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36화
일정을 끝내고 파로 마을로 향하는 배에 오른 리카온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난간에 두 팔을 올리고 점점 멀어지는 제국의 항구를 응시했다.
‘번거롭게 일을 만드는군.’
이번 호출은 황제의 뜻이 아니었다.
제국의 상위 귀족들이 리카온의 약혼 소식을 듣고 황제를 닦달한 것이 그 이유였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리카온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 우뚝 서서 리카온의 눈치를 살피던 제드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전하, 제발 인내심을 가지십시오.”
리카온이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제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난 이미 충분히 참지 않았던가. 그들이 내가 죽을 줄 알고 손을 놓고 있었던 게 문제지.”
“전하…….”
제드는 영 불안한 눈치였다.
리카온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그가 잔잔할수록 큰일이 터지곤 했다.
제드는 리카온이 어렸을 때부터 그 곁에 머물렀기에 누구보다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제드. 아직은 그 역겨운 노인네들을 더 참을 수 있을 테니.”
나직이 내뱉은 리카온이 눈가를 찡그린 채 푸르고 깊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프레사의 눈동자와 닮은 색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저 끝을 알 수 없는 곳까지 가라앉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적당히 내 도움을 받으면 될 텐데.’
프레사는 처음부터 자기주장이 강했다.
리카온이 제국의 대공이자 큰 상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움의 손길을 거절했다.
어쩌면 그러한 성격 덕분에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여전히 용독이 그의 혈관에 흐르고 있었으나 예전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지금은 다른 의미로 괴롭지만.’
리카온은 프레사에게 여전히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와는 조금 다른 부류의 감정이었다.
이것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프레사를 곁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프레사를 파로 마을이 아닌 제국으로 오게끔 유도해야 했다.
‘쉽지 않겠지.’
프레사는 막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리카온은 프레사가 당연히 길드와의 계약에 성공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니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프레사에게는 여전히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았으므로.
그는 프레사와 약속한 그대로 복수를 도울 것이고, 옆에 서서 지켜줄 것이다.
아마도 이 감정은…….
문득 한낮의 태양이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졌다.
그 순간, 프레사의 저택에 설치해 둔 마법진이 이 먼 거리까지 잘게 공명했다.
‘또 불결한 침입자가 나타난 모양이군.’
리카온은 눈썹을 찌푸린 채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불쑥 중얼거렸다.
“제드, 먼저 갈게.”
“예?”
제드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으나 리카온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또 치사하게 혼자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사라진 것이다.
갑판 위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제드가 제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쥐어뜯었다.