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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34화 (34/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34화

검붉은색 정장 차림의 아이작은 잘 정돈된 곱슬머리를 흔들며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프레사의 약방에 들어섰다.

하지만 단정한 복장이나 태도와 다르게 얼굴은 지난번보다 훨씬 피곤해 보였다.

가뜩이나 창백한 안색이 더 파리했다.

‘요즘 일이 바쁜가?’

프레사는 미래의 동업자 상태가 영 시원찮아 보여서 조금 걱정스러웠다.

리카온과 제드는 하필 오늘 제국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부재중이었다.

물론 프레사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매출만 기록한 장부를 따로 빼 두었고, 가장 먼저 연고의 효과를 본 알버트를 초대했다.

알버트는 그새 더 자란 머리털 덕분인지, 원래였다면 거절했을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심지어 연고를 쓰기 전에 그려 두었던 초상화까지 가져와 주었다.

“이 연고를 사용한 후 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알버트는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채워진 정수리를 아이작의 눈앞까지 바짝 들이댔다.

“알버트 씨.”

프레사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그를 말리려고 했으나, 아이작은 도리어 흥미로운 듯 알버트의 정수리를 꼼꼼히 확인했다.

“이 정도면 인생이 달라질 수밖에 없겠네요. 축하드립니다.”

아이작이 알버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으나, 특유의 말투 탓인지 도리어 놀리는 것 겉처럼 들렸다.

‘이 길드 마스터도 좀 이상한 사람이긴 해.’

사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자주 만난 적도 없었으나 프레사는 아이작과 나눈 짧은 대화만으로도 그의 독특한 성격을 알아차렸다.

아이작은 아예 알버트의 머리털 숫자를 셀 기세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알버트 씨.”

서둘러 알버트를 돌려보낸 프레사는 아이작에게 약방 내부를 구경시켜 주기로 했다.

아이작은 프레사의 안내에 따라 약방 내부와 지하실, 그리고 텃밭까지 전부 살펴본 후에 다시 1층으로 돌아오고 나서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협소하네요. 일반 저택에 약방을 차리셨을 줄은 몰랐는데요. 이유가 뭡니까?”

“네. 지하도 있고 이 정도면 약방 운영에는 별문제가 없어서요.”

사업 규모가 커지면 직원을 몇 명 더 고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약방 규모는 지금이 딱 편했다.

넓은 텃밭과 지하 그리고 판매대와 약장이 있는 1층 정도면 적당했다.

오히려 너무 크면 유지비만 추가로 들 테니까.

아이작이 말간 녹색 빛의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프레사를 응시했다.

“다른 곳으로 이사하실 생각은 없으시고요? 왕국으로 돌아오신다거나. 여긴 교류하기에는 너무 오지라서요. 배로만 올 수 있어 교통까지 불편하죠.”

“네, 저는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약초를 재배하기에도 좋은 환경이고요.”

“혼자 거주하실 집을 찾는 것치고는 규모가 큰 저택을 원하시더니 이런 계획을 세우고 계셨군요. 당시에는 이렇다 할 경험조차 없는 당신의 결정이 무모하다고 생각했죠.”

아이작은 나직이 중얼거리고 약병을 하나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프레사는 그가 여기까지 왔으니 이 계약은 이미 성사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저 재수 없는 언행과 달리 꽤 꼼꼼하게 이것저것 확인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자라라 머리털 연고의 효능을 확인했을 테니 진짜 온 거겠지.’

내 집 마련처럼 규모가 큰 길드의 마스터가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분명했다.

그때 아이작이 크게 휘청거리더니 들고 있던 약병을 떨어트렸다.

프레사가 깜짝 놀라 그를 부축했지만, 와장창 소리와 함께 약병이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괜찮으세요?”

“아…….”

아이작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상태가 별로더라니.

“지병이 있으신가요?”

“아뇨. 그건…….”

아이작이 나직이 신음하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으나,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저기요, 저기요.”

프레사는 손가락을 펼쳐 아이작의 뺨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이작은 깊은 잠에 빠진 듯 좀처럼 깨어나지를 못했다.

「이 인간 엉망이구나.」

리스가 아이작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말했다.

「뭘 했는지 몰라도 생명력을 빼앗기고 있구나. 아무래도 이상한 걸 삼킨 것 같다.」

“생명력을요? 도대체 뭘 먹었길래…….”

