결같이 친절했다.
어쩌면 원작의 프레사에게도 로렌은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까?
프레사는 처음으로 그런 희망을 품었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던 건지 로렌과 가까이 지내도 별다른 제약은 주어지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부러 실험까지 했는데 로렌과 연관된 일에는 페널티가 없었다.
로렌은 그래서 프레사에게 가족보다 더 가족 같았고 마음을 열 수 있는 단 한 명의 사람이었다.
이 삭막한 원작의 악녀 역할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숨구멍이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로렌의 도움을 받았으니 프레사의 부채감은 제법 부피가 컸다.
‘그러니 로렌을 위해 움직일 거야.’
물론 지금 계획한 일이 무사히 잘 풀린다면 결과적으로 로렌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프레사는 로렌과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아직 차가운 공기의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로렌이라면 분명 그녀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이곳으로 올 것이다.
프레사는 로렌과 단둘이 만나고 싶어 리카온을 먼저 배에 오르게 했다.
어둑어둑하던 바다가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수평선 위로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방이 온통 주홍색 빛이었다.
“아가씨!”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프레사는 로렌을 향해 웃어 보였다.
로렌이 단번에 그녀의 앞까지 다가와 섰다.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약하게 숨을 헐떡였다.
“역시 올 줄 알았어, 로렌.”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몸은 어떠세요? 혹 부작용이라든가…….”
로렌은 늘 그랬듯 프레사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리고 딱 봐도 멀쩡해 보이는 프레사를 이리저리 살펴보기까지 했다.
프레사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내젓고 용건을 꺼냈다.
“곧 파로 마을로 출항할 거야. 그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만나러 왔어.”
“네, 말씀하세요.”
로렌은 금세 침착해져서 프레사의 말을 기다렸다.
프레사는 로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소프 가문 상태가 나쁘다고 들었어. 로렌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사용인 대부분은 이미 저택을 떠났을 텐데.”
“저는…… 괜찮아요, 아가씨. 제가 아가씨보다 더 어른인걸요. 모은 돈도 있고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이에요.”
“고향?”
“네, 부모님이 계신 곳이요.”
프레사가 미간을 찡그렸다.
로렌은 웃고 있었으나 사실 좋은 계획이 아니었다.
로렌의 부모님은 늘 로렌이 빨리 마을 남자와 결혼해 정착하기를 바랐다.
사랑하지도 않는, 적당히 나이 많은 남자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프레사는 이미 생각해 둔 계획이 있었으나 굳이 로렌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약방에 와서 같이 일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도, 지금 로렌이라면 거절할 게 분명했으니까.
착하고 다정한 로렌은 프레사에게 짐이 되기 싫어할 터였다.
죽은 척 떠나기 전에도 몇 번이나 같이 가자고 말했으나 로렌은 그럴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었다.
신중하게 생각을 가다듬은 프레사는 곧 로렌의 두 손을 꼭 붙잡고 간절히 속삭였다.
“조금만 기다려줘, 로렌. 나를 믿고 그렇게 해줄 수 있지?”
“네? 그렇지만 아가씨…….”
빠아앙.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이 울려 퍼졌다.
프레사는 로렌을 가볍게 껴안은 후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이제 갈게.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네……. 건강히 지내세요, 아가씨. 꼭 몸조심하시고요.”
로렌의 눈가가 붉어졌다.
프레사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곧 만날 테니 지난번처럼 거창하고 아쉬운 작별 인사는 남길 필요가 없었다.
프레사는 로렌을 뒤로한 채 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