「이대로 두면 비명횡사하겠다.」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위에 든 걸 전부 게워내야 해. 뭘 먹은 건지 확인해야 하니까.」

프레사는 대답을 듣자마자 지하로 달려가 조합법을 찾은 후 적절한 약을 만들어 돌아왔다.

조합법 설명에는 ‘소중한 동물 친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는데 쩝쩝거리며 나타날 때’라고 쓰여 있었다.

아이작이 소중한 동물 친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토하게 만드는 건 비슷한 원리일 테니까.

“케이드 씨, 케이드 씨. 정신 좀 차려 보세요.”

프레사는 아이작의 뺨을 툭툭 두드린 후 바로 눕혀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걸쭉한 녹색 액체를 조금 먹인 후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옆으로 돌려 눕혔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아이작이 작게 기침하며 깨어나더니 엎드린 채 구역질을 시작했다.

“우욱……!”

몇 번 더 괴롭게 토악질하던 그의 입에서 갑자기 시커먼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잡아야 한다, 레사!」

리스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프레사가 옆에 있던 유리병을 거꾸로 뒤집어 덩어리를 가뒀다.

시커먼 덩어리는 슬라임처럼 흐물거렸는데, 마치 자아가 있는 듯 유리병에 연신 몸을 부딪치며 빠져나오려는 행동을 보였다.

‘이게 뭐지?’

프레사는 인상을 찡그린 채 유리병에 갇힌 정체불명의 생물을 쳐다보았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이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프레사를 쳐다보았다.

프레사는 유리병에 갇힌 알 수 없는 생물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좀 치사하기야 하지만 이것만큼 확실한 방식은 또 없었다.

“제가 방금 당신 목숨을 구했거든요.”

“그게 대체 뭐…….”

아이작이 다시 우욱, 소리를 내더니 프레사가 슬쩍 내민 양동이를 붙잡고 마저 게워냈다.

프레사는 침착하게 그의 등을 두드려 주며 이 끔찍한 구토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이작은 한참 후에야 토를 멈췄다.

그가 진정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린 프레사가 지금껏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최근에 어딜 다녀오셨나요? 아니면 낯선 음식을 드셨다거나.”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당신이 이 이상한 걸 주워 드셨으니까요.”

“…….”

이상한 것을 토한 덕분인지 혈색을 되찾은 아이작의 표정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세계수의…… 뿌리에 다녀왔습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구나.」

리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계수의 뿌리라면 세계수를 수호하는 요정들이 거주하는 미지의 영역과 맞닿은 곳이었다.

인간은 요정들의 땅에 들어설 수 없을 텐데…….

“저는 요정족 혼혈입니다. 그곳은 제 고향이고요.”

프레사의 의문을 읽었는지 아이작이 침착한 투로 설명을 덧붙였다.

「어쩐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더라니. 뿌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내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세계수를…….」

리스가 평소와 다르게 잿빛으로 물든 채 허공을 배회하더니 곧 지하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불안해져서 안정을 찾기 위해 식물이 많은 장소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프레사 역시 리스가 걱정스러웠으나 일단 아이작과 계약을 마무리해야 했기에 선뜻 따라갈 수 없었다.

‘리스 님도 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거야.’

그나저나 세계수에 정말 무슨 문제가 생긴 거라면 대륙 전체에도 영향을 끼칠 텐데, 이러다 큰일이 벌어지는 건 아닌지 조금 불안했다.

‘원작의 완결과 연관되어있는 건가?’

보통 완결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주인공들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로 끝나면 그만이었으니까.

외전이라는 변수가 있기야 했지만 프레사가 태어난 이곳은 외전 없이 완결이 난 소설이었다.

만약 완결이 그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거라면…… 이 세계에 종말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건가?

프레사가 유리병 속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사이, 아이작이 질문을 던졌다.

“그 덩어리는 뭡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연구해 봐야 할 것 같네요. 가져가시겠어요?”

아이작은 대형 길드의 마스터였으니 자체적인 연구부를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프레사 역시 이 이상한 생물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으나,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혹 리스 님에게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까.’

이 덩어리가 숙주에게 기생하며 생명력을 흡수하는 형태라면 혼자 다루기에는 다소 위험했다.

아이작은 잠시 고민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결과는 당신에게도 알려드리도록 하죠.”

프레사는 망설이지 않고 유리병을 아이작에게 건넸다.

아이작은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죽 가방에 병을 집어넣고 나서 다시 프레사를 보았다.

“그리고 계약서, 지금 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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